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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셜리 Jul 01. 2022

시선이 멈춘 곳마다





  집에서 유독 혼자라는 것을 많이 느꼈다. 동생이 태어나서  그렇다는 것을 뼈가 시리도록 느끼고 알았다. 어느 때처럼 아빠는 집을 나갔고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넓은 집에 안방  곳만 보일러를 틀었는데  방에서  기억이 별로 없다. 오늘도 다른 날과 같이 엄마는 나에게 아빠에 대한 화풀이를 하고 본인 근처에 오지도 말라 으르렁거렸다. 말대꾸했다고, 이불조차 뺏겨 차가운 거실 바닥에 누워 웅크리며 잠을 청해야 했다. 내가 있는 이곳은 너무나 춥고 외로웠는데 내가 바라본 곳은 정말 따뜻하고 평온했다.  시선이 닿는 곳은 엄마, 동생 그리고  사이에서 나오는 사랑의 온기. 매일 그렇게 매를 맞으면서도 자기  하늘에 엄마의 사랑을 느끼게  달라 소원 빌었던 것처럼 여전히  엄마의 사랑에 대해 소원을 빌었다. 지금  눈엔 따뜻한 안방에서 엄마와 동생이 꼬옥 껴안고 두꺼운 이불을 덮는 모습이지만 내가 자고 일어나 눈을 떴을  새우 모양으로 웅크린 내가 안쓰러워 엄마가 이불로  마음을 감싸 덮어지길 바라며 잠을 청했다.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기에 소원으로 끝난다. 현실에 눈을 떴을  나는 너무 추워 몸을 한껏 웅크리고 몸을 손으로 쓸어내리고 있었다.  시선이 닿는 곳은 여전히 따뜻했고 사랑이 넘쳤다. 내가 원한 것은 고작 이불 혹은 엄마의 품인데 나에겐 너무  욕심이라고 그때 깨달았다. 나도 동생처럼 엄마 품에 안겨 추위를 피하고 사랑을 느끼고 싶었다. 이때 서울에서 엄마가 4살인 나와 판잣집에   엄마 등에 느껴지는 한기에  그리 슬픈 표정을 했는지   있었다. 고작 10 ,  일로  씁쓸함과 비참함을 온몸으로 느꼈다. 언제나 나와 엄마의 시선은 각자 다른 곳으로 향해 있었다. 나는 엄마만 봤고 엄마는   번도 쳐다보지 않으셨다. 엄마는 지금도  어린 시절은 너무 못됐고 말도  듣는 키우기 힘든 아이였다고 그래서  그리도 때리고 했다고 가스 라이팅을 하지만  그렇게 만든  엄마의 행동이라고 말하고 싶다. 처음은 엄마의 관심을 받기 위해 반찬투정을 했다.  먹을  있는데  먹었고, 배고프면서  먹는다고 소리쳤다. 그럼 그렇게 하라며 엄만  굶겼다.


첫날은 나에게 보란 듯이 엄만 동생에게 따뜻한 밥과 반찬을 사랑으로 먹였다. 밥상 근처에 오면 언성을 높여 오지도  하게    모습을 구경만 해야 했다.


두 번째 날, 전날 하루 종일 굶겨놓더니 밥도 비워두고 쌀도 치워서 밥을 해먹지도 못 하게 했다. 난 8살 때부터 밥을 짓고 재료만 있다면 볶음밥도 만들 줄 아는 아이였기 때문에 쌀만 있으면 밥 하고 하는 일이 너무나 쉬웠다. 그런 속성을 만든 엄마가 일부로 비워놓고 다른 방식으로 굶긴 것이다.


세 번째날, 아예 날 거실에 두고 동생과 도란도란 부엌에서 돈가스를 만들고 부침개를 만들어 서로 먹여주는 모습을 보여줬다. 기름 냄새가 얼마나 강렬한지 모두가 알 것이다. 내가 끝까지 미안하다, 잘못했다 하지 않자 그 음식들을 거실로 가져와 눈앞에서 아른거리게 하며 냄새만 맡게 했다. 나는 그때 이미 3일을 굶어서 비참할 때로 비참해 살고 싶지 않았다. 자리를 박차고 집을 나가자 엄마가 나를 집에서 큰소리로 부르고 또 불렀다. 짜증이 제대로 난 내가 “왜!!!!!!!!” 대답하자 내려다보며 너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며 잘못했다고 말하기를 강요하고 또 강요했다. 엄마가 그렇게 하라는데 달리 방법이 있나… 내 잘못이라고, 죄송하다고 싹싹 빌었다.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알겠다고 이번만 봐주겠다며 돈가스를 먹으라 했다.   꺾인 내가 눈치를 보며 젓가락을 들고  튀긴 돈가스를 집어 먹었는데  순간, 내가 엄마한테 엄청나게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썩은 표정을 보고  크게 웃던 엄마. 사실 돈가스가 아니라 그냥 누룽지를 튀긴 거였다. 속으로 , 미친…. 속았네…. .. 그랬던 기억이 있다.


