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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먼저 가세요>

어차피 나의 속도로는 따라잡을수가 없다.

by 박순영

어제 사정이 있어 하루 스킵한 천변왕복을 오늘 하고 왔다. 주말이라 사람반 견공반이었다. 천변 보도가 좌우 1미터 남짓해서 가끔은 심한 정체가 형성되기도 한다.


개를 데리고 나온 산책자들은 자연히 녀석들때문에 뒤로 처지기 마련이고 그러면 뒷사람이 앞지르는걸 종종 볼수 있다. 나도 요즘은 곧잘 앞지르기를 당하는데 내가 하는것보다는 마음이 편하다. 어쩌다 동행이라도 있으면 이야기를 나누느라 자연히 걸음이 느려지고 그러다 보면 '먼저 갈게요'라는 소리가 자주 들린다. 그럼 옆으로 비켜준다.



이렇게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다보면 왕복 40~50분 거리를 완주한다. 마치 마라톤처럼.

분명 3월 하순에 접어들었는데 다 저녁에 나가서 그런지 날을 꽤 쌀쌀했다. 가지고 나간 목도리를 두르느라 잠깐 지체했더니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뒷사람이 어정쩡히 서있는게 아닌가. 해서, "먼저 가세요"하고 오늘도 난 길을 내주었다.



나는 차라리 뒤처지는게 편하다. 아니, 그쪽에 어지간히 적응이 돼있다고나 할까. 솔직히 나는 내가 꼴찌인게 편하다. 내 뒤에 누구라도 있으면 여간 불안한게 아니다. 그 사람이 차라라 앞질렀음 하지만 가끔 상대는 끝까지 내 뒤에서 오는 경우도 있어 그럴땐 산책이 아니라 마치 경보를 하듯 마음이 급해져 우스운 모습이 연출된다.



세상의 속도에 맞춰본 일도 없고 그렇게 하려해도 안됐던 내가 이제 와서 새삼 남의 보폭을 맞추기도 귀찮고 새삼스럽다. 누구나 자기만의 '페이스'가 있고 거기 충실하면 된다. 그러다 설령 꼴찌가 된다 한들, 지나온 길은 오롯이 나만의 추억, 기억, 노력의 여정으로 남지 않는가. 해서, 나는 조금이라도 뒤처질것 같으면 미리 "먼저 가세요"라며 길을 내주는 편이다.



어릴때 학교에서 달리기를 하면 난 늘 뒤에서 1,2등을 했다. 어쩌다 부모님이 참관이라도 하러 온다고 하면 난 겁부터 덜컥 났다. 지금도 그런지 몰라도 그당시에 운동회의 꽃은 단연 100미터 달리기였다. 해서,그런 날은 나는 스타트부터 온힘을 다 해 달린다. 그러다보면 중간에 가서 힘이 빠져 자연히 뒤로 밀리고 결국 꼴찌신세가 된다.




그렇게 집에 온 날은 어김없이 타박을 당했다. 넌 그걸 못달려서...라고. 하지만, 내가 달리기에 영 소질이 없고 취미가 없는걸 어쩌란 말인가. 어릴적 친구들을 만나면 아직도 그 얘길 하면서 나를 놀리곤 한다. 친구란 참으로 이상한 존재여서 상대의 약점을 평생 기억하고 후벼파는 재주가 있다.



아무튼, 나에게 나만의 페이스가 있고 다른이에겐 그만의 페이스, 속도가 있다.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뒷탈이 나고 싸움이 나고 갈등에 휘말린다. 고로, 나는 내가 지쳐있을때는 상대에게 , 먼저 가달라고 부탁을 한다.나는 내버려 두세요....

애초에 세상이라는 레이스에 소질도 취미도 없는 내가 이정도의 속도나마 내고 있는게 신기하고 가끔은 대견하다. 이 정도면 됐다는 생각을 한다.


내일은 일요일이라 천변은 사람과 개가 뒤엉켜 더욱 붐비리라 예상한다. 그럼 난 일찌감치 앞뒤 충분한 거리를 두고 걷기 시작할것이다. 그래도 누군가 내 뒤에서 머뭇거리면 지체없이 길을 내주리라 먼저가라고. 이제 뒤처짐따위가 두려운 때는 이미 지났다. 나는 할일이 많아요. 가뭄으로 바닥이 그대로 드러난 개천이어도 좋다고 노니는 백로, 청둥오리들이랑 얘기좀 하다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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