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반에 입문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5월부터 시작된 초급반 강습은 이미 자유형과 배형은 마스터했고, 8월부터는 평영 수업을 시작했다. 다행히 나는 아이들과 자유수영을 워낙 많이 다녔던 터라 자유형과 배형은 어느 정도 할 수 있었고, 호흡만 조금 손을 보면 된다는 평가를 강사님께 들었다. 일주일에 두 번만 하는 수업이라 7시 수업이 있는 날은 어김없이 6시에 회사를 마치고 바로 수영장으로 향해 미리 연습을 하고 강습을 받곤 했다.
8월 마지막 수업날. 6시 반쯤 수영장에 도착한 나는 열심히 자유형과 평형을 번갈아 가며 풀을 오가고 있을 때 같은 반 수업을 받는 여사님이 수영풀로 다가와 인사를 먼저 건넸다. 수줍음이 워낙 많으신 듯한 그분과 한 달 수업을 같이 받는 동안 이렇게 눈을 바라보며 인사를 나눈 것은 처음인 듯했다.
[수영을 좀 배우고 반에 들어오셨나 봐요?]
[아. 네 애들이랑 수영장을 워낙 많이 다녀서 어깨너머로. ㅎㅎ]
[다들 너무 잘하세요. 저는 실력이 너무 모자라서. 수업 올 때마다 좀 부끄러워요. 허리 디스크가 있어서 운동하려고 수영을 배워볼까 했는데 평영 발차기도 허리에 무리가 가는지 수업받고 나면 좀 불편하기도 하고.]
인사를 마친 후에도 여전히 눈은 잘 바라보지 못했고, 어색한 듯 팔을 양옆으로 물속에서 휘저으며 이야기하는 여사님을 보면서, 속 마음을 누군가에게 잘 표현하지 못하는 성정이 느껴졌다. 그러면서 문뜩 나 때문에 그 부끄러움이 조금 더 증폭됐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도 같이 왕초보였다면 처음이라 미비한 실력이 더 도드라지지 않았을 텐데. 혼자 키즈 풀에서 연습하는 게 외롭지도 않았을 텐데. 그래서, 뭔가를 배워보겠다고 용기를 낸 내성적인 한 사람이 의기소침해지지도 않았을 텐데.
특별히 잘못한 것 없이도 누군가에게 충분히 미안해질 수도 있구나 하는 마음을 나는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작은 의문 하나가 동동 떠올랐다.
왜 우리는 어디에 가서 뭘 하든지 꼭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수영 초급반이면 우리는 당연히 수영을 못해서 이반에 들어온 것이다. 잘하면 중급반이나 상급반을 갔겠지.
그런데, 초급반 안에서 조차 우리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왜 놓지 못하는 걸까? 못해도 될 텐데. 못하는 과정조차, 배우는 순간들 모두 훌륭한 운동시간일 텐데. 어딜 가나 따라붙는 줄 세우기는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교육과정의 패해일까? 사람들 본연에 가지고 있던 자격지심의 발현일까? 주위 사람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한국사람들의 특징일까? 그러고 보니 살면서 잘해야 한다는 말은 수없이 들었어도, 못해도 괜찮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여사님, 우리는 다 못해서 배우러 왔잖아요. 못해도 괜찮아요. 천천히 하면 되지 않을까요?]
[ㅎ. 그럴까요?]
수업 끝에 강사님의 마지막 인사가 있은 후 그 여사님은 다음 달부터 다른 반으로 옮기게 될 사실을 모두에게 알렸다. 조금 편안해진 표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