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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적호 Jan 21. 2024

# 14. 터부와 동화

교육 잡설(雜說)

# 14. 터부와 동화


    종교는 시작부터 인류의 전달 욕구와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의 어떤 행위를 규정짓는 초기 의지를 욕구라 부른다면 전달 욕구야말로 번식 욕구와 함께 가장 근원적일 수 있습니다. 종교가 먼저였는지 아니면 후대에 전해야 하는 것을 모으다 보니 종교가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요즈음은 종교도 사람이 만들었다는 이론이 정설처럼 굳었습니다.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에 의해서 정립된 진화론(進化論, evolution theory)에 의하면 모든 생명은 생존과 번식을 위해 존재합니다.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는 환경에 적응해야 하고, 적응하기 위해서는 위협과 기회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슈퍼능력을 태어나서 교육받아 습득하기에는 시간도 부족하고 생존확률도 낮아집니다. 그래서 몇몇 근본적 능력은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게 필요합니다. 

찰스 다윈, 갈라파고스, 핀치 새

    찰스 다윈은 본능과 습성을 구분했습니다. 본능은 유전적으로 전달되는 행동으로, 경험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습성은 경험에 따라 획득되는 행동으로, 본능과 달리 후천적으로 형성될 수 있습니다. 다윈은 본능과 습성이 모두 생존과 번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본능은 환경에 적응하고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행동을 제공합니다. 예를 들어, 개가 새끼를 낳고 젖을 주는 행위는 본능에 의한 것입니다. 반면에 습성은 환경에 적응하고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새로운 행동을 획득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어, 개가 훈련을 통해 앉거나 엎드리는 행동을 습득하는 것은 습성에 의한 것입니다. 다윈은 본능과 습성이 진화의 결과라고 주장했습니다. 


    진화하는 방법은 조금 다릅니다. 본능은 유전적으로 전달되면서 진화했고 습성은 환경에 적응하고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새로운 행동이 후천적으로 획득되면서 진화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다윈의 본능과 습성에 대한 이론은 현대 동물 행동학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다윈의 이론은 동물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당연히 인간의 행동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언어 습득은 본능적인 행동보다는 습득한 행동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사회에서 격리되거나 고립된 집단의 경우 언어 습득이 다른 형태를 보이게 됩니다. 


    물론 경험주의(經驗主義, empiricism) 자들은 본능과 같은 선험적 지식의 존재에 대해서 부정적이었습니다. 선험적 지식(a priori knowledge)은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도 참임을 알 수 있는 지식인 반면 경험적 지식(a posteriori knowledge)은 경험을 통해서만 참임을 알 수 있는 지식을 말합니다. 경험론자들은 모든 지식은 경험에 따라 획득된다고 주장하여 선험적 지식의 존재를 부정했습니다. 


    당연히 합리주의(合理主義, rationalism)를 주장하는 사람은 선험적 지식은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도 참임을 알 수 있는 지식이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경험이라는 것은 단순히 교육이나 직접적 경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정언명령(定言命令, Kategorischer Imperativ, Categorical Imperative)처럼 당연히 아는 것, 알아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칸트와 칸트 묘비. 『실천이성비판』으로 윤리적 도덕 법칙을 구축한 칸트의 묘비에 쓰인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경탄하는 두 가지는 하늘에 반짝이는 별과 내 마음의 도덕률이다."

    당연하게도 임마누엘 칸트는 선험적 지식의 존재를 지지했습니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선험적 지식이 어떻게 존재하고 전달되는가가 주요 과제였습니다. 선험적 지식이 존재한다면 세대를 거치면서 다윈의 이론대로 진화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선험적 지식은 유전과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선험적 지식이 유전적으로 전달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찬반양론은 현대에는 어떻게 보면 무용한 논쟁일 수도 있습니다. 


    유전학의 발전으로 DNA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정보가 밝혀지고 있으니, 사실 현재는 선험적 지식의 유무보다 특정 유전 정보의 발현 방식이 더 중요합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험적 지식이 유전적으로 전달될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결론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선험적 지식에 대한 개념적 정의가 모호하거나 달라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정리된 가설을 정리하면 선험적 지식은 경험에 따라 촉발되며, 유전적으로 전달되는 선천적인 인식 능력에 의해 형성됩니다. 또는 선험적 지식은 유전적으로 전달되지 않지만, 유전적으로 전달되는 선천적인 인식 능력에 의해 습득됩니다.      


