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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셜리 Jun 27. 2022

잡은 물고기는 어항에 두고






서울에 살 때부터 손버릇이 나빴다. 뭔가 원하는 것들이 있으면 꼭 갖고 싶었다. 그게 주로 배고픔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인데 과자, 빵이 대부분이고 가끔 반짝이는 매니큐어도 훔쳤다. 어떤 이유에서도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그 손버릇은 공허함과 외로움 등의 이유였다. 지금도 난 그때 한 행동에 대해 분명하게 잘못이라고 말하며 옹호하려는 마음이 없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했던 것에 대해 안타깝다고 생각한다.



늘 배가 고팠다. 냉장고엔 치즈 몇 장 말곤 아무것도 없고 엄마는 매일 야근에, 오지 말라고 오면 버리고 떠난다는 엄포를 놓아 엄마한테 갈 수도 없었다. 근처 마트에서 배고픔을 못 이기고 하나, 둘 훔치던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마트에서 주로 과자나 빵을 훔친 것을 걸려 주인아저씨가 잘못한 것이라고 지적했었다. 나도 잘못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분명하게 말해준 주인아저씨의 말이 내 양심에 찔려도 멈추지 못했다. 사실 가게 주인아저씨도 내가 왜 자꾸 훔치는지 알고 계시는 것 같았다. 문제를 지적하신 후엔 엄마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대안을 제시한 듯했다. 그렇게 생각한 건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닌데 난리를 쳐도 모자랄 판에 엄마가 이 문제에 대해 혼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인아저씨에게 혼나도 배고픔에 훔쳐서 달아날 때 아저씨가 뛰쳐나와 내 등 뒤에 대고 하신 말씀이 아직도 생각난다.


“엄마가 미리 돈 내고 갔으니까 이제 그냥 계산해서 먹어도 돼!!”


그 말을 들은 내가 그 자리에 서서 뒤돌아 보며 아저씨에게 물었다. 정말 그래도 되냐고, 엄마가 화내지 않았냐고. 아저씨는 웃으며 돈도 줬고 화도 안 냈다고 걱정 말라고 말해주셨다. 그 말을 듣고 반신반의했다. 그리고 엄마가 당연히 혼낼 줄 알았는데 엄마는 오히려 내 머리를 만지며 아저씨가 했던 말 그대로 배고프면 그냥 먹고 싶은 거 아저씨에게 보여주고 가라고 말하셨다.


그렇게 배고픔으로 인한 도둑질은 더 이상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광주로 내려와 살기 시작하면서 다시 시작됐다. 처음은 저금통을 만졌다. 따로 용돈을 받고 지낸 적이 없는 내가 무언가 필요할 때마다 저금통을 그렇게 괴롭혔다. 잔꾀는 얼마나 많은지 발로 저금통을 꽉 붙잡고 손으로 툭툭 동전과 지폐를 꺼내 썼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게 한 것에 대해 들켰고 혼이 났다. 혼나면 안 해야 하는데 하면서도 멈출 생각을 안 했다. 내 마음이 궁핍할수록, 외로움과 학대가 심해질수록 나는 더더 과감하게 도둑질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지갑에서 만 원짜리들을 훔치고 아빠의 지갑에서 절반 이상 가져가는 등 문제 행동은 더 심해졌다.


그 돈들을 훔쳐 내가 한 행동은 먹기. 떡볶이를 먹고, 햄버거를 먹고 무엇이든 과식하며 돈을 훔칠 때마다 먹는 것으로 다 해결을 했다. 당연히 부모는 내 문제행동을 체벌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했다. 때리면 때릴수록, 내가 아프면 아플수록 마음이 한없이 공허해 도둑질이라는 행동을 악화시킬 뿐이었다. 부모는 나에게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고 그저 결혼 후 살림살이가 나아진 것처럼 보여서 그랬다고 생각하고 그런 줄만 알고 있었다.


