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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영 Apr 08. 2023

에세이 <시시한 금단>

나보코프,롤리타

 호주작가 로보탐의 스릴러를 읽다가 문득 나보코프의 <롤리>생각이 나서 컴을 켰다. 로보탐의  작품에도 어린 소녀가  자주 등장한다.

나보코프, 하면 자연히 <롤리타>가 떠오를 것이고 그것은 '선정성'내지는 '소아성애'와 연결될것이다.

그래서, 그저그런 야한 작품이겠지,하고 읽지 않은 이가 태반이리라. 나는 영화를 먼저보고 나중에 소설을 본것 같다.



vod로 2000원 내고 영화를 보고나서 원작이 궁금해 영어원서를 샀다가 한두페이지 읽고 항복, 번역본 다시 샀다. 그전에 <어둠속의 웃음소리>를 읽은거 같은데, 유려하고 쉽게쉽게 써내려간게 인상적이었고 작품 전체의 음울한  매력이 돋보였다.그후에 읽은 <롤리타>는  작가의 방대한 예술적, 학문적 지식과  어린 소녀에의 탐닉을 무수한 상징과 은유로 그려 난해하다는 생각마저 들었고,  겨우겨우 읽은 기억이 난다. 그러나 다 읽고나서도 그게 아동포르노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린 <롤리타>를 비롯한 나보코프의 작품을 접한다는 자체를 불경시하는 풍조가 있는듯 하다.



나보코프는 전형적 디아스포라 지식인으로 러시아의 귀족가문에서 최상의교육을 받고 자랐고 이후 역사의 변혁기에 망명, 결국 미국에 정착, 대학교수까지 지낸 지식인이자 예술가였고 나비학자였고   외국어(영어)로  글을   쓴  언어천재이기도  하다.  평생 집을 갖지 않았던것만 봐도 그 무엇에 얽매이는걸 본능적으로 혐한 보헤미안 기질의 인물이었던것 같다. 평생을 인간의 허위의식과 싸운 대표적 지성이자 금기를 허물고 자신의 의지를 대범하게 드러내 세계적 명성과 부를 거머쥔 인물이기도 한것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가 오랫동안 금서로 지정돼 그것을 놓고 재판까지 열렸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그 당시에 내 담당 교수가 친구인 판사한테 이야기했더니 "율리시즈가 뭐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이만큼 우린 '안돼'라고 정해버리면 그것을 의심조차 않고 순응해버리든가  아예  관심조차 갖지않는 경향이   있는것같다. <롤리타><율리시즈>모두 20세기 지성사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는데 우리중 과연 몇이나 그 금단의 벽을 넘었을까, 궁금하다.


 예술이니 문학이니 하는 스펙트럼에서의 '금기'는 대부분이  위정자나 상류계급이 자기들 살기 편하고 쉽게 통제하기 위해 만든 인위적, 엉터리 장치일뿐이다. 그들은 '그것을 안해야 미덕'이라고 끊임없이 주입시킨다.그것을 의심도 않고 그대로 따라간다는건 뇌를 가진 생물체가 할짓은 아니라고 본다. 의심해보기, 왜 그런가, 나만의 사유속에 넣고 솎아보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예술정신의 하나가 저항이라면,   사회가 그어놓은 인위적 금단의 선을 넘어 보다 보편적 인간의 실쳬에 접근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할듯 싶다.

글은 아무나 쓸수 있다. 그러나 정작 사회적 편견에 의해 가려진 어둡고 컴컴한 우리안의 어떤 부분을 응시하고 반추하게 만드는 글은 소수만 쓸수 있다는게 내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 기성체제나 금기에 대한 의심이 전제가 돼야 한다.  세상을 바꾸는건 합리적 의심에서 비롯된다는 얘기다. 그것이 문학이나 예술의 영역이라면 해당 작품을 읽고 감상하는 의무가 예술인과 지식인에게는 있는 것이다. 사회가, 위정자들이 '나쁘다'고 했으니 나도 의심없이 '나쁘다'고 받아들일 거면  무엇하러 힘들여 글을 쓰고 책을 읽고 비평을 하는가.



세상의 편견에 맞서고 위정자들이 그어놓은 금단의 선을 넘었다는 이유만으로 오해와 평가절하의 삶을 살다 간 천재들이 널려있는게 현실이고 그것이 예술사,지성사의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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