    제 생각으로는 유전적으로 전달되는 선험적 지식과 정보만 전달되나 어떤 상황이나 개인의 인식에 따라서 발현되는 지식도 존재하지 않을까 하고 추정합니다. 경험도 어떤 면에서는 선험적 지식의 단편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조심스럽게 해 봅니다.      


    아직 인간의 지식은 선험적 지식을 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선험적 지식과 유전의 관계에 관한 연구가 계속된다면, 인간의 지혜와 인식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러니 향후에도 선험적 지식과 유전의 관계는 철학과 과학 분야에서 계속해서 연구하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특히 머신러닝(machine learning)을 하는 AI(Artificial Intelligence), 뇌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일론 머스크의 뉴럴링크(Neuralink), 유전자조작(遺傳子操作, gene manipulation) 등의 발전과 맞물려 더욱 많은 논의가 필요합니다.      

일론 머스크와 뉴럴링크 합성 사진

   선험적 지식이 존재한다는 가정하에 모든 생명체에 가장 중요한 필수 지식은 다윈에 의하면 생존과 번식입니다. 이런 기본적인 지식은 유전된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생각에도 반론은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뱀의 눈, 호랑이 소리와 냄새 등은 다른 동물들에게 본능적인 공포를 야기하고 회피하도록 해서 생존을 보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공포는 학습으로 강화되기도 합니다.


    이런 것도 지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 보다 우리의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공포가 존재하고 유전이든 경험이든 전해진다면, 이런 공포의 기원과 활용 사례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교육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유전자에는 생존과 번식을 위한 방대한 양의 정보가 담겨있습니다. 부모가 교육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도 있고 한평생 느끼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생각과 행동을 제약하고 금기(禁忌, taboo)하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본능이 우리에게 위험신호를 주고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하는 방법을 알려준다면 경험과 교육은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주입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다시 다윈의 주장을 가져오면 이러한 본능과 경험은 진화합니다. 진화는 엄청난 시간과 환경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에 DNA 보다는 습성 혹은 경험의 유전을 낳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 혹은 상황을 우리는 문화, 문명 등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런 습성도 유전자에 반영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당연히 발현되는 유전자가 아닌 상황에 따른 경험하는 촉발 유전자 일 겁니다.      


    이미 우리는 연쇄 살인자의 자녀가 반드시 살인자가 되지 않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세대의 정신병이 후대에 전해지는 것은 정신병 보다 유전 형질의 전이 측면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경험이나 교육으로 정신병이 치유되지 않는 이유도 명확해집니다. 유전 형질의 변화 즉, 본능은 유전되며 경험이 개입할 수 없습니다.      


    물론 본능 중에서도 경험이 개입될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간의 언어 습득이 좋은 예입니다. 언어 습득은 유전학 또는 뇌과학(신피질) 등의 영향을 받습니다. 당연하게도 언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만들고 사용하는 능력은 인간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일부 동식물이나 곤충 등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체계를 가지고 있지만 언어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개미의 페로몬(pheromone)은 생각보다 다양한 의사소통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먹이를 찾고 길을 안내하며 적과 전쟁을 수행하도록 합니다. 심지어 적을 속이는 프로파간다(propaganda, 선전선동) 페로몬을 써서 적 개미를 혼란시키고 자기들끼리 서로 싸우게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개미의 페로몬을 언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언어 습득은 분명히 유전에 포함되지만 경험이 개입하지 않으면 발현되기 어렵습니다. 본능 중에도 문화와 관련된 많은 분야가 이에 해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본능의 영역까지 끌어올린 지식도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의 집합을 터부(taboo)라고 부릅니다.     


    터부(taboo)는 특정 문화나 집단에서 금지되거나 금기시되는 행위, 대상, 언어 등을 의미합니다. 터부는 종교적, 사회적, 문화적 이유로 인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 터부는 종교적 신념이나 가르침에 위배(違背)되는 행위를 금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슬람교에서는 돼지고기의 섭취가 터부입니다.      

Taboo

    사회적 터부는 특정 문화나 집단에서 용인되지 않는 행위를 금지하는 것입니다. 문화적 터부는 특정 문화에서 부적절하거나 불쾌하다고 여겨지는 행위를 금지하는 것입니다. 터부는 문화나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개인의 안전과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존재합니다.      


