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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한 밥밥 Oct 17. 2024

불쌍해 보이는 상주가 되기 싫어서


장례식 이틀째에 손님들을 맞이하기 전에 고모는 “절대 씻으면 안돼. 머리도 감으면 안돼”라고 힘주어 말했다.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자마자 내 귀에 들어온 그날 선듯한 말이 나를 찔렀다. 상황 설명 없이 나에게 던져진 이 말이 짜증 났다. 내가 머리를 감는다고 해서 아빠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며, 이 장례식이 진행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내 머리는 그만큼 영향력이 없다. 게다가 내 넓고 못생긴 이마를 가려주는 내 평생의 반려 앞머리가 시간을 이기지 못하고 떡지는 것은 참을 수 없다. 나에게 앞머리가 생겼기 때문에 그나마 사회생활이 시작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빠의 장례식에는 내 인생 걸쳐진 지인들이 다 오는데,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용납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난 싫다는 말을 하는 것보단 대충 대답하는 것을 선택했다. 고모와는 이미 싸워서 수년 연락두절한 적이 있기에 이러한 태도가 현명한 방법이다. 그 싸움의 시작과 끝은 아빠였다. 아빠의 회생방안, 희생 요구와 거절, 답이 없음, 과음의 재발, 책임 소재 가리기 등의 문제들은 자주 가족들을 분열시켰다. 고모뿐만 아니라 모든 친척들과의 나는 분쟁했고, 저항했으며, 결국엔 연락을 기피했다. 그래서 이 자리에 죄책감 없는 자가 없을 테지만, 살아생전 제대로 효도하지 못한 내가 최고의 죄인임을 선고하는 표시로 내가 상주라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 같았다. 그에 따라 나는 순종적인 척할 뿐이었다. “아 네네..” 효도 못함은 내 능력 부족뿐만 아니라 아빠의 술냄새도 거들었기 때문에 그나마 죄책감 한 장을 내 맘대로 덜어냈다. 상주는 슬퍼야 하니 부족한 죄를 다시 채워본다. 하루 더 온다는 절친한 친구에게 여행용 샴푸와 린스를 사 와 달라고 부탁했다.


“고모가 씻지 말래, 싫어. 부탁해도 될까?”


나의 연락에 친구는 동조도, 의견도 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할 뿐이었다. 어른들의 눈을 피해 이른 시간에 다시 찾아준 친구에게서 약속한 물품을 건네받았다. 묵묵히 죄인을 거들어준 친구에게 고마울 뿐이다. 그리곤 재빠르게 방으로 들어가 앞머리만 감았다. 머리 전체를 감기에는 샴푸 냄새가 폴폴 날 것 같았다. 그건 머리를 감지 않은 것보다 더 최악인 상황을 만들 수 있기에 타협을 봤다. 이미 경황이 없어서 동거인에게 가져오라고 말한 내 짐 속에는 여행용 고데기도 있었다. 앞머리는 나에게 그만큼 소중하다. 어쩌면 내 세대의 여성들은 앞머리만 감는 행위에 대해 너그럽게 여길 수 있다. 앞머리만 감는 행위에 대해 무지한 자도 있을 것이고, 더럽다고 비난하는 자도 있다. 하지만 이 행위는 다급한 상황에 머리를 감지 않음을 숨기는 뻔뻔한 표정을 만들어준다. 늦잠 자고 멀끔한 모습으로 등교할 때 “사실 앞머리만 감았어”라며 비밀을 만들어내는 치트키인 셈이다.


앞머리도 감고, 고데기도 하고, 선크림도 발랐으며, 입술에 맑은 색의 틴트도 말랐다. 이 역시 티 나지 않게 소량만 펴서 립밤과 함께 발랐다. 나는 입술에 색이 너무 없어서 종종 쌩얼로 다닐 때면 어디 아프냐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오늘은 그런 오해를 차단하고 싶었기에 고모가 하지 말라는 것은 다 하고, 너무 티 나지 않게 깔끔한 모습을 유지했다. 거울을 봐도 상주다운 면모를 유지하지만 꾀죄죄하지도 않았다. 이것이 손님을 맞이하기에 적합한 모습이라 생각했다.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모두에게 티 안 나게 사회적 행위를 할 수 있는 행색이다. 동생에게도 필요하면 앞머리만 감으라고 그 샴푸와 린스를 사용하라고 했다. 안 그래도 엄마도 없이 아빠의 장례식을 치르는 젊은 여자 애들이 불쌍해 보일 테니, 덜 그래 보이는 방법을 선택하자고 했다. 강요는 하지 않았으나 설득이 됐던지 동생은 조금 지나 미션을 완수하고 나온 모습이었다.


우리는 손님을 맞았다. 잠을 자진 않았지만 피곤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몇 없는 사진 중에 겨우 고른 영정사진 속 아빠가 남인 것 같아서 싫었고, 지하실에 있는 장례식장이 아빠의 사회적 위치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 누가 봐도 불쌍한 장례식에서 그러지 않아 보이려고 했다. 아빠는 돈이 없었으면서, 우리가 가난해 보이는 모습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동네 친구였던 언니의 할머니가 측은지심에 작아져버린 옷을 내가 받아 왔을 때도 아빠는 나를 혼냈다. 그 언니는 외동이라서 이제 입을 사람도 없던 옷이었지만, 아빠는 그걸 받아오면 거지가 된다고 했다. 싹 다 못 입게 버려버렸고, 고작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그 감정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급식비가 밀리면서도 신발은 메이커를 신어야 한다며, 아디다스나 나이키 따위를 신겼다. 대신 그 신발이 해지고, 뜯어질 때까지 하나만 줄곧 신었다. 불만도 없었고, 욕심도 없었지만 아빠가 잘못 키워서 조금이라도 불편한 신발은 못 신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밑창이 거의 없는 예쁜 단화는 아예 신발을 안신은 것 같은 기분이라 사지도 않고, 인터넷에서 대충 산 구두를 조금 신고 걸었다가 발이 아파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이다. 덕분에 발이 건강해서 하루에 만보, 이만보를 걸어도 문제없다.


아빠의 육아 신념에 따라 불쌍해 보이지 않으려 얼굴을 살펴도 결혼도 하지도 않고, 젊은 장녀 상주인 점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도 이 얘기를 꺼낸 사람은 없지만, 이 점은 나를 자꾸만 가엽게 만들어서 싫었다. 세상이 달라진다고 해도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가족이 큰 역할을 함은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 가여움은 타당했다. 아빠가 이렇게 빨리 죽지 않았으면 나아질 수 있는 부분이었는데, 원망스러웠다. 그러다가 자꾸 아빠가 했던 좋은 말들만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났다. 그리 싸웠는데, 결국 사람에게서는 사랑만 남았다. 눈물이 자꾸 날 때마다, 고모가 와서는 울지 말라며 또 쏘고 갔다. 내 아빠 장례식에서 내 맘대로 눈물로 못 흘리는 서러움이 있었는데, 내 울음에는 불쌍함이 더해져 다른 가족들까지 울려버리는 전염성이 있었음을 후에 알았다. 이는 아빠의 영정사진을 들고 가는 동생이 나보다도 안타까워 눈물이 났던 날에야 깨달았다.



사진: UnsplashZan Lazarev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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