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일인칭 단수>리뷰
부끄러운줄 알아요.
표제작 <일인칭단수>는 완만하고 아름답게 흐르던 봄밤의 평화가 "부끄러운줄 알아요"라고 쏘아대는 한 여자에 의해 한순간에 파괴되고 '나'를 낯선 거리로 내몬다는 내용을 다루고있다
무라카미 하루키(1949)는 익히 알려진대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화려하게 등단했다. 이후 소설과 에세이를 번갈아 내는데, 그의 소설이 세련미를 넘어 다소 난해한 구석이 없지 않다면 에세이는 루즈하고 나이브하게 일상의 행복 (소확행)을 주로 그려낸다.
이 작품집 <일인칭단수>는 모두 8개의 이야기로 구성돼있고 작가의 미스터리한 세계관, 가벼운 냉소주의, 감성적이면서 가끔은 SF적으로 전개되는 하루키 월드가 잘 드러나있다. 스쳐가는 삶속에 만나고 헤어지고 기억되고 때로는 틀리게 기억하고 기억조차 못하고 지나치는 인연들, 그들에게 혹시나 내가 했을지도 모르는 서운함이나 악행까지를 나이브하게, 때로는 강렬하게 그려내고 있다.
<돌베개에>는 대학생이던 ’나‘가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던 어느 여자와 밤을 보내고 그녀의 단가집을 품고 지내게 된다는 이야기다.
“소설가가 되고 싶으냐고 그녀가 물었다.
딱히 그럴 생각은 없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당시나는 소설가가 되겠다는 생각 같은건 전혀 하지 않았다. 상상해본적도 없었다...그렇게 대답하자 그녀는 내게 흥미를 잃은 눈치였다”라며 우리 삶속에 찾아드는 조용한 실망과 버려짐을 그리고 있다.
<크림>은 재수생 시절, 피아노 연주회 초대장을 받고 찾아간 곳에서 뜻밖의 풍경과 사건들을 만나는 이야기다.
피아노연주회 초대장을 받고 찾아간 곳은,
“오늘 여기서 피아노 리사이틀 같은 것이 열릴 성싶지 않다는 사실만은 명백했다”라고 표현될만큼 비현실적인곳이었다 . 이런 사유는 '죽음'으로 이르는데,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모든 사람은 언젠가 죽음을 맞습니다. 이세상에 죽지 않는 자는 한사람도 없습니다.또한 사후의 심판을 피할 자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죽은뒤 자신의 죄를 엄히 십판받습니다”
이렇게 기이한 곳에서 죽음을 생각하다 문득 자신이 '기만당하고'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문득 그녀에게 속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부터랄것없이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아니, 직관했다고 해야 할까...그녀에게 미움을 살만한 짓을 한 기억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남의 마음을 짓밟거나, 자존심에 상처를 내거나 불쾌감을 안겨주거나 한다"
상대의 악의가 그에 선행한 '나'의 잘못에 기인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찰리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는 찰리파커가 요절하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하게 전개되는 이야기로
'나'는 죽은 그의 꿈을 꾼다.
”버드는 어딘가의 틈새에서 흘러들어오는 기다란 빛속에 혼자 서 있었다... 나는 버드에게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한눈을 팔면 그가 사라져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러면서 여기서도 ‘죽음’은 강박적으로 되풀이 된다.
”물론 죽음은 언제나 예고없이 찾아오지,,
버드가 말했다.
하지만 동시에 지극히 완만한 것이기도 해. 자네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름다운 프레이즈와 마찬가지야. 순식간에 지나가는 동시에, 한없이 잡아 늘일수도 있지...나는 하루하루 살면서 죽어있었는지도 몰라. “
<위드 더 비틀스 With the Beatles>는 비틀즈 열기가 한창이던 시절 ’나‘가 겪은 첫사랑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무라카미 하루키 (1949-)도입부,스러져가는 젊음을 바라보는 노작가의 시선이 따스하게 그려진다.
”나이 먹으면서 기묘하게 느끼는게 있다면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보다 놀라운 것은 나와 동년배였던 사람들이 이제 완전히 노인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꿈이 사라지는 것을 청춘의 소멸로 보고 있다.
”꿈이 죽는다는 것은 실제 생명이 소멸하는 것보다 슬픈 일인지도 모른다."