단순히 엄마 아빠의 돈만 훔친 것이 아니라 할머니 집, 학교에서도 문제행동이 이어졌다. 그런 이유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학교에 가면 모든 학생들이 날 이름이 아닌 ‘전따’(전교생 왕따) 불렀고, 할머니 집을 가면 숨 쉴 틈도 없이 외모 지적과 차별을 당해야 했다. 엄마 아빠는 무조건 체벌로 내 문제행동이 끝나길 바랬지만 당연히 근본적인 것들이 해결되지 않는 이상 끝은 없었다. 할머니 집에 작은 아빠 저금통을 건들고 학교에서도 도둑질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아빠는 맨 손으로 내 종아리를 때렸다. 아빠의 직업은 건축한다고 설명했지만 막노동하신 분이라 손이 굉장히 크고 악력이 보통사람과 다른 분이셨다. 그런 사람이 아이의 종아리를 온 힘을 담아 3대 때렸는데 그날부터 종아리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색의 멍이 심하게 들었으며 일주일 넘도록 걸어 다니지 못했고 기어서 다녀야 했다. 집은 물론 학교까지.



도둑질도 도둑질이나, 학원에 내야 할 책값도 부풀려 말하고 돈을 받았다. 차액은 만원 안팎으로, 절대 적은 돈이 아니다. 그렇게 받고 나면 무조건 배 속에 들어가는 음식으로 바꿔두고 매일같이 혼났다. 학원 선생님들은 내 앞에서 날 조롱했고 비웃음거리로 만들곤 했다. 내 도둑질과 이런 행동은 항상 괴로움에서 시작됐다. 절대 내 행동에 대해 옹호하거나 정당하다 이야기하려 쓴 것이 아니다. 당시에도 내 잘못을 충분히 인지했지만 행동을 멈추진 못 했다. 행동을 하는 나도 잘못을 알면서 괴로워했다. 그 괴로움에 바로잡고 싶었던 마음도 강하게 있었다. 그러니 조금만 내게 왜 그랬는지 물어봐주고 들어주려 했다면, 그런 후에 문제 삼아 혼냈다면 이 행동이 오래가지 않았을 거라 생각할 뿐이다.


내 꿈은 결혼을 빨리 하는 거였다. 과거형이다, 지금은 어떠한 생각도 없고 연애에 대한 마음도 없다. 24살까진 정말 결혼을 빨리 하고 싶었다. 어릴 땐 그래야 이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 생각했고, 성인이 된 후엔 번듯한 가정에서 행복을 꿈꿨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엔 엄마가 가장 크지만 아빠 역시 한몫했다. 연애할 땐 정말 하늘에 있는 별이라도 못 따줄까 하며 애지중지했다. 결혼식 올리기 전까지만 해도 아니, 할아버지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가정을 이끌어갈지 설득할 때만 해도 정말 누구보다 더한 사랑꾼이 따로 없었다. 결혼 후 그 모습은 결혼이라는 하나의 숙제를 끝내기 위한 꾀에 불가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아빠는 지독하게 나쁜 남자이자 이중인격자 같았다. 처음 결혼 후 엄마와 언성을 높이며 죽일 듯 싸우고 만삭이 된 엄마를 친정에 버리듯 던지고 떠난 적도 있다. 아직도 기억나는 건 엄마와 아빠가 매일같이 싸우고 또 싸우다 어느 날은 차 안에서 싸우기 시작했다. 아빠도 그렇고 엄마도 보통의 성격이 아니어서 누구 하나 져줄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차에서 싸운 날 나는 뒷좌석에 앉아 있었고 엄마는 옆 자석에 앉아 사소한 말로 아빠의 자존심을 건들었다. 그러자 아빤 가던 길을 돌려 갑자기 외할머니 집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내려, 안 내려로 미친 듯이 싸우더니 아빠가 내려서 만삭인 엄마의 팔을 잡아끌어 던지듯 바닥에 두고 나도 쫓아내 홀로 차 타고 집으로 가버렸다. 만삭의 엄마를 그랬다는 거에 대해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엄마는 잘 살아보겠다고 할아버지를 설득해 겨우 결혼했는데 나와 만삭인 몸으로 들어갈 수 없어 한참을 밖에서 서 있다 택시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지금도 외할아버지네는 같은 위치에 있는데 도로변인데도 택시가 진짜 안 잡히고 안 다니는 곳이라 도보로 20분은 걸어야 겨우 잡을까 말까이다. 집에 오니 우리가 왔다고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물건 던지며 화를 멈추지 못했다. 너무나 위협적으로 다가와 당장이라도 우릴 죽일 수 있다는 뉘앙스의 말과 행동을 보여줬다. 퍽하면 정말 매일 그렇게 싸웠다. 나는 모든 것이 공포였다. 아빠가 하는 말투와 목소리, 위협을 가하는 행동까지.