엄마와 아빠의 싸움은 어디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 같았다. 항상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야 했던 나와 동생은 엄마가 아빠랑 싸우다 발을 삐끗해 깁스를 하고 있었을 때였다. 갑자기  그렇게 싸우고 폭력을 행사했는 가에 대해선 기억이   난다. 그들이 싸우는 이유는 사실   없을 때가 많고 누구 하나 침착하게 대응했다면, 그냥 감정을  참아서 벌어진 일들이 많았다. 여태까지 아빤 직접적으로 신체에 폭력을 가한 적은 없었다.  혹은, 엄마를 표적으로 삼아 물건은 던진 일이 대부분 었는데  날따라  먹다가 아빠는 극도로 화가  있었다.  분노엔 역시 엄마의 말과 지겹게 하는 행동들이 원인이었다. 아빠가 식탁을 박차고 주방을 나가 컴퓨터방에 도망칠 때에도 엄마는 깁스한 불편한 발로 쫑쫑 잘도 쫓아가 심기를 건들었다. 아빤 그런 엄마가 싫어  나가려고  싸다 언제나처럼 똑같이 물건을 던지고 욕을 했는데 엄마가 멈출 생각을  했다. 극심한 분노에 눈이 돌아간 아빤 하지 말아야  행동을 했다. 나는 그날 아빠가 엄마를 주먹으로 때리는 것을 결국 보고야 말았다. 불특정  곳을 때리고  때리면 엄마가 어떻게든 깁스로 막아보고 팔로 막는 것을  눈앞에서 보았다. 욕설과 큰소리로 오늘도 집이 시끄러웠다. 진짜 이혼하자고 당신 같은 사람이랑  수가 없다며 큰소리가 오갔다.  먹다 일어난 일이고, 바로 앞에서 폭력을  순간 울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동생의 울음소리였다. 여기서 동생의 울음소리까지 거슬린다 느끼면 정말   짓이라 생각했다. 아빤 이성을 잃고 주먹질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얼른 동생을 안아  몸집으로 눈을 가려주고 손으로 귀를 막아 끊임없이 동생의 귀에 속삭여줬다.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걱정하지 마, 괜찮을 거야 응?

무서워하지 마, 이 소리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알겠지?


아빠가 짐을 들고 집을 나갈 때까지  앞에서 펼쳐진 폭력사태에 대해 아무것도 아니라며 동생의 귀에 속삭여줬다.  속삭임에 동생은 진정하며 울지 않았다. 내가 동생에게  것처럼 어쩌면  말을  눈앞에서 벌어진 믿을  없는 일에 대해 스스로에게 말해주고 싶었고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14 정도…? 엄마가 울었다. 자존심 때문에  것인지, 지금 상황이 너무나 비참해서 울었는지   없었다. 그냥 울고  울어서 나는 조용히 인터넷 집전화기로 이모들에게 단체문자를 남겼다. 이모, 엄마가 많이 울어요, 나는 힘이 없어서 이모가  위로해주세요. 문자를 남기자마자 이모들이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줬고 엄만 이모들에게 하소연하는 것으로 마음이 풀린 듯했다. 조용히 다가가 엄마에게 “엄마, 괜찮아…?” 조심히 물었다. 엄만  말을 무시하고 동생을 안아주며 안정시킨  눈이 찢어질   쳐다보며 어금니를  깨물고  들고나간 아빠를 찾지 말라고 소리쳤다.


니년이 뭘 안다고 지랄이야!!! 입 닥치고 안 보이는 곳으로 꺼져.


화풀이를 하더라.  눈앞에서 벌어진 아빠의 폭력에 나는  방치되었다.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에, 병들어가는지 모르고 그저 동생이 아무것도 모르길 바랐고 아무것도   없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들으며 좋은 생각만 하다 크길 바라는 누나. 작은 사소한 것도 자신에게 품을 내어주는 엄마. 이렇게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는 동생이 매번 미치도록 부러웠다. 나도 사실은 정말로  무서운 상황에서 누군가 귀를 막아주며 속삭여줬으면 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며 좋은 것만 보고 느끼라고 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 놀랬어도 먼저 엄마의 마음부터 보려 했던 나에게 엄마는 니년이라는 말로 또다시 상처를 주었다. 엄마가 그때 이모들에게 연락받았을  이모들이 내가 문자를 남겨서 연락했다고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엄만 하늘이 자신을 불쌍히 여겨 위로받게  줬다고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알겠지만, 내가 엄마의 키다리 아저씨였다.