    또한, 터부는 특정 문화나 집단의 가치관과 규범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집단과 개인의 생존을 위한 터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종교, 사회, 문화적 터부는 어떤 것이 먼저였는지 규정하기 애매한 것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이슬람교에서 돼지고기를 먹는 행위가 왜 시작되었는지 명확하지 않다는 겁니다. 중동의 날씨 때문에 돼지고기가 잘 상해서 그런 것인지 돼지가 인간과 음식물을 나누어야 하는 문제 때문인지 아니면 교리적으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명확한 것은 터부는 유전되며 생존을 위해서 종교 이전부터 알고 있었고 일부는 유전학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슬람 허용 음식 인증 halal


   터부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첫째, 행위 금지를 금지하는 터부로, 특정한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규범입니다. 예를 들어, 살인, 강간, 도둑질 등이 터부입니다. 이런 터부는 식인, 동족포식, 인신공양 등을 금지하며 체계화되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초기 인류의 모습을 동물들의 생활로 미루어 짐작하는데 동족포식의 예는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생존을 위한 동족포식은 공멸을 가져온다는 것을 인식했거나 생존을 위해서는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터부시 되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이후에 신화나 종교에서 미개 문화로 규정하고 점차 제도화되었습니다.      


    둘째로 대상을 금지하는 터부입니다. 특정 대상에 함부로 접근하거나 만져서는 안 된다는 규범입니다. 예를 들어, 성스러운 유물이나 죽은 자의 시신 등이 터부입니다. 특히 근친상간의 터부가 좋은 예입니다. 근친상간은 열성 유전병의 전이, 사회적 문제 등으로 대부분 국가에서 법으로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럽의 합스부르크 왕가나 파키스탄처럼 최근까지도 혈통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근친혼이 허락된 경우가 있었습니다. 열성 유전병은 과학적으로 명확하지는 않지만 오랜 시간 독립적인 가계에서 근친할 경우에 발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합스 왕가의 유전

    그렇지만 과거에는 유전학을 모르는데 어떻게 금지했을까요? 율법에서 정했기 때문일까요? 아마도 농경사회처럼 오랜 집단생활의 경험으로 터부시 여겼거나 협력하거나 전쟁으로 세력을 넓히기 위해 외부 결혼 동맹을 지지해서 금지시켰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특정 단어나 표현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규범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욕설이나 비방적 표현 등입니다. 국가마다 욕설의 대상이나 내용이 다른 이유가 사회적, 문화적 터부이기 때문입니다.     


   터부는 종교 이전부터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의 자유의지를 붙잡고 인간답게 살도록 교육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터부야 말로 유전과 관계없는 선험적 지식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칸트의 정언 명령도 결국 터부처럼 제도화되고 각인되고 교육되어야 제대로 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터부는 종교와 맞물리며 율법처럼 공고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절대로 하면 안 되는 겁니다. 기독교에서는 구약의 시대를 공포의 시대로도 이야기합니다. 신이 인간과 맺은 언약이 있으며 인간이 이를 어길 때 어김없이 신의 분노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부모들은 어린이들에게 이런 터부를 스스럼없이 저녁 식사 후 잠들기 전에 했고 아이들은 공포에 떨며 긴 겨울을 지내야 했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교육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고양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충족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과 사후를 빌미로 옭아매고 순종하는 삶을 강요했습니다.     

우상숭배와 인신공양

    숫자에 대한 터부도 있습니다.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보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숫자가 터부로서 가치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해석하기에 따라 숫자가 주는 의미는 변화무쌍합니다. 특히 숫자는 신화나 종교와 단순하면서도 속 깊은 의미로 잘 연결됩니다.      


    고대 신화에는 유독 숫자 3이 많이 나타납니다. 신이 항상 3명이 등장한다거나 신이 3가지 선물을 주는 등 의미는 다르지만 여러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구약과 신약에는 40이라는 숫자가 많이 등장합니다. 40년간의 광야에서의 고난, 40일의 설교 등등 40이라는 숫자는 어쩌면 극복의 숫자, 고통 너머 희망의 숫자일지도 모릅니다.      

40년의 광야

    반면에 서양에서 13이라는 숫자는 불길함을 상징했습니다. 예외적으로 태국은 서양과 관계없이 ‘피’를 나타내는 문자의 발음이 13과 유사해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하튼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와 12명의 제자로 13이 만들어졌고 결국 예수가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긍정의 숫자가 될 수도 있었지만 13은 터부시됩니다.      


