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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받으면... 계약 끝나는 겁니다

비영리기관의 회계투명성, 자금관리

by 구르는 소

개인계약만 하시다가 법인 간의 부동산 계약은 처음 해봤다는 공인중개사님과 저희 기관 총무팀 직원들이 마주 앉았습니다. 일반적인 거래에서는 공인중개사가 대부분의 거래업무를 다해주는데, 이분이 법인 거래가 처음이다 보니 우리 기관의 총무팀 직원들이 해준 업무가 5~60%가 될 정도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마지막 협상 및 중개수수료 협상까지 최종 완료 후 저희 쪽 계약서에 최종 도장 날인하려고 모였습니다.

갑자기 이분이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시더니 5만 원짜리 2장이라며 그간 수고해준 총무팀 직원들 식사나 하라는 겁니다. 순간 테이블에 앉은 저를 포함한 총무팀 직원 2명이 얼음 상태가 되었습니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아무 말없는 저를 보며 총무팀장이 한마디 했습니다.


"그동안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저희는 단돈 천 원이라도 이런 거 안 받습니다. 저희가 항상 3명씩 같이 사장님 만나서 협상한 이유를 잘 아시지요? 저희가 사장님 때문에 고생한 것은 저희도 잘 알고는 있습니다만...

이거 받고 지금 이 계약 물릴까요? 아니면 외람되시겠지만 봉투 다시 집어넣으시고 계약 진행할까요?"

역시, 잘 배운 총무팀장입니다.


우리 기관의 후원자이기도 하셨던 공인중개사님은 잠시 멋적어하시다가 흔쾌히 다시 봉투를 본인 가방에 집어넣으셨습니다. 적은 돈이지만 자기 생각이 짧았다며, 자기성의 표시는 공식적인 후원금으로 표현하겠다고 해주셨습니다. 멋진 분입니다.

계약은 잘 완료되었습니다.

공인중개사님이 생각난 줄리안 오피의 작품

비영리기관의 회계투명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치 않습니다. 투명성, 특히 회계 쪽의 투명성은 비영리기관의 생명과도 같습니다. 비전도 좋고 미션도 나와 맞고 직원 복지도 좋은 NGO여서 꼭 일해보고 싶은 기관이 있다고요? 회계투명성이 안 좋다면 입사하지도 말고 후원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비영리기관이 망하는 제일 큰 이유가 후원금 모집에 실패해서가 아니라 후원금 관리를 잘 못해서입니다.

비영리기관들이 회계와 경영의 투명성에 목숨 걸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최첨단 디지털 시대에, 아직도 많은 국내 대형 NGO들이 영수증 원본과 카피본을 풀칠하여 이면지에 붙이고 있습니다. 카드사용 전산시스템에 들어가면 사용내역과 사용일자 등이 자세히 나오지만, 여전히 카드 영수증에 사용목적, 사용자, 구체적 사용내용을 세세하게 수기로 직접 영수증에 적습니다. 영수증 원본의 잉크가 쉽게 말라서 2~3년 뒤 내용확인이 어려울까 봐 또 한 번 영수증을 카피한 후, 옆에 원본 영수증을 붙입니다.


영수증에 이렇게 세세하기 기록하고 혹시 몰라서 또 디지털 장부의 적요란에 세세하게 적어놓습니다. 간이영수증 발급이나 개인 현금 사용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고 5만 원 이상 지출은 무조건 사전 품의서 작성 후, 지출 승인이 난 뒤 지출해야 합니다. 최근까지는 3만 원이었던걸 직원들이 너무 힘들어해서 5만 원으로 인상하였습니다. 많지 않은 직책보조비를 쓰는 리더들에게도 동일한 법칙이 적용됩니다.

회의비를 지출할 때는 반드시 일정 양식과 안건이 적용된 회의록이 필요합니다.

지출도 쉽지 않습니다. 회계담당자와 중간관리자, 최종 책임자의 다단계 결재가 이루어져야 집행이 됩니다.


모금을 할 때나 모금 금액을 계수할 때, 계약사항이 협의되는 미팅 등은 반드시 2인 이상의 복수 구성된 직원들이 함께해야 합니다. 모금 금액을 계수하는 곳에는 반드시 영상기록장치가 있어야 하고 녹화영상은 일정기간 이상 보관되어야 합니다. 당일 계수된 모금액은 금융기관에 당일입금이 원칙이며 부득이한 경우, 금고에 보관 후 다음날 입금시켜야 합니다. 계약 등 금전이 오갈 수 있는 미팅은 반드시 업무시간에만 진행이 되어야 하고 접대를 하는 것도, 접대를 받는 것도 금지입니다. 취업청탁 등을 예방하기 위해 추천서 제도는 없고 입사면접도 블라인드 면접을 기본으로 실무자 면접과 책임자 면접 등으로 구분되어 진행됩니다.


외부 감사인으로 활동하는 회계사들조차 '너무 투명하려고 스스로를 옥죄면서 일하는 거 아니냐' 이런 얘기를 건네는데, 비영리기관에서는 이런 말을 훈장으로 여겨야 합니다.

단체장이, 지역의 지부장이 빨리 돈 지출하라고 명령해도 품의서가 작성되지 않거나 지출결의서가 승인되지 않으면 회계담당자가 절대 집행하지 않습니다. 즉 공식적인 서류가 아니고서는, 절대 지출행위가 이루어져서는 안된다는 얘기입니다.


이래야 비영리기관이 살고 활동가들이 비난을 받지 않습니다.


비영리기관의 회계는 이렇게 모든 걸 종합적이고 구체적인 수치로 보여줘야 합니다.

NGO는 남의 돈 쉽게 벌어서 사회적으로 폼나는 일에 쓴다고, 비영리는 후원금이나 정부기금 받아서 편하게 일한다고 비아냥대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비영리기관에서 일하고 있는데 회계작업이 조금 편하구나라는 생각이 든다면, 소속 기관의 투명성을 점검해봐야합니다.

누가 와서든, 어디서든 갑자기 회계서류 보자고 할 때 가감 없이/준비 없이 보여주고자 정말 많은 비영리기관과 그 안의 활동가들이 회계투명성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내가 유형의 물건 팔아 번 돈이 아니라 '가치'를 팔아 번 돈이니 더욱 소중하고 귀하게 써야 합니다.


첨단 디지털 시대, 영수증에 이것저것 자세히 적고, 카피된 영수증 옆에 원본 영수증 풀칠하는 행위.

백 년 뒤에도 비영리기관들에서는 없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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