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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당신네 후원자인데 말이야

정기후원자의 귀한 삶으로~

by 구르는 소

"0000번 차량 좀 빼주세요. 그쪽 사무실을 방문하셨다네요."

퇴근 무렵 주차장에서 차를 빼 달라고 두세 번 전화가 와서 직원들과 사무실내 클라이언트들한테 물어봤는데 아무도 차량 주인이 아니라는군요.

아침부터 주차가 되어 있었는데, 대체 누가 주차를 하고선 저희 사무실 핑계를 댔을까요? 어서 빨리 차를 빼 달라는 상기된 목소리를 뒤로하고 주차장에 내려가 보니 사무실 연락처가 딱 기재되어 있군요.

차량에 기재된 개인전화번호를 찾아 직접 전화해봤습니다. 한참있다가 어느 어르신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어! 내가 거기 후원자요. 용무 보러 왔다가 거기 잠깐 주차했는데. 무슨 문제라도?"


이런. 후원하신다고 해서 등록되지 않은 차량을 함부로 사무실에 주차하면 안 된다고 정중히 말씀드렸더니 내 후원금으로 운영하면서 잠깐 주차한 것도 용납을 못해주냐며 화를 내시네요. 기다리는 다른 차주분한테는 양해를 구했고 다행히 얼마 뒤 그분이 와서 차를 빼주었습니다.


미리 말씀을 하셨으면 좋았을 것을요. 후원자라고 지나가시다가 찾아오셔서 물 한잔 드시는 분들도 종종 있습니다. 급히 2~3장 카피를 해야 하는데 근처에 딱히 적당한 장소를 못 찾았다며 초등학생 때부터 모금 프로그램에 참여했다는 대학생도 있었고요. 괜찮습니다.

다만, 진짜 후원하시는 정기후원자라면 저렇게 막무가내로 주차를 하시지는 않을 거라면서 직원들과 웃어넘겼습니다.


기부 또는 후원을 요즘 많이 합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상부상조의 문화가 대대로 이어지는 훌륭한 나라입니다. 이런 시민의식이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해외원조를 하는 나라로 바꾸었다고 생각합니다. 기부 마케팅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기부금을 1년에 몇백억 원씩 모금하는 민간단체들도 많습니다.


민간 NGO에선 일시 기부금도 중요하지만 사업의 지속성과 안정감을 위해서 정기 기부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보통 '정기후원'이라고 부르고 월 1만 원씩 정기 기부하는 것을 '한 건'이라 칭합니다.

예를 들어, 특정인이 한 달에 1천 원씩 정기 후원하면 0.1건이 되고 매월 10만 원씩 후원하면 10건이 됩니다. 이렇게 하면 통계를 내고 회계 처리하는데 편합니다. 민간기관들끼리 데이터를 비교하는데도 매우 용이하죠.


기부금을 관리하는 법과 제도는 여러 개가 있는데 복잡하니 여기선 다루지 않겠습니다.


통상 민간단체들은 정기후원자를 모집하면서 특정 사업으로 묶어 관리하는데요. 각 기관들의 고유목적사업에 기부되는 금액을 지정기부금이라고 해서 관리합니다. 또한 국내와 해외 등지의 어려운 이웃을 직접 1:1 또는 1:다수로 연결하여 후원하는 것을 '결연'이라고 말합니다.

가끔 민간 사회복지단체들이 결연해달라면서 후원을 요청하는데 기부와 결연은 다른 개념이라고 보셔야 합니다. '결연'은 후원관리시스템이 복잡해서 믿을만한 사회복지기관이나 NGO를 통해서 진행하시는 게 좋습니다.


보통 국내 결연은 1만 원, 해외결연은 3~4만 원에서 출발합니다.

(제가 일하는 곳에선 국내 결연 프로그램이 없고 국내 사업별 후원만 있습니다. 국내 결연은 대다수의 NGO에서도 없어지는 추세입니다.)

국내 결연으로 1명을 정기 후원하면 1건, 해외결연으로 1명을 정기 후원하면 3건(3만 원이 기본일 경우)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후원자 1명이 3명의 해외아동결연을 하면 후원자 명(名) 수는 1명인데 건수는 9건이 되는 셈이지요.


그래서 여러 NGO들이 명수(일명 머릿수라고 부릅니다)와 건수(일명 개발건수라고 부릅니다)를 구분해서 경영지표를 만듭니다.


요기까진 아주 기본적인 내부 용어들인데요. 제 글을 보신 분들은 앞으로 시민사회 활동가들을 만나서 정기 후원자가 몇 명입니까?라고 물어보신 후 연간 개발건수는 몇 건 정도 하냐, 명수와 건수 차이가 얼마 정도냐고 물어보기만 해도 전문가 대접을 받으실 겁니다.^^

가평의 한 카페. 형형색색의 우산들이 고액기부자 리스트처럼 보였습니다.

여러 단체들이 고액기부자 모임을 만들고 있습니다. 돈 많이 벌고 성공해서 기부를 많이 하면 좋지요.

그런데 한꺼번에 고액을 기부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매달 몇만 원씩 오랫동안 기부하여 누적 기부금액이 큰 후원자들도 조금씩 증가하고 있습니다. 큰 부자들만이, 경제적으로 성공했다는 사람들만이 고액기부자 모임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나눔을 실천하고 소액이라도 꾸준히 기부하는 소시민들이 고액기부자 모임에 이름을 올리는 세상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지속적으로 나눔에 참여하는 우리 주변의 소시민들이 더욱 많아지길 소망합니다. 이분들이 성공하고 행복하도록 활동가들이 열심히 응원할 것입니다.


고액기부자 모임에 이름을 올린 것이 성공의 척도로 여겨지는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제 바람은 더 나아가 고액기부자 모임에 참여하는 것이 행복의 척도로 여겨졌으면 좋겠습니다. 죽을 때까지 얼마가 필요할까 연금계획을 세움과 동시에 죽을 때까지 얼마를 기부할 수 있을까라고 계획을 세워보시기 바랍니다.

삶을 바라보는 마음가짐이 달라질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인플레가 심해져서 1만 원, 3만 원을 기본 후원 단위로 하기에는 시민사회단체들도 힘이 듭니다. 후원자분들도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활동가들과 여러 단체들의 고민이 많은 상황입니다.

나눔 문화가 더 성숙해진 사회로 나아가면서 후원자와 민간 시민사회단체들 간 서로에게 바람직한 방향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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