이 생각은 ‘기억'으로 이어지는데,
”이상한 질문인데, 혹시 기억이 끊긴 적 있어?
기억이 끊겨요?
응, 그러니까 어느 시점부터 그다음 어느 시점까지, 자기가 어디서 뭘 했는지 전혀 기억 못하는 그런거...사실은, 나는 기억이 통째로 날아가버린 경험이 몇 번 있거든."
그러한'그녀’의 오빠로부터 그녀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죽다니 왜요?...
자살했어...그리고 유서같은 겄도 전혀 남기지 않았어“
존재는 언젠가는 꿈을 잃고 소멸에 이르게 됨을 '나'는 이렇게 받아들이는것이다.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에선 성적이나 재정상태도 좋지않은 구단을 숙명적으로 응원하는 ’나‘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1968년부터 1977년까지 십년동안, 나는 실로 방대한 거의 천문학적 횟수의 ‘지는 경기’를 지켜보왔다. ..그렇다 .인생은 이기는 때보다 지는 때가 더 많다. 그리고 인생의 진정한 지혜는 ‘어떻게 상대를 이기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잘 지는가’하는데서 나온다“
사이가 안좋았던 선친과 잠시나마 다시 이어준것이 바로 야구였음을 기억한다.
”야, 잘됐다. 아버지가 내게 말했다....그러고보니 내가 서른살에 소설가로 데뷔했을 때도 아버지는 거의 똑같은 말을 했다. "
그러면서 생은 이기고 지는것의 단순한 문제가 아닌 흐르는 시간의 문제라고 말하는데,
”물론 지는것보다야 이기는 쪽이 훨씬 좋다.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경기의 승패에 따라 시간의 가치나 무게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시간은 어디까지나 똑같은 시간이다....시간과 잘 타협해서, 최대한 멋진 기억을 뒤에 남기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사육제(Carnaval)>는 ’나‘처럼 슈만의 <사육제>를 좋아하는 한여자와 나눈 기묘한 우정, 그녀의 숨겨진 이야기가 펼쳐진다.
“F*를 보고 내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생각은 당연히, 정말 못생겼다는 것이었다...그녀의 강한 개성은 바로 그 평범하지 않은 외모가 있기에 비로소 효력을 발휘하는 것... 요컨대 F*가 풍기는 추한 외모의 크나큰 격차가 독자적인 다이너미즘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 힘을 의식하고 조정하고 행사할줄 알았다..."
그런데 세상은 가끔은 이러한 ‘익센트릭함’이 통하기도 한다는것을 슈만을 빌어 이야기한다.
“소나타 같은 고전적인 형색을 원래부터 선호하지 않았던 슈만은 이따금 종잡을 수 없을만큼 몽상적인 작품을 써냈다...많은 동시대인의 눈에는 확실한 기초와 내용이 결여된, 익센트릭한 작품으로밖에 비치치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그 대담할 정도의 익센트리시티가 낭만파 음악을 전진시키는 강력한 추진력이 되었지만”.
존재의 익센트릭함은 가면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
“우린 누구나 많건 적건 가면을 쓰고 살아가. 가면을 전혀 쓰지않고 이 치열한 세상을 살아가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니까. 악령의 가면밑에는 천사의 민낯이 있고, 천사의 가면 밑에는 악령의 민낯이 있어...
가면을 쓰고 있는 사이 얼굴에 들러붙어서 뗄수 없어진 사람도 있을수 있겠네...
그래, 그런사람도 있을수 있지..하지만 설령 가면이 얼굴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해도, 그 아래 또다른 민낯이 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아."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에서는 여행중 만난 기묘한 원숭이와의 몽환적만남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온천마을 료칸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 원숭이를 만나게 된다.
“원숭이가 유리문을 드르륵 밀고 들어온 것은, 내가 탕에 세 번째로 들어가 있을때였다. 원숭이는 낮은 목소리로 ‘실례합니다’라고 말하면서 들어왔다. 상대가 원숭이임을 알아차릴때까지 조금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그 원숭이의 삶이라는게 인간의 그것과 별반 다를바가 없다.
