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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셜리 Jun 26. 2022

이상과 현실은 공존할 수 없다.






엄마의 생일이 다가올 쯤에 나는 엄마에게 처음으로 구슬 팔찌를 만들어서 드렸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한 땀, 한 땀 색을 조합해 만들어 엄마에게 선물했다. 나는 당연히 엄마가 말이라도 ‘고마워’라고 말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나의 기대일 뿐 현실은 너무나도 잔혹했다. 엄마가 팔찌를 받자마자 한 말은 나에게 너무나 큰 상처가 됐다.


“이딴 쓰레기는 뭐하러 만들어! 엄마는 이런 것보다 금이 좋아! 황금!”


그리곤 내가 열심히 만든 팔찌를 보란 듯 뜯어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그때 느낀 허무함은 내가 가진 작은 나이에 느끼기엔 빨랐고 크기가 컸다. 엄마에게 내 마음을 담은 선물이나 편지는 늘 통하지 않았다. 그저 돈 혹은 물질적인 것들을 요구하셨는데 그게 내 능력치에서 벗어난 것들이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 내 뇌리에 박힌 선물은 금이라는 단어 때문에 엄마에게 줄 14k 도금 귀걸이를 구경하다 문구점 진상 손님이 된 적이 있다. 때는 10살, 학원이 끝나고 1층에 있는 큰 규모에 문구점에서 팔찌, 목걸이 등 액세서리를 팔았는데 꼭 그걸 생일선물로 엄마에게 선물해주고 싶었다. 퍽하면 금 타령하는 엄마한테 꼭 이걸 주면 나를 예뻐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됐다.


아빠에게 전화해 상황을 설명하고 용돈을 가불해 선물하고 싶다고 꼭 와달라고 부탁했다. 알겠다는 대답을 했음에도 3시간이 넘도록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난 끝까지 아빠가 오길 기다렸다. 오겠다 나와 약속했었고 엄마를 기쁘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흘러 밖이 깜깜해져도 오지 않던 아빠가 왔다. 나는 웃으며 14k 금귀걸이라 적힌 것을 가리키며 사달라 했는데 아빠가 창피하다는 표정으로 날 끌고 나왔다. 집으로 끌고 가는 아빠가 내가 창피하다고 말했었다.


아, 난 엄마 아빠한테 창피한 존재인가?


팔찌를 만들어 준 나에게 보여준 엄마의 행동과 말처럼 나는 그저 창피하고 쓸모없는 그런 마음을 가진 아이인가 싶었다. 나중에 중학생이 되어 생각해보니 나의 마음을 처참하게 짓밟은 엄마가 너무 미웠다. 엄마에게 줄 생각 하며 신나서 만든 내 선물을 뜯고 보는 앞에서 쓰레기통에 던진 건 내 잘못이 아니라 엄마가 한 정말 못된 짓이라고 생각을 다시 했다. 아빠 역시 별 다르지 않게 못된 짓을 나에게 한 것이다. 당신은 약속을 그리 중시한다고 하면서 나랑 한 약속은 지킨 적이 없다. 어린 마음에 엄마에게 주려고 한 가짜 금 귀걸이여도 그 마음에 대해 칭찬해줬어야 했다. 그냥 창피하다고 그 한 마디로 나에게 상처를 줄 일이 아니라.


작은 말 하나에도 아이가 상처로 남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 어른이 의무가 아닐까 생각된다. 말 하나로 평생을 아프게 기억할 수 있고 영향을 줄 수 있다. 엄마를 사랑했지만, 엄마의 요구는 사랑이라는 감정만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것들 뿐이었다. 황금, 금으로 돈 비싼 물건 등등… 말로만 상처받았다면 덜 미웠을 텐데 난 마음, 몸 가리지 않고 아팠다.


