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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셜리 Jun 24. 2022

순간이 평생 기억된다.





광주에서 시작된 새 출발의 신호탄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잘못됐다. 행복할 거라고 믿고 시작했는데 울 모녀에게 엄청난 고통이 되었다. 결혼하고 보니 아빤 지독하다 못해 심각한 불효자 중 효자였다. 남잔 결혼하면 갑자기 다 효자가 된다는데 아빠가 그 케이스에 해당됐으나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할머니 말이라면 그게 문제가 되어도 이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매 순간 자신의 부모가 우선이며 울 모녀에겐 아무런 존재가 되지 못해 순위가 매겨지지 않았다.


엄마는 나를 데리고 왔다, 결혼예물 없이 왔다는 이유로 결혼생활 시작부터 할머니의 공격을 받았다. 분명 연애 전 부모와의 맞선으로 연결된 인연이라 내 존재는 충분히 알고 계셨고 결혼하기 전 충분히 나와 인사를 했었다. 그때 모든 것이 괜찮다 하셨다. 인사하러 간 자리에 친한 척을 내게 하며 숨 막힐 정도로 세게 안으셨는데 나는 그게 왠지 싫고 불편했다. 안겼다기보단 그냥 조여 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다. 첫인상에서 새로운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느낌이 불쾌함을 참는 듯해 더 싫었다. 싫다 하여 모든 것이 진행된 결혼이 무너질 수 없어 아니 이제와 취소할 수 없는 상황이라 아무 말하지 않았다. 또 아이의 한 마디로 취소여부가 결정될 것도 아니었다.


재혼가정으로 시작된 광주 생활은 지독히도 싫었다. 모든 것을 되돌려 놓고 싶어 할 정도였다. 엄마는 한동안 광주 생활이 싫다며 놓아달라 혹은 이사 가자 등 어떤 방식으로도 표현했지만 통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 역시 괴로워하고 있었다. 첫 결혼생활은 신혼집이 당장 없어 짐을 이삿짐센터에 맡기고 난 새로운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지냈다.


결혼한 후 다시 만난 할아버지는 내 눈엔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서울살이 살림이 이삿짐에 맡겼다가 도저히 안 돼 새 할머니 집에 놓고 갔는데 그 짐 중 매니큐어를 찾아내 자신의 손에 정성스럽게 바르는 모습이 충격이었다. 그 작고 몇 개 되지 않는 걸 찾아 발랐다는 건 우리 살림을 엄청 뒤지고 또 훑어봤다는 말 밖엔 설명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진 날 싫어하는 내색을 많이 보였다. 유독 큰아빠와 할아버지는 한자에 집착하셨는데 나에게 한자를 모른다며 구박을 많이 하셨다. 어린이집에서 한글 공부도 싫어 도망 다닌 나에게 한자는 배웠을 리가 없다. 그래서 항상 한자 쓰기 시간이 되면 매를 맞거나 갈굼을 당했다. 내가 밥 먹는 것도 마음에 안 드신 건지 밥 먹을 때마다 불호령이 떨어져 고통스러웠다. 외할아버지랑 비슷하게 밥풀 싹싹 안 먹어서 혼났는데 그 결이 달랐다. 외할아버지는 그 혼내는 와중에도 애정을 느낄 수 있었는데 이 새로운 친할아버지는 애정 따위 느낄 수 없고 밥상에서 어떻게 앉고 젓가락질까지 그냥 전부 다 짜증 난 느낌이 강해 늘 풀이 죽어 있었다. 할머닌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시시콜콜 나에게 지적을 하셨고 나보단 나이가 같은 다른 손자에게 애정을 쏟으셨다. 그게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대충대충 대답하셨다. 본인들은 이 글을 보면 아니라고 하겠지만 어리고 예민한 성향을 갖고 있는 나는 다 알고 있었다. 티비도 내가 보고 싶은 건 전혀 보지 못 했고 항상 큰아빠의 자식들만 보고 싶은 것들을 봤다. 그들이 이누야샤를 보면 같이 봐야 했고 학교괴담을 보면 무서워도 참아야 했다. 심지어 놀이도 그들이 하자는 것들만 했다. 서울에서 엄마와 살 때랑 너무 달라서 괴롭지만 적응해야 했다. 어떻게든 적응해서 잘 지내고 싶었으니까.


몇 살 때 일어난 일인지 정확히 생각나지 않는데 큰아빠의 막내가 나랑 동갑인 남자아이다. 그 아인 유난히 이누야샤를 좋아해 퍽하면 자꾸 자기와 이누야샤 놀이를 하자고 했다. 이누야샤 놀이는 별다른 게 없다. 가영이라는 캐릭터처럼 ‘앉아’ 명령어를 하면 이누야샤를 따라 액션을 하는 놀이였다. 유명한 건 아니고 그냥 그 남자애가 만든 놀이로 생각이 된다. 그때 내가 여자라 가영이 역할을 자주 맡았다. 퍽하면 ‘앉아’ 명령을 수없이 반복했었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 걔가 화를 내며 너도 앉아봐!!! 이러더니 날 고무로 된 아령에 끌고 가다시피 해 있는 힘껏 날 내리 꽂혔다. 그렇게 앉으니 이상하게 생식기 부근이 너무 아파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트려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그러자 할머니는 차갑디 차가운 눈빛으로 그만 좀 울라고 다그쳤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생식기 부근이 아파 할머니한테 봐달라고 부탁해 보니 피로 팬티가 다 젖어 있어 나는 너무 놀라 다시 울었다. 또 운다며 경멸에 가까운 말투와 목소리로 말하자 다시 팬티를 내려 제대로 피를 보여드렸다. 나는 나에게 정말 큰일이 생긴 것 같아서 무서운데 그런 시선까지 신경 쓸 수 없었다. 피로 다 물든 팬티를 보고도 할머니는 별 거 아니라며 놀고 있으란 말과 함께 안방으로 사라졌다.


