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페이스북 계정을 하나 만들어 여기 글도 공유하고 메시지도 받고 그러는데 며칠전 어느 미국인 남성이 아주 조심스레, "우리 비록 온라인에서 만났지만 친구로서 신의와 우정을 지키자"라는 말을 듣고 대박 부담을 느껴 대강 얼버무리고 만 일이 있다. 더 이상 그 남성이 연락하지 않는걸 보면 그쪽도 내 마음을 간파한듯 싶다.
언제부턴가, 가볍고 일시적인 만남 아닌 책임이 따르고 시종일관 신뢰로 나가야 하는 관계들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물론 처음부터 내가 이랬던건 아니리라...
이런저런 부침속에서, 인간사의 비열함과 혹독함을 겪으며 터득한 내 나름의 처세랄까, 그런것 같다.
마흔 언저리에 뒤늦게 불같은 사랑이란걸 해봤고 그것이 사회규범을 어기는 것이어서 무참히 깨진일이 있다.이후로 그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당시엔 존재했던 (지금은 모르지만) '야후 채팅방'에 들어가 외국인들과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러다,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왔고 이름을 보니 불어식 이름이라 프랑스인인가보다, 하고 반기며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용산 미군기지에있는 프랑스계 미국인 변호사라고 했다. 나는 그말을 믿지 않았고 변호사가 얼마나 바쁜 직업인데 이렇게 놀 시간이 있을까 싶어 영어나 배우자는 마음으로 가볍게 그를 대했다. 그러다 어느날인가 한번 보자고 해서 당시 영등포에 살던 나는 의정부까지 먼길을 전철로 가게 됐고 그를 만났다. 까만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난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래도 외국어를 전공하고 외국, 특히 서구 문물에 익숙하다 자부해온 나였지만 내앞에 서있는 '흑인'을 보자완전 난감해지고 말았다. 그는 눈치를챘는지 조심스러워했다. 그러나 친구사이정도는 어떠랴 싶어 이후로도 그와는 정기적으로 이메일을 주고받고 가끔 전화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보니 내 뜻과는 달리 정이란게 생겨나고 이윽고 연애모드에 빠지게 됐다. 이러다 결혼까지 가는건가, 싶기도 했다. 비록 우리가 만나서 한 일이라고는 고작 손잡고 영화관 가서 흑인들만 나오는 영화를 본게 전부지만,....
그런데 알고보니 그는 지독한 바람둥이였다. 내가 옆에 있는데도 다른 여자들 전화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 히히덕거리고 " I love ya"를 남발하는.
그런 그의 행동에 내가 화를 내거나 불평을 하면 그는 그러거나 말거나 식으로 나왔다. 해서, 결국 난 그 관계에 환멸을 느껴 그와 손절했다. 몇년후, 그는 미국에서 내게 청혼 메시지를 보내왔지만 난 "잘 살아 좋은 사람 만나서"라는 대답만 하고 더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이 얘기를 장황하게 하는이유는 아마도 사랑이란게 연애, 애정모드라는게 아무리 한쪽이 진지하다 해도 다른 한쪽이 유희로 여기면 대체로 그 결과는 파국에 이른다는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서인것 같다. 그리고 그런 유희같은, 장난같은 사랑을 겪고나면, 더이상 사랑을 , 타인을, 인간을 믿지 않게 된다 . 그리고는 급기야 '타인은 지옥'이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나만의 방'에 틀어박히게된다.
from facebook
사람이 칩거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것이다. 배반이나 사기, 실연, 기타...여러가지가 있으리라.
암튼, 그 흑인 변호사와의 연애이후 (그것을 연애라 부를수 있는지나 모르지만) 난 내가 경솔했음을 알았다. 누가 누군지도 잘 모르는 채팅방에서 만난 이에게 희망을 건것도 그렇고 그들이 발화하는 모든것을 진심이라 여기고 응하고 '관계맺음'을 하려 했던 내가 어리석기만 했다.
가볍게살기,의 묘를 터득하지 못했던 때의 이야기다. 이렇게 말하면 꽤나 나이브하고 라이트하게 사는거 같지만 난 여전히 무거운 구석이 있다. 한마디로 구식이다. 그래서 곧잘 상처받고 내게 상처준 이를 단념하지 못해 연연해하고 (그 상대가 이성이든 동성이든) 아파하고 그러다 급기야는 드러눕거나 쓰러지거나 한다. 암튼, 그런 일이 다반사다.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우정과 신의를 바탕으로 한 관계'를 원한 그역시 , 그말이 , 그마음이 사실이라면, 사는 동안 어지간히도 상처받아 온 거 같다. 그가 잠깐 언급한 가족사는 불행했다. 와이프는 병으로 죽고 자식은 교통사고로 죽고...남은 자식 하나는 멀리 살고...
그런데, 내가 보았는가?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어찌 단정하는가,
그런 의문도 들지만 그보다는 이제 '진지하고 책임감있는 관계맺음'이란 문장자체를 ,말 자체를 의심하고 그런 말이 싫다. 인간 누가 과연 상대를 끝까지 책임지는가, 신의로 일관하는가...
내가 다시 그 누군가에게 마음의 문을 여는 날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이승이 아닌 저승에서나 있을법한 일이라는 생각까지 한다. 그정도로 나는 지쳐버렸고 망가졌고 더이상 타인을 믿지 않는다. 핏줄도 미덥지 않다. 생은 어차피 혼자든 둘이 살든 그 이상이 모여산다 한들 본질적으로는 '혼자'라는게 내 생각이다. 아니, 많은이들이 그리 생각할것이다. 문득 페이스북에 떠있던 귀절 하나가 떠오른다.
"세상에서 제일 외로운것은 혼자있다는게 아니라 나쁜 사람들 wrong people에 둘러싸여있는것"이라는 그 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