유치원을 다닐 때부터 나는 늘 치마, 원피스를 사랑했다. 성인이 된 지금도 그건 유효하다. 하지만 난 엄마가 재혼한 이후로 치마나 반바지를 입어본 기억이 없다. 입고 싶어도 못 입은 것이다. 이윤 퍽하면 내 허벅지를 보라색, 파란색, 노란색으로 색 가득 채웠기 때문에 엄마가 못 입게 말렸다. 멍은 매일 내 허벅지에 있었다. 그제 생긴 멍이 지워질 틈 없이 새로운 멍으로 채워지고 멍이 멍으로 가려지고. 엄마는 말을 안 듣는다, 말대꾸한다 등 이유로 때렸지만 나는 전혀 납득되지 않는 이유였다. 플라스틱 옷걸이로 한 번 시작된 매질은 몇 시간 동안 멈추지 않아 살려달라고 빌어도, 고작 8살의 몸집이 작은 내가 아무리 피해도 매질은 멈추지 않아 소용이 없었다. 기어들어가 빨래건조대에 숨으면 “오호? 너 숨었어?” 말하며 더 사정없이 때리고 또 때렸다. 숨어서 살려달라 외칠 수록 리듬감의 매질은 이 상황을 즐기는 기분까지 느낄 정도였다. 강하게 인정사정없이 때리고 또 때리다 옷걸이가 망가지면 다른 옷걸이를 꺼내 때리다 분이 풀리면 멈췄다. 처음엔 플라스틱 옷걸이로 때리다 자꾸 부서지니 나중엔 집에 있는 오만 것들로 나를 때렸다. 나중엔 집에 있는 검도 칼의 집으로 두들겨 팼다.


매일 집에서 울음소리가 멈춘 적이 없고 너무 아파서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 질렀다. 그러나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 오히려 집 앞 슈퍼 아줌마들이 나에게 말대꾸한다며 손가락질을 했다. 죽어라 때리는 거에 대해 아빠부터 친할머니까지 다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처절하게 살려달라고 빌고 또 비는 모습도 보았고 어떻게 맞고 지내는지도 보았다. 매일 온 허벅지가 멍으로 가득한 것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묵인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본 적이 없는 척하며 내가 그리 맞는 것에 대해 타당한 이유를 대며 맞아도 마땅하다며 합리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그렇게 맞고 자기 전 하늘을 향해 작은 소원을 빌었다. 내가 자는 동안 엄마가 내 허벅지를 쓰다듬었다가 아프지 않게 살살 약을 발라주기를 말이다. 드라마로 만들어진 환상일 수 있고 내가 엄마에게 기대한 엄마로서의 역할일 수 있다. 그리도 잔인하게 했어도 엄마의 사랑을 느끼고 싶었던 작은 아이의 소원은 이루어진 적 없다.


시간이 지나 몇 년이 흘러도 여전히 매질은 계속됐으며 강도는 극강으로 달렸다. 나중엔 담양에서 ‘사랑의 매’ 각인한 대나무 매를 사서 나에게 보여주며 이제부터 이걸로 때리겠다며 씨익 웃는 엄마와 아빠 모습에 기겁했다.


매질은 변하지 않았다. 이젠 하얀 다리를 언제 봤는지 기억조차 안 났다. 매질에도 분 풀리지 않았던 엄마는 한 가지 더 체벌을 했는데 그건 나에게 엄청한 수치와 고통을 주는 행동이었다. 너 같은 년은 필요 없다, 집 나가라고 고함지르는데 내가 끝까지 안 나가고 버티면 발목과 다리를 잡고 3층부터 1층까지 끌고 내려와 내복 차림인 날 대문 밖으로 쫓아내는 행위였다. 일부로 더 아프게, 끌려갈 때마다 계단에 머리, 등을 부딪히게 끌고 내려가 대문 밖으로 쫓아냈다. 이런 일이 수십 번 반복되니 나도 지쳐 집 나가라 소리칠 때 알겠다고 대답한 후 내 발로 나간 적도 있는데 그 모습에 오히려 엄마가 당황해하며 집에 들어오라 한 적도 있다. 발목과 다리를 잡고 끌어내리는 체벌은 이 집을 떠나기 전까지 지속됐다. 전세로 살았으니 최소 2년은 지속됐다.


내겐 고통과 괴로움이 가득한 이 집에 살면서 축하할 일도 있었다. 9살, 남동생이 태어났다. 새아빠와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였다. 난 항상 갖고 싶었던 동생이 생기고 작고 귀여운 그런 동생이 좋았다. 손발이 작은데 움직이니 더 신기했다. 더 신기했던 건 엄마가 날 향해 웃었다는 것이다. 재혼한 후 아니, 살면서 처음일지도 모른다. 막 9살인 내가 신생아 동생을 업고 둥가둥가하니 엄마가 정말 좋아했다. 좋아하는 표정을 보니 긴장감이 풀려 숨통이 탁 터지는 느낌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렇게 느껴선 안 됐다. 그 미소에 좋아해서는 안 됐다고….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때 나에게 경고를 하고 싶다. 그렇게 처음으로 업고 토닥이는 모습에 엄마는 믿음직한 베이비시터를 구한 것처럼 나에게 신생아를 맡기고 일하러 나간 것이다. 그때부터 난 매일 동생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분유를 먹이며 툭하면 우는 아기를 업고 토닥였다. 그런 모습을 본 어른들은 하나같이 다 똑같은 말만 했다. 그 어른들은 나의 외가, 친가 식구들이다.


