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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한 밥밥 Oct 07. 2024

내가 ADHD라니…? 이게 다 ADHD 덕분일 수도?

내가 알코올 중독 가족이라 무기력한 줄 알았어.

어릴 적 조용한 아이였다. 불평불만이 많았지만, 그걸 내색하지 못했다. 시장에 가면 어른들이 “어쩜 너는 뭐 하나 사달라고 떼를 안 써?”라며 신기해했다. 동네 친구들과 매일같이 뛰어놀다가 집에 들어오면 무표정하게 가만히 있는 아이. 흙투성이가 되도록 밖에서는 활발하게 놀았지만, 집에서는 말을 아끼는 조용한 어린아이였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새어머니와 매일같이 싸우며 아이들을 그냥 뒀다. 이런 환경 속에서 어린아이가 자신의 기질을 마음껏 드러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내가 시끄럽진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내가 ADHD라니?


최근 ADHD 자가 진단 테스트가 내 알고리즘을 지배하길래 해봤는데, 해당되는 항목이 너무 많았다. 설마설마했지만, 진짜 ADHD일 줄이야. 평소 책임감 있고 꼼꼼하다는 평가를 들으며 살아왔던 내가 ADHD라니? 그동안 이 이미지가 오히려 진짜 나를 발견하는 데 방해가 되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매월 보고서를 진행할 때 오타를 냈고, 하기 싫은 업무는 늘 한 시간 전에 몰아서 처리했다. 실수가 싫어서 업무를 자동화하고, 실수를 줄인 덕에 또 칭찬받았다. 그러면서도 완성도 높은 업무를 핑계로 다른 일을 미루며 그럴싸하게 변명했다. 그때는 이런 내가 오히려 합리적이라 생각했다. 친구들과의 약속에서 지각하는 건 기본이었고,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을 정리하느라 바빴다. 머릿속으로 수없이 시뮬레이션을 돌리다 보니 실제로 실행에 옮길 때는 무슨 일이든 빠르게 처리할 수 있었고, 덕분에 내 야무진 이미지는 유지되었다.


늘 시간 관리를 못 했다. 성격인 줄 알았다.  아침에 일어나야 하는 걸 알면서도 침대에서 나오지 못했지만, 동생과 2살 터울이라 덕분에 학교에 큰 문제없이 다닐 수 있었다. 그러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등교 시간이 달라졌고, 혼자 학교를 가야 하니 몇 번 지각을 했다. 수시를 준비하고 있던 나에게 큰 문제였지만 이 때도 다행히 해결되었다. 성적이 좋았어서 선생님의 추천으로 기숙사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이 지긋지긋한 집에서 벗어나 성공하겠다는 일념으로 입시에 미쳐 있었고, 장학생으로 운 좋게 해결됐다. 나는 아빠를 구하려고 공부에 몰두했다고 생각했지만, 10년이 지나고 나니 그게 아니라 ADHD 덕분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ADHD의 특유의 몰입력과 집중력이 나를 구해준 것이다. 하고 싶다면 브레이크 없이 달리는 ADHD의 폭주기관차 같은 집중력이 날 구원했다.


늘 피곤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실수를 줄이기 위해 본능적으로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았던 것 같다. 이렇게 뻣뻣하게 살아도 기본적인 것들이 나의 발목을 잡았었는데, 단순히 의지가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주의력 결핍과 과잉행동 증상이었다니, 왜 오히려 안도감이 드는 걸까. 그동안 아빠의 알코올 중독 문제만을 탓하면서 살았는데, 그게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삶에 끼친 영향을 너무 과장해 왔던 건 아닐까? 


오늘 처음으로 ADHD 약인 콘서타 18mg을 복용했다. 약을 먹고 나니 그동안 생각의 양이 체감상 1/3로 줄었다. 어제는 밥 먹고 언제 치우고, 커피는 언제 사 오고, 집 청소는 언제 하지 고민을 하며 눈물이 날 뻔했다. 오늘은 그런 생각들이 사라졌다. 그냥 밥을 먹고 치우고, 독서까지 스무스하게 이어졌다. 밥을 먹고 치우는 단순한 행동조차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는 것. 이건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약 하루 먹은 걸로 오버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느껴진다.


ADHD 진단을 받고 충격을 받았지만, 오랜 시간 이해되지 않았던 나의 행동들을 설명할 수 있어서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이 진단이 내가 단순히 게으른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가 되어준 것 같다. 물론 게으른 사람보다 뇌에 기능적 문제가 있다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나는 그동안 아빠의 알코올 중독 문제로 나의 모든 문제를 무리하게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나 자신을 스스로 이해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나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다행이다. 이제 나는 알겠다. 이건 알코올 중독자 아빠 탓이 아니야.


PS. 닥프 오진승 선생님 감사합니다 :)


사진: UnsplashKinga Ho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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