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은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이별의 순간이 아니다. 화장터 예약을 해야만 장례를 진행할 수 있고, 그 일정에 맞춰 모든 절차가 돌아간다. 즉,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의 계획이 먼저라는 것이다. 어쩌면 장례식은 죽은 사람을 위한 것 같지만, 사실 산 사람들이 치르는 의식일지도 모른다. 아빠가 돌아가신 날, 장례식장 직원은 나에게 3일째 되는 날이 화장터 예약으로 꽉 차 있다며 4일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4일장”이라는 단어가 생소하게 들렸지만, 곧바로 ‘그럼 어쩔 수 없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최대한 빠른 거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모든 것이 처음이었고, 그 첫날밤에는 그렇게 고모네 집에서 이불을 잘 깔고 적당히 못 자고 나왔다.
장례식 첫날, 절친한 친구 몇 명에게 부고를 알렸다. 그런데 와달라고 연락만 했지, 정작 어디로 와야 하는지조차 설명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친구는 무작정 달려왔고, 막상 얼굴을 마주하고 나서야 내가 친구에게 부고장조차 보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부고장을 받고 그제야 친구는 나 대신 다른 동창들에게 아빠의 소식을 알릴 수 있었다. 친구도 절친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처음이기에, 나와 함께 횡설수설해 주었다. 능숙하진 못해도 다정하게 내 곁을 지켜준 친구가 고마웠다. 결혼이나 승진, 출산 같은 평범한 소식이 아니라 아빠의 알코올 중독, 가난과 같은 고민을 토로하는 나를 이해해 주는 친구에게 줄곧 따뜻한 위안을 얻었다.
장례식은 이미 수천 번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해 본 일이었다. 제발 실현되지 않았으면 바랐다. 아빠의 죽음조차 나의 초라함을 까발리는 계기가 될까 두려웠다. 아빠가 알코올 중독으로 시간을 보내면서, 나 역시 응당 착하지 않기로 다짐해서 죄책감을 덜었다. 피차일반이라고, 서로 도긴개긴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편엔 미안함과 불안함을 섞었다. 아빠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은 철저하게 성공했다. 사람들에게 나의 가난함을 공개하지 않고도 대학을 나왔고, 회사에 들어갔으며, 친구도 만들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하지 않는 편이 관계를 지속하는 방법이 되었다.
애써 만들어낸 내 사회가 아빠의 장례식으로 무너질 거라 강력히 믿었다. 친척들과 아빠의 죽음에 대해 누가 더 책임이 있는지 큰소리로 싸우고, 장례식장 비용 때문에 빚을 지는 상황을 상상했다. 아빠의 장례식은 내 지인들이 격 떨어지는 날 보며 모두 수군대는 날이었다. 내가 끔찍한 악몽을 꾸며 눈물 흘린 날들이 참으로 미련했다. 오랜만에 얼굴을 본 고향 친구들, 손절을 맹세했던 대학동기들, 매번 일적으로 피로하게 마주하는 직장 동료들까지.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음식을 두 배로 주문해야 했다.
아빠가 마지막으로 입을 수의, 아빠 사진 옆에 놓일 꽃, 제사를 몇 번 지낼지까지, 모든 것이 돈이긴 했다. 싸게 잡아도 천만 원이 넘는 장례식. 이럴까봐 장례 복지가 있는 꼭 대기업에 가고 싶었다. 난 작은 스타트업에 다녔지만 부조금으로 장례 비용은 충당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내가 아빠의 마지막을 너무 초라하게 장식을 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꽃 같은 건 잘 보지 않아 다행이었다.
장례식이 어른들 눈에는 대견했는지, 잘 컸다는 얘기를 참 많이 들었다. 그 와중에 못된 나는 아빠가 잘못산 거지, 내가 잘 큰 게 아니라는 말을 눌러 담았다. 아직도 철없는 나지만 이번 기회로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을 싫어했었던 시절을 후회한다. 그토록 단절하고 싶었던 이 사람들이 나에게 마음을 써주었다. 나는 빚을 지고 있음을 느꼈다. 단순한 금전적 빚이 아니라, 앞으로 나가갈 빚이었다. 나는 이제 내가 사랑하는 이 사람들의 경조사 자리에 평생 다니며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아빠는 떠나가며 사람들과 나를 이어놓고 갔다. 빚지고는 못하는 나를 알고 있었나 보다. 부자는 빚을 잘 활용한다는데, 나도 앞으로 잘살기 위해 이리 빚을 지게 된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