중학교 3학년, 가을 즈음으로 기억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엄마와 아빠는 싸우고 있었다. 아빠는 자신의 부모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얼마나 극진히 아끼시는지 할머니가 우리에게 라면을    적이 있는데 내가 동생과 먹고자 끓은 물에 라면을 넣기 직전 유통기한이 지나도 한참 지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아빠에게 말한 적이 있다. 일반적으론 대부분 나에게 먹지 말라고 하지 않나? 아빤 그런 적이 없다.  앞에서 자신의 부모가 이것을 먹었을까 걱정하며 전화로 먹지 말라고   말곤 어떠한 얘기도 해주지 않았다.  후에도 이런 일은 있었다. 그러나 항상 반응은 똑같았고 우리를 걱정하긴 커녕 우리 앞에서 부머에게 유통기한이 지난 라면을 먹지 말란 걱정이 가득한 통화를   주방에서 사라졌다. 역설적인 얘기지만 할머니네는 작은 아빠 때문에 하늘이 무너져도 라면을  먹는다. 그런 아빠에게 엄마가 명절 얘기를 하자 아빠가 화를 참지  하고 밥상을 엎었다. 그리곤 주변에 있는 모든 물건을 던지고도 화를  이기는데 엄마는 쫓아다니며 꿋꿋하게  말을 계속했다. 그때 우리 집은 거실과 안방 사이에 유리로  미닫이문이 있었는데 엄마가 특수제작 주문을 넣어 만든 특별한 문이었다. 유리조각이 모여 반짝이는 형태였으며 색색의 모형이  특별하게 보였다. 보통의 미닫이 문과 달리 굉장히 두툼하고 강화유리였는데 쫓아다니며  말을 끝까지 하는 엄마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한 아빠가 엄마를 향해 주먹으로  강화유리를 깨부수었다.

당연하게도 집은 온갖 유리조각과 아빠의 피로 집이 풍비박산이 났다. 그때  동생을 뒷문으로 나오라고 하며 밖으로 데리고 갔는데 하필 동생은 팬티바람이라 고민했다. 날이 꽤나 쌀쌀한 시점이고 늦은 밤에 일어난 일이라 분명 감기가   같았다. 고민 끝에 동생에게 잠깐만 여기 있으라고 신신당부한  조심스럽게 집에 들어갔을   눈에 들어온 것은 너무나 충격과 공포였다. 유리문을  주먹으로 부숴 마당과  전체가 아빠의 피로 물들어 있었고 아빠는 마당에서 담배를 피우며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한쪽 팔에서 피를 뿜어내며 말이다. 진짜 미치도록 괴롭고 무서웠다.  집이 피로 물든 것을 ,  나이 고작 16. 무섭다, 기절할  같다 생각은 잠시 동생과 도망치려면 동생의 바지가 필요했다. 집에 조심히 들어가 보니 엄마는 온몸에 유리파편이 박혔고 집은 자잘 자잘한 유리조각으로 난리였다.  보자마자 엄마는 - 소릴 질렸다. 엄마의 눈에 비친  모습과 엄마의 감정을    있었다.


이 모든 일들은 다 너 때문이야!


원망 가득한 눈으로  째려보고 있었다. 옷가지들이 유리조각으로 엉켜서 어쩔  없이 밖으로 나와 옥상에 있는  말린 바지를 동생에게 입히고  길로 할머니 집으로 도망쳤다. 외할머니 집으로   있었지만   뒤꿈치에 유리조각이 박혀 있었고 동생의 차림 역시 지목이 집중되지 않으면서 비교적 짧은 거리를 걸어갈  있는 곳을 택했다. 용돈도  받는 내가 택시라는 선택지는 없었고   있는  걸어서 할머니 집으로 도망치는 것이다. 할머니 집으로 겨우겨우 도망쳤지만, 사실  그곳을  것에 대해 후회했다. 지금도 미치도록 후회한다. 할머니는 우릴 보자마자 기가 찬다는 웃음을 하고 나를 향해 욕을 퍼붓고 우릴 그동안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려주셨다.


