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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보 Jun 10. 2022

1. 울다가 웃으면 안 된다던데

인생은 소풍 가듯이

 


 연일 오던 비가 조금 잦아든 듯하다. 하늘에는 먹먹하게 희뿌연 구름만 조금 끼었다. 날이 개려는 것이 쪼깐이가 이제 정말 다른 차원으로 간 것 같아 서운할 지경이다.


 우리가 쪼깐이를 보내기 위해 장례식장으로 가던 그날은 6월 초 답지 않게 무덥고 건조하던 날씨를 차게 식혀준 반가운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아침부터 전화가 울렸다. 쪼깐이는 조직검사를 위한 개복 수술과 CT촬영을 마치고 입원 중이었고 갑작스레 병원에서 오는 전화는 늘 그렇듯 전혀 달갑지가 않은 것이었다. 불길한 전화벨은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수술 후 잘 회복하는 듯했던 쪼깐이가 저혈압으로 집중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병원으로 뛰어가고 싶었지만 그날은 아기의 눈 때문에 안과에 가야만 했다. 전날부터 부어있던 아기의 눈이 뻘겋게 충혈돼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또다시 아기와 고양이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다. 남편이 식당 오너로 주말에는 절대로 자리를 비울 수 없는 터였다.


 "아이 안과 먼저 갔다가 끝나는 대로 바로 갈게요"


 나는 택시를 불러 안과로 달렸다. 아뿔싸. 주말 아침 안과에 사람이 이리도 많았던가. 10명이 넘는 대기에 아기와 함께 있음에도 초조함을 감출 수 없었다. 대기하는 동안에도 동물병원에서는 연달아 전화가 왔고 다음, 그다음 전화에서 쪼깐이의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다. 이러다 정말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는 어쩌나.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빨리 좀 와달라고 빌었다. 남편이 오기만 하면 나는 쪼깐이에 달려가리라. 남편은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가게 오픈 시간을 단 몇십여분 남겨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사고가 마비될 것만 같았다.


 마침내 최후통첩이 날아왔다. 쪼깐이의 심장이 멈춰 기계로 연명하고 있으니 빨리 오시라는 전화와 함께 아기의 눈 진찰도 끝났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 같은 무기력에 짓눌렸다. 아이 아빠는 상기된 얼굴을 하고 허겁지겁 우리에게 왔다. 우리 가족은 마침내 다 같이 쪼깐이에게 갈 수 있었지만 그 아이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다시 만난 쪼깐이의 몸은 얼음을 댄 듯 차가웠다. 복부초음파 촬영과 수술을 위해 면도된 배는 꺼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고, 눈은 전원이 내려간 모니터처럼 빛을 잃어 있었다. 쪼깐이는 날 보고 싶었을까? 다시 집에 가고 싶었을까? 왜 오지 않는 건지 원망했을까? 차가워져 가는 몸을 온기로 안아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담당 수의사에게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수없었다.


"너무 늦게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


 지금 생각하니 누구를 향한 사과였는지도 잘 모르겠다.



전북 임실군 오수면 펫 추모공원


 우리 가족은 예정에 없던 여행을 떠나게 됐다. 목적지는 앞서 말했듯 전북 임실면에 있는 펫 추모공원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한 시간 반 가량 떨어진 곳이었다. 언젠가 고양이들이 별이 되면 가리라 생각했던 곳이다.

 이런 시설이 대개 그렇듯 동물 장묘시설 또한 기피시설로 치부되어 전국에 60개가 채 안된다고 한다. 갈수록 커져가는 반려동물 사업의 규모에 비해 턱없이 작고 초라한 숫자가 아닐 수없다. 태어난 것에는 필히 마지막이 있는 것인데 반짝이고 어린 반려동물을 만나며 우리는 그 아이의 죽음까지도 책임지게 될 것이란 걸 생각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마지막을 하지 않는 반려동물들은 동물병원에서 폐기물과 함께 분류되거나 불법적인 화장을 하기도 하는데 이 과정에서 승인받지 못한 화장터들의 비상식적 화장 방법으로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단체 화장을 한다던가 하는) 많은 반려인들에게 충격을 준 사건이 언론에 오르기도 했었다. 그러므로 반드시 정부 승인된 화장터를 골라야 한다.

 

쪼깐이, 나, 아빠 그리고 아기가 출발하는 모습



 아기는 갑작스러운 여행에 들뜨기까지 한 모양이다. 자신의 노란색 미니 캐리어를 끌고 가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그래, 여행이 뭐 별거냐 집 떠나 멀리 가면 여행이지. 가게도 뒷전으로 미루고 서둘러 짐과 간단히 먹을 것을 챙겨 떠났다.


 아기는 차가 출발하자마자 이내 잠들고 남편과 나의 대화마저 잦아들자 차 천장을 때리는 비 소리만이 시끄럽게 울렸다.


그러자 갑자기 슬픔이 몰아쳤다.