만삭인 엄마가 한 겨울에 산통이 왔다. 나랑 단둘이 있는데 씩씩하게 엄마 혼자 짐을 싸고 내 손을 잡으며 병원으로 갔다. 그날 아빠만 빼고 광주에 사는 식구들이 엄마와 태어난 동생을 보러 왔다. 아빤 자신의 아이가 태어날 때 뭐했냐고? 시외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그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커서 생각해보니 아빤 한 번도 엄마와 산부인과를 간 적이 없다. 늘 내 손을 잡고 간 엄마… 예정일을 알고 있었을 텐데 시외로 일 나간 아빠. 일하느라 분만 때 그 자리에 지키지 못한 게 무슨 죄냐 할 수 있지만, 그건 죄다. 차가운 분만실에서 혼자 죽을 고비를 견디며 애 낳는 일이 절대 당연한 것이 아니다. 또 아빤 우리가 싫어 퍽하면 시외로 일 잡아 나가거나 집을 나갔다. 분만 때만 함께 못한 게 아니라 10개월 동안 단 한 번도 아빠가 엄마와 같이 병원 간 적이 없어 홀로, 내 손을 잡고 병원을 다녀야 했었다. 항상 삐그덕 거리는 결혼생활을 이어갔다. 지금도 이어지는 중이다. 사춘기부터 엄마가 매일 나에게 하소연을 했고 성인이 돼서도 엄만 자신의 분이 풀릴 때까지 전화를 끊지 않았다. 내가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도, 1시간이고 2시간이고 말이다. 주 내용은 아빠가 자신에게 얼마나 사랑이 없었는지 어떤 욕을 해 얼마큼 화가 났으며 수치스러웠는지 어떤 대우를 하며 또, 자기가 어떻게 지금 아빠에게 복수를 하고 있는지 모든 것들을 이야기했다. 이해가 잘 안 됐다. 아빠한테 그리도 사랑받고 싶어 하면서 못 받는 사랑을 왜 나에게 하소연하며 엄만 뭐가 좋다고 자신을 쥐뿔도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딸에게 시시콜콜 욕하며 자신의 불행에 대해 이야기하는지 말이다.



아빠에게 정말 나쁜 버릇이 있다. 화를  참으며 순간의 화로 물건을 던지고 부수는 행동이다. 엄마는 물건을   가장 비싸고 좋은 것들을 구매한다. 그럼 오래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같다. 그럼 뭐하나, 아빠가  던지고 밟고 부수는데. 비디오부터 티브이, 선풍기    있는  죄다 부수고 위협 주는 도구에 불가했다. 내가   엄만 부정 망상이라는 의부증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때 굉장히 심각한 문제였다. 아빠는 이상하게 우리를 가족이라 여기지 않은  같았다. 자신의 사적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고 엄마가 핸드폰을 만졌다는 사실을 알면 나와 엄마 앞에서 핸드폰을  동강내 수시로 핸드폰을 바꿨다. 아빠가 그은 선을 넘었다 여길  말도   없을 만큼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며 물건을 던지고 화를 냈다.  기분에 따라 반응도 달랐다. 무언가 본인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경우 나를 향해 선풍기,   일부로 던지는 모습도 보였다. 우는 것도 극도로 싫어했다. 울면  화냈고  난폭하게 굴었다. 어느 정도로 싫어했냐면 동생은 말이 느렸고 유아기를 천천히 보내고 있어 표현을 우는 걸로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의 남동생의 아들과( 동생과 개월 수만 차이 나고 나이는 같다.) 매번 비교하며 울지 말라고 험악한 표정을 짓고 위협적으로 시범을 보여줘 공포감을 느끼게 했다. 그럴 때마다 동생은  크게 울었는데 계속 운다는 이유로 아직 아기인 얘를 손으로 사정없이 때렸다.  일은 동생이 정말 어릴  있었던 일이다. 고작 7살도    말이다. 어찌나 충격이 컸는지 아직도 그때를 기억하고 있다.  고등학생 시절 가정폭력이 극심했는데 내가 아빠가  욕설과 물건 던지는 소리, 깨부수는 것까지  녹음해 아동학대와 가정폭력으로 신고한  동생은 기관에서 심리 치료  보호를 받았다. 그때 심리치료사는 동생의 발달이 보통의 기준보단 조금  느린 편인데  학대로 인한  같다고 말해 엄마가 충격으로 한참을 울고  울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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