“내 그럴 줄 알았어, 니 엄마는 창녀야, 창녀!! 알아?”


안방에 계시던 할아버지는  번을 나오지 않고 그저 말로    정도만 하지 말라고 말리시기만 했다. …. 창녀.., 엄마를 그렇게도 못마땅해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창녀라고 생각하시는지 몰랐다. 할아버지도 마찬가지다. 말리는 척만 했을  실제론 평온하게  보시며 얼굴   비치지 않았다. 손녀는 유리 박혀 절뚝거리고 손자는 추운  반바지도 못한 바지를 입고 도망쳐 왔는데  이런 순간에 창녀라는 단어가 나오는지 이해할  없지만, 적어도 결혼한 순간부터 할머니 할아버지   모두 그렇게 생각하셨다는    있었다. 도망쳐  날부터 작은 아빠  타고  집을 나올 때까지 나에게 서슴없이 상처를 주고 엄마에 대해 모욕적인 말을 했다. 그걸로 끝나길 바랬지만 작은 아빠  타고 집에 오니 여전히 마당은 피로 물들었고 엄마는 유리가루에  몸을 긁고  긁었다. 유일하게 유리조각이 없는 곳은  방이었는데 집에 돌아와 엄마가  보자마자  말이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온갖 욕설을 하며  외할머니 집이 아닌 거길 갔냐고 혼내셨다. 나는 본인 근처로 다가오지도 못하게 하면서 동생에겐 많이 놀랬냐며 이리오라고  안아주셨다. 어쩔  없는 선택이었는데…, 나도 가서 오만 욕을 들으며 수치를 당하고 왔는데 오늘도  혼자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고 조용히 방에서 나와 유리들을 치우고 주방 사방의 벽에 묻고 엎어진 반찬들을 치우면서 닦았다. 동생이 엄마의 자장가와 품에서 잠들고 엄마는 화장실에서 몸에 박힌 유리가루를   없어 긁고  긁을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다가갈  없게 내겐 벽을  엄마여도  엄마라, 시가에서 그런 취급받으며 버티는 엄마가 너무 안쓰러워 나도 같이 소리 없이 울고  울었다.  무능력을 탓하면서.


아빤 팔에 크고 작은 유리조각이 박혀 인대가 끊어지고 핏줄이 망가져  시간 걸쳐  수술을 받으셨다. 나는  뭐가 좋다고  흘리며 담배 피우던 아빠에게 병문안을 갔을까. 아빤 본인의 부모와 형제 그리고 나만 병문안을 받으셨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안심시키려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본인이 질러놓은 것들을 자식이 하나하나 손으로 치우고 수습하는 것도 모르면서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니라고 변명하니 기가 찼다. 나는 아빠가 엄마를 향해 문을 부순 것도 보았고  보았는데이들은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애라고 생각하는  같았다. 어린애 취급은 하면서 뒷수습은 애가 하게 한다니 웃기지도 않다. 대충 주방과 방들을  손으로 치웠지만 마당만큼은 엄마가 한동안 치우지 못하게 했다. 나는  자국들이 그때  상황을 떠올리게  너무나 싫고 공포스러운데도 엄마는 그걸 똑똑히 보라며 치우는 것을 말렸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 엄마의 눈치를 살펴가며 조심히 피가 말라버린 마당을 살살 정리했다.


피에 대한 트라우마는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피를 흘리는 무언가에 대한 공포는 심해 보면 자지러질 때가 있다. 나도 아팠고 힘들었는데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내가 아프고 힘들고 괴로웠던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쫓기듯 도망치는 순간에 그냥 동생이 그때  장면을  봤기만을 바라고  바랬다. 나도 그때만큼은 동생처럼 정말 엄마 품에서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고 싶은 아이였다. 엄마에게 사랑을 받고 싶었다. 또한,  마음을 병들게  아빠에게 사과도 받고 싶었다. 하지만   번도 그들은 미안하다, 아프지 않았냐 물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3  모든 우울과 불안이 터져   때마다 매일 이유 없이 울고  울었을  제발, 제발 정신병원에 넣어서 다신 나오지 못하게  달라 무릎 꿇고 그들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애원했을 때도  마음을 무참히 지르밟고 갔다. 나중에 내가 이리도 아팠는데  방치했냐며 따져 물었을  그런   적이 없다며  말이 모두 거짓말로 치부했다.  아프게 했던 일들을 얘기할 때도 그런 적이 없다, 네가    아님 망상이다 등으로  본인들이 해결한 문제라고 다른 방식으로 상처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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