    더불어 1307년 10월 13일 금요일은 십자군 전쟁의 핵심이었고 교황 기독교의 상징이었던 템플 기사단이 박해를 받은 날입니다. 13일의 금요일의 기원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중국은 8이라는 숫자를 좋아합니다. 중국어에서 숫자 8은 ‘빠’로 발음되는데 부(富)와 유사한 발음입니다. 이러한 발음의 유사성으로 인해 숫자 8을 좋아한다는 설이 있습니다.      

성전기사단

    물론 터부의 명확한 인과관계는 증명되지 않습니다. 문화로 정착되고 나면 사회적으로 자연스러운 교육이 뒤따르며 후대는 원인이나 정당성에 대한 공론화 없이도 무심히 따르게 됩니다. ‘메두사의 뗏목’이라는 희곡은 어떤 의미로 아이들에게 터부가 어떤 모습으로 현실화되는지 극단적 상황을 연출합니다. 구명보트에 13명의 소년 소녀가 표류하며 여러 이유로 상처 입은 소년을 죽이고 구명됩니다.      


    물론 반대하는 정의로운 소년이 주인공입니다. 좁은 구명보트 안에서 벌어지는 찬반 논쟁의 핵심 주제는 어른들에게 들은 13의 공포였습니다. 진짜 공포인지, 살기 위해 억지로 만든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터부는 비합리적 선택의 원인이며 밝히고 싶지 않은 내면의 동굴일지 모릅니다.      


    무엇인가 비합리적이고 급박한 의사결정의 위험을 감수해 주는 도피처로서 역할을 담당합니다. 당연히 생존 본능에 가장 중요한 부분일지도 모릅니다. 인간 뇌의 발달과 비약적인 사고의 확장은 문명을 낳았지만 반대로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어두운 그림자도 존재합니다. 어쩌면 어두운 또 다른 세상의 이정표 역할을 담당하도록 인간의 뇌가 만들어낸 상상의 산물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어느 민족이나 무섭고 공포의 신 외에도 온화하고 아름다운 신화 한두 개쯤은 있습니다. 신과 대립하기도 하고 순종하기도 하며 조화롭게 사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신들은 대부분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악마, 어둠, 탐욕, 흉폭, 잔혹, 교활 등을 담당하는 동물 혹은 유사종도 등장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의 신은 절대로 비방하면 안 되고 할 수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냥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지만 신이 만물을 만들었다면 죽음, 고통, 슬픔 등 본능적으로 인간이 싫어하는 것도 신이 만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신을 욕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종교에서는 다양한 동물들과 불신자를 예로 들어 어둠을 설명하고 대신 벌합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그런 통쾌한 이야기를 들으며 공포에서 잠시 벗어나 잠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우화입니다. 


   우화는 이렇게 신화, 종교, 터부 등과 교묘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우화는 동물이나 무정물에 인간의 감정이나 행동을 부여하여 이야기를 구성하고 그 속에 숨겨진 도덕적 교훈을 전달하는 장르입니다. 우화의 교훈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개인적인 교훈으로, 타인을 배려하고, 정직하고, 용기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등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인 교훈으로, 부조리한 사회를 비판하거나, 올바른 가치관을 제시하는 등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교훈은 일반 소설과 큰 차이는 없지만 주인공이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감정을 이입하는데 용이합니다.     


    우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어린이 교육에 활용되어 도덕적 가치관을 함양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성인에게도 삶의 지혜를 얻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회 비판이나 풍자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에도 활용될 수도 있습니다.     


   우화는 사실 현실에 대한 비판, 풍자적인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동물이나 무정물을 화자로 등장시킵니다. 반면에 동화는 보다 적극적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이 알려졌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 동화들의 원작은 상당히 잔혹합니다. 그리고 대부분 동화는 보다 직접적이고 극단적이며 현대 문학에 차용되는 모든 악인과 지극히 착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현대의 동화는 줄거리만 유지하는 선에서 잔혹한 장면을 많이 삭제했습니다. 물론 원전 그대로의 내용을 담고 있는 잔혹동화라는 장르도 존재합니다. 잔혹동화는 동화의 원작이나 구전 민담 중에서 폭력, 살인, 성적 폭력, 배설물 등과 같은 잔인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야기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어린이들에게 읽히는 동화는 이러한 잔인한 요소를 제거하거나 희석하여 전달되지만, 원작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그대로 들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그림형제의 "헨젤과 그레텔"은 마녀에게 잡혀간 아이들이 마녀를 죽이고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원작에서는 마녀가 아이들을 구워 먹으려는 장면이 나오며, 아이들이 마녀를 죽이는 방법도 잔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마녀를 화로로 밀어 넣는 그레텔 / 야후재팬 갈무리