“아이고~, 예쁘네! 아기도 잘 업고 잠도 잘 재우고~”


살면서 내가 처음으로 인정받고 칭찬받았던 순간이다. 혼만 나던 때 칭찬에 목말랐고 애정 어린 말이 필요했던 그 어린 시절에 난 그래서 더 열심히 내 동생을 안아주고 한편으론 나의 놀이 시간을 빼서 하루 종일 돌봐야 하는 상황이 싫지만 그 마음을 숨기며 온 몸으로 동생을 키워냈다. 어른들은 당연한 일처럼 동생이 졸려하거나 배고프다 투정 부리면 엄마가 아닌 나를 불러 달래도록 했다. 결국 동생 케어는 당연하게 내 몫으로 남았다. 동생이 6살이 되어도 내 허리는 그 아이의 것이었고 내 밥 대신 그 아이의 밥을 먼저 챙기기 바빴다. 학교가 끝난 모든 시간을 동생에서 쏟아내고 그 아이의 발달 시기와 과정을 내가 지켜보면서 깨달았다. 어느 시점에서 아이가 걷고 기저귀를 떼며 말하는지 계속 돌보며 알고야 말았다. 그 아이가 커서 유치원을 다니고 학교를 다니면 당연히 내가 데리고 와야 했다. 유치원에서 어딜 가면 부모님의 자리를 대신해 꼭 같이 가라고 강요받았다. 동생에게 내 모든 시간을 쏟아도 별다른 칭찬 하나 없었다. 엄마 아빤 첨에 나에게 맡긴 거에 대해 인정하셨다. 내가 키웠다고 분명 말하셨다. 시간이 흘러 동생이 내 손에서 자랐다는 걸 잊어갈 때 말을 바꾸셨다.


너 따위가 뭔데 함부로 동생을 키웠다고 하냐고-.


그들은 그냥 낳았으며 키운 건 나였다. 그들은 매일같이 동생으로 보며 미안하다고 했다. 자신들이 그 어린아이를 돌봐주지 못했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나에게 수없는 폭언을 하고 차별을 했다. 먹는 것부터 입는 거, 자는 거, 모든 것들이 차별로 이어졌다. 그 차별엔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억지를 부렸다. 나는 엄마가 업고 다녔는데 동생은 그러지 못했다며 본인이 곁에 있어주지 못했기에 잘해주고 싶다고, 뭐든 해주고 싶다고 좋은 건 다 동생에게 줘야 했던 나에게, 내 나이 9살부터 지금까지도, 미래에서도.


훗날 연락을 끊고 다신 만나지 않겠다 다짐하기  때조차 현재 2라는 나이에 동생이 20살이 되어도, 평생 함께 살며 밥해주고 빨래도 해주며 끝까지 케어할 것을 강요했다. 하긴, 중학생이  나한테 성인인 사촌오빠랑 같이 살면서 팬티 빨아주라고  엄마인데 동생 케어는 아무것도 아니지.


9살이면 나도 아이다. 지킴 받아야 했고, 아픈 일에 대해 투정 부려도 되는 나이였지만 부모라는 사람들은 나보다 자신이 먼저였으며, 동생만 생각했다. 동생이 제일 불쌍하다고 매일 내 귀에 대고 세뇌시켰다. 그들의 폭력 속에 끝까지 ‘나’는 없었고 동생만을 지켜냈다. 꼭 쓸 내용이지만 미리 언급해 보면 동생의 학교폭력 피해도 부모님은 울며 어떡하냐는 말과 아무것도 모르겠고 가슴이 미어진다며 해결을 부탁해 내가 사방을 뛰어다니며 해결했다. 동생은 나에게 동생의 의미가 아닌 모성애, 내 삶의 순간 그 자체였다. 엄마 아빤 나의 그런 모성애를 자극하며 수없이 가스 라이팅을 했고, 약점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내가 싫다, 안 된다 등의 거부의사를 밝히면 꼭 동생을 들먹이며 원하는 것을 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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