 쪼깐이와 관련된 모든 것이 지나가며 나를 서럽게 울렸다. 쪼깐이라고 이름 붙여서 조금만 살다 간 것 일까. (쪼깐하다=작다란 의미의 사투리임) 어젯밤 쪼깐이를 위해 주문한 처방 영양식, 낮은 캣타워도 아직 배송 중이었다. 그거라도 써보고 가지 뭘 그리 서둘러 갔어.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은 죽음의 순간 병원에 홀로 내버려 둔 것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고양이의 특성상 집과 침대는 그 아이의 모든 것이었을 텐데 차갑고 낯선 곳에서 자신에게 닥친 죽음이 얼마나 두려웠을까. 비는 계속해서 내 머리 위를 때렸다. 남편은 말없이 앞을 응시하며 차를 달리고 있었고 앙 다문 입술은 말이라도 걸면 눈물이 곧 넘쳐흐를 듯했다. 나는 운전석 뒤에서 그의 어깨를 두 번 두드려줬다. 같이 가줘서 고마워. 남편은 "내가 꼭 데려가고 싶어"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바로 달려오길 잠시라도 망설였던 참회의 눈물이었다. 최선을 다했어, 괜찮아..


 슬픔을 느낄 새도 잠시. 도착과 함께 아기가 잠에서 깼다. 검은 양복을 입은 직원들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아기는 소풍이라도 온 듯 달뜬 발걸음. 모든 이에게 인사를 하는 아기의 모습에 직원들의 엄숙한 표정에 잠시 미소가 띄었다. 아기는 또 모든 것이 궁금해져 버렸다. 추모실에 눕혀진 쪼깐이는 왜 누워있는지 궁금하고, 여기는 왜 어둡고, 왜 사람들이 자신에게 과자를 주는지, 왜 조용히 해야 하는지 물었다.

 

 "쪼깐이 잘 자!"


 아기는 미동도 없는 고양이가 자는 줄만 아는가 보다. 연신 잘 자라며 발을 토닥여 준다.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아기에게 설명했다.


"쪼깐이는 아주 많이 아파서.. 멀리 떠나려고 여기 온 거야"


 아기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왜? 하고 물었다. 그리고는 대답을 다 하기도 전에 쉬가 마렵다며 나를 재촉했다.


 "쪼깐아 쉬야 가따오께!"


재촉하는 와중에도 쪼깐이와 인사를 잊지 않고 간다.

아기처럼 담담하게 잘 자! 하고 인사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기가 아빠와 화장실 간 사이 누워 있는 쪼깐이를 바라봤다. 쪼깐아! 부르면 금방이라도 고개를 돌려 이쪽을 쳐다볼 것 같은 환상이 보인다. 부드러운 털이 덮인 배는 마치 잠을 자며 숨을 쉬듯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처럼 보인다. 눈물을 훔치고 있는데 장례지도사가 쪼깐이의 장례절차에 대해 설명해준다.


  1. 화장을 한 뒤 집으로 같이 갈 것인지 추모실에 안치할 것인지

 2. 화장한 유골을 자연으로 보내 묻어 줄 것인지 보관할 것인지

 3. 유골을 스톤 제작 방법으로 변경할 것인지


 막상 그 자리에서 결정하려 하니 나중에 후회할 것이 염려스러워 쉽게 정하지 못했다. 나는 화장 후 자연으로 보내 묻어주는 것으로 결정하고 마지막 인사를 하러 갔다. 다시 만나자. 우리 아프지 않는 곳에서 다시 만나자.

 아빠도 엄마도 울자 아기는 어쩔 줄 몰라 상기된 얼굴로 "아빠 , 왜?" 하고 물었다. 아빠랑 엄마는 아주 많이 슬픈 거야. 쪼깐이가 멀리멀리 간다고 해서 너무 슬펐어. 보고 싶을 것 같아서 눈물이 난 거야. 우리 부부는 손을 잡고 아기를 안아주었다.

 그리곤 쪼깐이가 화장터에 들어갔다. 갑자기 눈물도 멈추고 슬펐던 감정이 정리된 듯 진정되었다. 아기는 쪼깐이가  어디 가냐고 물었다. 나는 추모실 모니터에 나오는 애니메이션을 가리켜 설명해주며 고양이는 무지개다리를 건너 달님한테 갈 거라고 해주었다. 아기는 기쁜 듯 "달님"이라고 말했다.

 삼십 분의 시간이 지나면 쪼깐이는 작은 함에 담겨 올 것이다. 그때까지 아기와 남편과 나는 소풍을 했다. 달리기 시합도 하고, 그림 그리기도 하고 간식도 먹으면서. 어느새 자라 달리기를 잘하는 아기가 대견하고, 그림 그리며 조잘대는 모습이 귀여워 웃게 되었다. 슬픔과 행복함이 공존하는 이 아이러니에 내가 지금 행복해도 되는 것인가? 하고 죄책감이 스쳤다. 우리가 지금 당장 행복을 느끼는 것에 미안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왠지 쪼깐이도 그런 것을 바라지 않을 거라 생각되었다. 삶에 있어 양면성은 어디에서나 있다. 빛이 시시때때로 변해 그림자 진 곳과 밝은 곳이 변해 가는 것 처럼 오늘의 그림자는 내일의 기쁨이 되고 오늘의 빛은 내일의 슬픔이 되어 오기도 한다.

 초록 빛깔 예쁜 보에 쪼깐이가 담겨왔다. 쪼깐아, 이제 집에 가자!





건강했던 쪼깐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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