    그림형제의 "백설 공주"는 사악한 계모가 백설공주를 죽이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원작에서는 계모가 백설 공주의 심장을 가져다가 먹는 장면이 나오며, 백설 공주가 독사에게 물려 죽는 장면도 잔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샤를 페로의 "빨간 망토"는 늑대가 빨간 망토를 잡아먹는 이야기입니다. 원작에서는 늑대가 빨간 망토를 먹고 빨간 망토의 할머니를 잡아먹는 장면이 나오며, 결국 사냥꾼이 늑대를 죽이는 장면도 잔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빨간 망토도 잡아먹힐까?

    당연하게도 잔혹동화가 어린이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습니다. 이러한 우려를 바탕으로, 잔혹동화의 원작을 각색하여 어린이들에게 적합한 내용으로 전달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려는 오히려 비합리적입니다. 게임이 아이들을 폭력적으로 만든다는 이야기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      


    물론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의 장시간 사용과 단순 반복적인 게임의 경우 아이들의 뇌 발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세뇌 수준의 교육이 아니고서 동화가 잔혹하다고 해서 아이들의 정서 발달이 교란된다는 것은 아이들의 판단 능력을 오히려 과소평가한 결과입니다. 물론 정서에는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는 있을 겁니다.

      

   오히려 잔혹동화가 현실의 잔인함을 반영함으로써 어린아이의 현실 인식, 정서를 공고히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현실에는 동화 속에서처럼 해피엔딩이 아닌, 슬픈 결말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잔혹동화를 통해 이러한 현실의 잔인함을 이해하고, 이에 대처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옛이야기의 매력’의 저자인 부르노 베델하임(Bruno Bettelheim, 1903~1990)은 요즘 어린이 문학이 내적 문제를 해소하는 데 중점을 두지 않고 교훈적인 내용을 중요하게 여긴다며 비판합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창작 동화도 교훈을 주거나 정보를 제공하는 데 그치거나 열린 결말인 경우가 많습니다.      

옛이야기의 매력

   잔혹동화는 어린이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지만, 올바른 해석과 이해를 통해 어린이들의 정서 발달에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장르입니다. 동화의 대표적인 세 가지 구조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악인을 잔혹하게 처벌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나라 부모님들이 가장 걱정하는 분야입니다. 헨델과 그레텔, 백설공주, 장화홍련 등이 대표적입니다. 어른들은 화해와 용서 등의 결말이 아이들에게 교육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린이들은 악인이 단죄되는 모습에 내적 불안감이 해소되고 현실적 안도감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악인을 더욱 악하게 그려야 하고 아이들은 그런 빌런의 단죄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둘째는 부모에 대한 모순적 감정에 대한 정리입니다. 아이들은 어머니에 대한 양가적 감정인 성스런 존재와 억압하는 존재 사이에서 내적 갈등을 겪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을 낳아 준 신과 같은 절대적 존재인 데 반해 현실적 어머니는 그냥 보통의 인간이거나 본인의 자유행동을 제재를 가하는 인간입니다.      


