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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쑤니 Oct 02. 2023

그림책 작가 '쑤니' 입니다

2022.소소한 에세이 <뭐가 될 줄 알고> 수록 글

그림책 작가 ‘쑤니’ 입니다      


그림책 계에선 딸이 나보다 선배이다. 딸아이는 어릴 때 스케치북으로 ‘아코디언북’  (일명 병풍책)을 자주 만들었다. 한 권을 만드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으며, 글자 대신 지렁이가 기어 다니기도 했다.

아이들이 어린 시절 가장 신경 쓰고, 바삐 움직였던 일은 도서관에 다니는 일이었다. 내가 살던 동네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공공도서관이 아직 없던 상태였다. 시댁 근처에 있는 한 도서관을 알게 된 후 시댁 갈 때마다 도서관엘 갔고, 도서관 갈 때마다 시댁에 갔다.

그림책이라는 장르를 알기 전에는 책을 한 달에 한 권 읽기도 버거웠다. 껌딱지 같이 붙어 다니는 둘째 덕분에 화장실에서조차 책 읽을 시간이 부족했던 때였다. 그렇지만 그림책은 20권이고, 30권이고 읽을 수가 있었다. 아이들에게 읽어주고 좋았던 부분은 혼자인 시간에 다시 읽으며, 아이들에게 읽어줄 때와는 다르게 즐기기도 하였다. 그림책의 세계는 신비로웠다. 아이들 책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나의 허를 찔렀다.      

그림책에서 시작된 독서는 다른 영역으로 뻗어가는 가교역할을 했다. 책이라는 물성 그 자체를 좋아하게 되었다. 책을 옆에 두기만 해도 나는 매일매일 배우는 사람이 된다. 좋은 책을 만나면 그 책 속 세상도 동경했다. 나의 책 사랑은 과해서 한때는 아이들에게 많은 책을 읽히려 몫돈을 들여 전집을 대량 구매하고, 집의 한쪽 벽면을 책으로 가득 채운 적도 있다. 채운 책과 별개로 도서관에서 대출한도를 꽉꽉 채워가며 빌려왔다. 내가 빌려오는 책에는 어김없이 그림책이 포함되었다. 처음에는 아이들을 위해 빌렸다면 나중에는 나를 위해 더 악착같이 빌려왔다.      

나의 그림책 사랑은 계속되었다. 더 집요하게 그림을 관찰하며 음미하였다.

‘이 책은 내용이 너무 좋아, 이 책 그림은 무엇으로 그린 걸까? 이런 내용 참신한데. 글이랑 그림작가가 다르네. 이 작가의 책은 또 뭐가 있지?’ 멋지게 잘 그린 그림만이 그림책이 되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도 한번 해 볼래!’ 그때부터 마음속에 그림책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언젠가 나도 그림책 한 권 만들어 보고야 말겠어!’     

학부모 명예 사서를 하며 그림책 공부의 기회도 왔고, 도서관에서 열리는 그림책 관련 강의는 누구보다 빠른 클릭으로 참여했다. 그동안 읽은 그림책 내공 덕분에 선행학습이 충분히 된 우수 학생이 되기도 하였다.  


몇 년 동안 동 시간대의 수업 때문에 바빴던 수요일 오전, 드디어 시간이 맞춰졌다. 몇 년 동안 벼르던 <엄마를 위한 그림책 학교> 프로그램에 의심의 여지 없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림책을 만들 기회라니! 무엇보다 이 좋은 수업이 공짜라니! 나한테 안성맞춤인 수업인데 안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림책을 만들고 싶었던 계기라면 아이들과 그림책을 읽으며 그림책 사랑에 빠졌던 시절 막연하게 했던 다짐 때문이었다.     

두 해 동안 두 권의 그림책을 만들었던 그때를 구구절절 되감기 해 보자.     

기대하던 수업에 자신만만하게 참여했지만, 시작 초기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그림책을 읽을 때 ‘이런 책 나도 만들겠다! 발로 그렸나?’ 하며 삐딱하게 본 책이 여럿 있었다. 놀랍게도 정말로 발로 그린 그림도 있었다. 쉬울 거라 생각 한 내 착각이었다. 무슨 내용으로 그림책을 만들지 떠올리는 것조차도 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고는 몇몇 그림책을 얕보았던 스스로를 꾸짖었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 많아서였던 것 같다.