“의지가지없이 혼자 어떻게든 식량을 확보해서 살아나가야했습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제일 괴로운건 누구와도 소통할수 없다는 점입니다. 원숭이와도, 사람과도 얘기할수 없어요. 고독하다는건 정말 슬픈 일입니다”
그런데 그 원숭이는 동료 원숭이가 아닌 인간여자에게 끌리는 습성을 갖고 있고 그로 인한 성욕은 당연히 해소할 방법이 없다. 해서 그 원숭이만의 비법이 있는데,
“.. 언제부턴가 저는 좋아하는 여자의 이름을 훔치게 되었습니다...주로 염력을 사용합니다. ...그사람의 이름이 적힌, 물질적인 형태가 필요합니다. 신분증이 가장 이상적이지요. 운전 면허증이나 학생증, 보험증, 여권등, 아니면 이름표같은것도 괜찮고요...보통은 훔칩니다...그것에 적힌 이름을 오랫동안 응시하면서, 정신을 오로지 한 점에 집중하고,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고스란히 거둬들입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정신적 육체적 소모도 크지만 ...그녀의 일부는 저의 일부가 됩니다. "
그러면서 사랑은 곧 고독임을 실토한다.
"네 , 그것은 어찌보면 궁극의 연애일지도모릅니다. 하지만 동시에 궁극의 고독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사랑은 그 기억만으로도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임을 인정한다.
” 설령 사랑이 사라져도,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해도,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다, 연모했다는 기억은 변함없이 간직할수 있습니다“
이렇듯 기묘한 원숭이를 만난 뒤 '나'는 녀석에게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린 미모의 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
"죄송합니다.갑자기 제이름을 잊어버렸지 뭐예요. 부끄럽게도.
그럴때가 가끔 있어요?
네 요즘 들어 가끔 그래요. 제 이름이 생각 안 나는 거예요. 블랙 아웃된것처럼... 그 무렵 운전면허증을 잃어버렸어요. 점심시간에 공원 벤치에서 쉬면서 바로 옆에 핸드백을 놔뒀거든요“
그렇다면 그 기묘한 원숭이는 '나'의 상상속에 실재했다는 이야기가 될까?
무라카미 하루키 <일인칭 단수>문학동네, 2020
표제작인 <일인칭 단수>는 바에서 낯선여자에게 자신은 기억도 못하는 ’과거‘일로 인해 비난받는 이야기다.
기분좋은 봄날 저녁,‘나’는 아내가 집을 비운 사이 한껏 차려입고 거리로 나온다.
”기분좋은 봄날저녁이었다...한동안 정처없이 거리를 걷다가, 바에 들어가 칵테일이나 마시기로 했다....“
그런데 어느 여자가 불쑥 '나'의 평온을 깨트린다.
”그러고 있으면 , 재밌나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여전히 감도 잡히지 않았지만, 적잖은 악의 혹은 적대감이 담겨있다는 것만은 감지할수 있었다....
그런게 멋있다고 생각해요? 도회적이고, 지적이라고 생각하느냐고요?“
해서 ”나‘는 그녀에게 자기를 아느냐고 묻는다.
“실례지만 제가 아는 분이시던가요? ...혹시 저를 다른 사람과 착각한게 아닐까요?”
그러자 ’그녀‘가 대답한다.
“난 아마 당신이 아는 분은 아닐거예요...직접은..딱한번 어디서 뵌적은 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친밀하게 얘기를 나눈건 아니니까..그래도 난 당신 친구의 친구예요...당신과 친한 그 친구는, 아니, 한때는친했던 친구는 지금 당신을 무척 불쾌하게 생각하고, 나도 그여자와 마찬가지로 당신을 불쾌하게 생각해요. ..잘 생각해봐요. 삼년전, 어느 물가에서 있었던 일을. 거기서 자신이 얼마나 지독한 짓을, 고약한 짓을 했는지. 부끄러운줄 알아요”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바를 나와 낯설어진 거리를 마주한다.
“계절은 더 이상 봄이 아니었다. 하늘의 달도 사라졌다. 그곳은 더 이상 내가 알던 원래의 거리가 아니었다. 가로수도 낯설었다...”
이렇게 8개의 이야기는 딱히 하나의 큰 서사로 귀결되는건 아니지만 하루키 특유의 나이브하며 독특한 세계관, 그리고 은폐된 기억과 무의식, 초현실의 세계 등을 나이브하고 루즈하게 때로는 강렬하게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