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엔 거의 작품전체를 외우고 다니다시피 했는데 이젠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내 삶을 뒤흔든 한권의 책,즉 내 젊은날의 바이블을 대라고 한다면 바로 앙드레지드의 <지상의 양식>을 들수 있다. '열병환자는 기다려야 할것을 알면서도 찬물을 단숨에 마셔버린다'...
지드,그 역시 평탄한 삶을 살지는 못한거 같다 . 성정체성에도 문제가 있었고 이책 또한 처음 출간되었을때 거의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야말로 작가 사후에 뒤늦게 부각된 그런 명작이 아닌가 한다.'깊은밤 그대가 잠못들고 헤매일때 난 그대 곁으로 가고싶다'...
지드외에 읽은 작가는 헤르만 헷세였고 그의 소설보다는 시를 좋아해서 '취소'와'단계'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이렇게 지드와 헷세는 내 젊은날의 바이블이었다. 그당시 내 단짝이었던 나보다 한살 위인 a는 <지상의 양식>중에서 공감하거나 멋진 문장들을 필사해 내게 선물로 주기도 했고 난 아직도 그 노트를 갖고있다.
a 와 나는 맥주를 마시면서도 ,시험끝나면 떠나곤했던 강촌행 열차안에서도 <지상의 양식>을 이야기했다. '나에게 집착하지 말고 나를 떠나라..' 지드의 말처럼 우린 작은여행을 함께 하곤 했다.
그런 a와 아직까지 연은 이어지고 있지만 거의 끊어진거나 다름없다. 그역시 서로가 궤를 달리하는 삶을 살다보니 그리 됐을테고 사회적으로 '높은'자리에 오른a가 나같은 그저그런 '평민'을 이퀄하게 대하기가 꺼려질수도 있으리라.
그렇게 믿었건만,이런말은 내 나이가 되면 어리석게 느껴지는데 삶은 다 끼리끼리 ,어울리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유닛을 만들고 그안에서 자기들 나름의 권력을 창출해 그들만의 코드로 살아간다는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andre gide
<지상의 양식>외에 창피한 일이지만 난 지드의 작품을 그렇게 많이 읽지는 않았다. <좁은 문>이야 필독서니 읽었다쳐도 그외엔 한둘, 손에 꼽을 정도다. 하지만 <지상의 양식>으로 나에게 앙드레 지드의 초상화, 최소한 그의 젊은날의 이미지는 확고하게 자리한 셈이다. 기존관념과 편견,심지어 유럽 전체가 옵세스 되어있는 기독교에 대한 저항까지 그의 청춘기는 온통 반항과 저항, 그걸 부추기는 사건들로 가득하다. 그는 이데올로기의 변화도 겪었고 그런가하면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퇴짜 놓은 편집위원이기도 했다. 뒤늦게나마 그 책의 진가를 인정하긴 했지만...
<지상의 양식>에는 다채로운 그의 지적편력이 스며있는데 퀴어, 육감, 본능의 해방, 정신의 자유로움등이 무한대의 공간에서 때로는 충돌하면서도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다시말해 그는 '해방의 작가'라 요약될수 있다. 삶이라는 우리존재의 사슬을 끊어내고 자유롭게 비상하라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동안은 비슷한 삶을 사는 듯 하던 a는 아이를 낳고 남편과 가족에 집중하면서 자연히 나와 멀어졌고 나는 나대로 일을 하면서 또한 잊고 사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니 서로에게 큰 아픔과 상처를 남기고 배반 형식의 이별을 한게 아닌 암묵적 동의하에 서로의 '차이'로 인한 어쩔수 없이 소원해짐을 받아들인 케이스라고 할수 있다.
어쩌다 가끔 a를 만나면 우린 더이상 <지상의 양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서로의 현재가 너무 다르다 보니 이야기 할게 별로 없다. a는 예전에 뜬금없이 전화해서 '꿈에서 니가 나와서 연락해봤어' 라는 말을 자주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나를 꿈에서 보는 일은 없는듯하다. 나는 아직도 가끔 만나는데. 꿈에서, 거리에서 스치는 행인들의 무리에서, 버스 앞자리에 앉은 하얀 목덜미의 여인에게서 a를 본다.
우린 이렇게 헤어지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이미 완료형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매년 내 생일이면 내가 좋아하는 당근케익을 보내준다. 그러면 난 두어달 뒤 a의 생일에 또 선물을 보낸다. 젊은날 앙드레 지드라는 바이블을 공유한 덕을 아직까진 보고 있는 셈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