두 번째 수업 날 옆자리의 참가자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모티브로 만들겠다고 말한 것을 컨닝 해서, 일 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정했다. 사실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던 생각이었다. 오랜 시간 같이 살던 할머니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할머니와 함께했던 에피소드를 적고 그린 것이라 나에겐 큰 의미가 있는 작업이기도 했다. 기억나는 장면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리고 글을 수정해갔다. 내 그림의 특징은 자신감이 빠져있는 흐릿함이다. 연필 스케치로만 페이지 수를 채웠다. 처음엔 그림을 적게 그려야겠다 생각했었다. 작업해가면서 그림이 많아야 이해가 쉽겠다는 생각으로 바뀌면서 계획되지 않은 그림을 끼워 넣기도 했다. 약간의 강제성만 있다면 힘들어도 해내는 나인데…제대로 위기가 찾아왔다. 채색을 어떻게, 어떤 재료로 해야 할지 몰라서 막막했다. 이미 해 놓은 연필 스케치만으로라도 책을 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처음이라 모르는 것투성이였으며 서툴렀다. 고민 끝에 쉽게 가기로 결정했다. 피그먼트 라이너로 그림 윤곽을 잡아주며 수채색연필과 수채물감 채색을 했다. 스케치만 있을 때보다 색이 들어가니 훨씬 옛 느낌이 살아나며 따뜻함이 감도는 듯했다. 그림책 한 권 만들겠다고 했던 언젠가의 목표를 생각하며,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완성하는 것에 의의를 둔 첫 책<할머니와의 추억> 이 힘겨운 산고를 겪으며 태어나게 되었다.



코로나 덕분에 나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놓칠 내가 아니다. 첫 번째는 뭘 몰랐기에 어려우면서도 쉬웠다면 두 번째에는 욕심이 과다 충전되었다. 겨우 한 번의 경험치가 있는 것뿐이면서 두 번째에 너무 큰 욕심을 부린 덕분에 위산 분비만 촉진 시켰다. 좋은 메시지가 녹아있는 그림책을 만들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내가 넣겠다고 쓩 들어가는 것도 아닌…자꾸만 늦어지고 초조해졌다.

상상하는 것도 평소 연습이 되지 않은 탓에 어려웠다. 이런 것이 창작의 고통인가? (BTS의 노래‘디오니소스’라도 들으며 논알콜 맥주라도 마셔봐야 하나?) 첫 번째는 책 자체가 목표였지만 두 번째는 스스로 많은 걸 요구하고 있었다. 생각을 깊이 하면 할수록 욕심이 끝을 모르고 치 닫았다. 그럴수록 두 번째 책은 멀어져만 가는 것 같았다. 결국 욕심이란 놈을 억지로 떼어버렸다. 주변에서 찾아보자. 내 이야기를 해 보자. 쉽게 접근해보자. 일상 속 소박한 행복을 찾으며 무채색에서 다채로운 색으로 피어나는 주인공 방글씨, 방글씨로 변신한 나의 이야기 <괜찮아요. 방글씨!> 가 탄생했다.      

이왕 만들어진 책이 두 권 있으니 좀 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5월, 모 출판사 그림책 공모전에 더미북을 만들어 보내보았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출판사에 투고 해 볼 기회가 언제 또 있겠나 싶은 생각에 한 번의 경험치를 쌓은 것뿐이다.


경험이 자신감을 끌어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 한 번이라도 경험해 본다면 무슨 일이 생기기도 전에 무조건 두려워하거나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후에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세 번째, 네 번째 책이 만들어질 때 그리되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자라며 시기에 맞지 않는 그림책은 조카들에게 물려주었다. 그림책에 관심을 가진 날부터는 달라졌다. 전집류는 모두 다 물려 주었지만, 그림책 단행본은 주지 않는다. 한 권 한 권 사서 모은 애정이 묻어나는 책은 나의 창작활동을 위한 자료이기도 하다. 외국 여행을 가면 그 도시 서점에 들러서 그림책을 한 권씩 사 온다. 그림이 마음에 들면 된다. 언어를 몰라도, 글을 읽을 수 없어도, 그림이 내용을 말해줄 수만 있으면 된다. 가족들도 여행 중 서점을 마치 꼭 들러야 하는 코스 중 한 곳으로 생각해 주었다.

이렇게 귀하게 모은 그림책들은 우리 아이들의 아이, 손주가 생기면 읽어주고 싶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책을 물려줄 것이다. 네가 어릴 적 좋아했던 그림책이었노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렇게 나의 자녀들에게서 그들의 자녀에게로 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책이 되면 좋겠다. 그 그림책 속 몇 권은 내가 만든 그림책이었으면 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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