    이 사이에서 어린이들은 내적 갈등을 겪습니다. 이런 시기에 백설공주와 장화홍련에 미친 계모가 나옵니다. 아이들은 계모신화를 접하고 대신 욕하면서 현실을 조금씩 이해하며 성장합니다. 마지막으로 성장 스토리입니다. 이후에 많은 소설 등 문학에서 차용되는 소재입니다. 여러 이유로 소년은 집을 나서고 여행을 떠나며 친구를 사귀고 고행을 겪으며 깨달음을 얻고 독립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아이들에게 앞으로 겪어야 할 일들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부모와의 분리 불안을 해소하며 용기를 내서 살라는 내용입니다. 그 여정 각각의 에피소드는 잔혹하고 험난할수록 의미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동화가 다른 장르와 구별되며 다른 어떤 것보다 어린이가 반드시 읽고 어른이 해설해 주어야 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는 도움을 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나쁜 마녀만 있지 않으며 도와주는 고마운 천사가 더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삶에 고단해진 영혼을 잠시 쉴 수 있게 도와주는 존재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오히려 아이들을 위한다는 우리의 노력이 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잔혹한 내용의 동화들이 아이들의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한 일종의 장치라면 이런 정상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 어른이 되면 공감 능력이 결여되고 프로이트의 트라우마처럼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나타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베델하임은 공감 능력을 "타인의 감정과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능력"으로 정의했습니다. 베델하임은 공감 능력이 인간의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베델하임은 공감능력의 발달을 세 단계로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감각적 공감으로, 타인의 감정을 신체적으로 느끼는 단계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 자신도 슬픈 기분이 들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인지적 공감으로,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단계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슬퍼하는 이유를 이해하고 그 이유를 공감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정서적 공감으로, 타인의 감정을 자신의 감정으로 느끼는 단계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슬퍼하며 그 사람을 위로하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공감 능력은 아이 시기부터 경험적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짧은 시기에 체계적인 교육 없이 이러한 능력을 단계별로 쌓기는 쉽지 않습니다. 간접경험으로서 동화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유이며 이런 관점에서 교육이 필요하다고 여깁니다.      


    주인공이 처한 불우한 상황을 공감하고 슬퍼하며 본인과 동질화시키고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이해하고 같이 슬퍼하며 위로하는 단계를 거칩니다. 이 과정을 거치며 아이는 더 불안정하고 높은 단계로 감정이 격해지지 않고 정화작용을 일으키며 감정의 해소가 이루어집니다.      


    만약 악인이 통상적이어서 잔혹한 결말이 과하다고 여기거나 반대로 빌런급 악인을 결말에서 갑자기 용서하면 아이는 감정이 해소되지 않고 의구심을 안고 살아갑니다. 이렇게 미성숙한 공감 능력은 인간과 동물에 대한 학대 행위로 나타날 수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몬스터(MONSTER, 1994~2001)라는 일본 만화에는 동화로 아이들을 세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세뇌라는 개념은 현대 중국에서 직접적으로 사용했지만 광의의 개념으로 보면 역사가 오래되었습니다. 단순히 동화, 만화를 읽거나 게임을 한다고 해서 어떤 문제가 해소되거나 각인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MONSTER

    그렇지만 상황 연출과 반복 등의 교묘한 설계가 있다면 세뇌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러나 세뇌 같은 인위적인 뇌 조작은 언젠가는 뇌 얽힘 같은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인위적인 조작의 위험성입니다. 터부, 우화, 동화 모두 유아기, 소년기를 거치며 교육되는 많은 내용의 일부입니다.      


    과거에는 책이 많이 없었고 접할 기회도 부족했기 때문에 구전되거나 필사본을 돌려 읽었을 겁니다. 그런 한정된 내용을 반복적으로 듣고 전달자의 왜곡된 해설이 더해지는 경우, 어떤 아이들도 세뇌될 수 있습니다. 중국의 문화 대혁명,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주, 버마의 네 윈 정권 등은 현대 국가에서 교육의 왜곡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어쩌면 어떤 동화든 잠들기 전 읽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신의 축복일지도 모릅니다.      


   현대는 대부분 국가에서 교육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고 우선 과제로 시행하고 있습니다. 국가 정책과의 관계를 떠나서 모든 국가와 민족은 신화, 종교, 역사, 문학 등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개인의 정신적 성숙을 추구하고 나아가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엄청난 양의 테이터를 접하고 맹렬한 속도로 학습합니다. 그리고 부모는 아이에게 좀 더 정제된 양질의 자료를 교육하기를 원합니다. 당연히 잔혹하고 더러운 내용을 맑은 우리 아이들이 접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과 인간의 어두운 면도 교육해야 합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도 존재하는 것처럼 균형 있게 가르치고 조화롭게 살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구약성서에는 신을 배격하고 우상 숭배하는 많은 유대인이 나옵니다. 일종의 유대인 역사서기도 한 모세 오경에 왜 그들이 배교한 이야기를 전할까요? 그런 역사와 이야기를 통해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계속해서 경종을 울리기 위함일지도 모릅니다. 다만 요체는 가르치는 선생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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