나중에 커서 성에 대해 배우면서 내 생각으론 남자애가 온 힘으로 나를 찍어내리는 듯 앉게 해 처녀막이 찢어져 팬티가 피로 다 젖은 것이다. 진짜 처녀막이 그런 건지 알 수 없다. 누구도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고 이 일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며 나의 부모는 이 사건을 전혀 모른다. 설령 알았다고 해도 별 일 아닌데 내가 격하게 반응했다 생각하고 말았을 것이다. 근데 이건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피해가 생긴 일이고 나는 피에 대해 무서워 우는데 아무렇지 않게 가버린 할머니를 절대 잊을 수 없었다. 누군가 놀다 다치면 어른이 나서서 중재를 하고 무서움에 떠는 아이에게 괜찮다고 다독여줘야 했었는데 전혀 그런 것들이 없었다.


광주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한 엄마는 시가에서 시도때도 없는 구박과 익숙하지 않는 환경 자체가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받는 듯 보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나에게 모든 것을 지적했고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외로움이 많고 혼자 보낸 시간이 많은 내게 혼잣말은 일종의 상상 친구와의 대화였다. 서울에서 살 땐 한 번도 크게 혼낸 적이 없었는데 어느 날부터 체벌을 하셨다. 방에 가둬두고 손 들고 서 있으라 하기도 했다. 단 둘이 있을 때 툭하면 ‘옥상에 올라가 뛰어내리자’, ‘같이 죽어버리자’ 등 말을 했었다. 신혼집은 방이 2개인 3층 집이다. 계단도 많고 높이 꽤 있었다. 강렬하게 기억하는 결혼 후 학대의 첫 시작은 ‘같이 죽자’, ‘옥상에 올라가서 너 먼저 던지고 나도 따라갈 거다’ 등의 언어폭력으로 점차 학대의 범위가 넓어졌다. 그게 결혼생활을 시작한 지 고작 3개월 내외.


나에겐 특별히 그날의 온도, 습도, 날씨, 느낌을 머리에 박아둔 것처럼 기억하는 날이 있다. 나는 어린이집도 그랬으나 유독 학교를 정말 싫어했다. 면역력이 약해 수시로 흘리는 콧물때문에 아이들이 또다시 더럽다, 싫다 등 조금씩 불편해하며 남들과 다른 애 취급을 할 때였다. 어느 때처럼 꾀병을 부리고 학교를 안 갔는데 엄마가 갑자기 눈동자가 휙 돌아 초점이 없이 주방으로 가서 잘 갈린 식칼을 들고 왔다. 그 눈빛은 지난 일임에도 내 앞에서 칼을 들고 다가오는 듯 선명하다. 천천히 식칼을 들고 엄마가 다가오자 화들짝 놀란 내가 주저앉아 울고 불고 해도 통하지 않았다.


무서워 도망치려 하자 엄마는 얼른 내 손을 낚아채 그 손목 위에 올리며 천천히 그으려 했고 난 자지러지게 울었다. 그 우는 순간의 느낀 봄 계절 속 온도와 습도, 날씨, 햇빛의 방향까지 모든 것을 기억한다. 자지러지게 울며 어떻게든 피하려 몸을 비틀어도 엄마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초점이 없는 눈이 계속됐다. 더 크게 울고 더 크게 반항하며 어떻게든 그 칼이 내 손목을 지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하자 천천히 엄마의 초점이 돌아왔고 그 후에 엄만 내 손목에서 식칼을 뺐다.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단지 그때 손목에 올리기 전과 올린 후의 공포, 시간이 어떻게 또 날씨는 어떠했나 마지막으로 결과적으로 엄마가 내 손목을 긋지 않았다 정도의 기억하는 것 말곤…, 아마 무의식 중에 기억을 지운 것 같다. 혹은 놀란 나머지 눈은 떠 있어도 의식이 없어진 것일 수 있다.


시간이 많이 지나 23살쯤 어느 병원의 정신과로 가도 치료되지 않고 악화되는   없는  고통에 괴로워하다 지인의 추천으로 대학병원에서 트라우마를 전공으로 다루는 교수님에게 치료를 받았다. 단순히 임상실험만!  생각이었으나 상태가 심해 약물치료를 같이 병행하면서 알게  것들이 있다. 극심한 트라우마로 해리장애가 진행됐단 사실을 발견해 알았다. 트라우마로 인한 해리장애를 집중 치료하는 과정  나의 내면에서 다른 인격들이 생기고 있다는  찾아냈다. 여러 인격의 이야기가 있었는데 가장 힘이  인격은 우중충하고 무서운 분위기를 내뿜으며 칼을 들고 있는 얼굴 없는 사람이었다. 교수님이 내게 성별을 알려달라 말씀하셨는데 얼굴이 보이지 않아 모른다고 대답했다.  인격은 유독   잡아먹어 안달이 났다. 꿈에서도 나타났고, 나에게 칼을 들고 손목을 긋는 모습을 보여주며 ‘너도 해봐~’ 유혹하기도 했었다. 뿐만 아니라  주변을 맴도는 느낌에 당장 내일엔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되면 버거워 우는  말곤   있는 것이 없었다. 나중엔 정신병원 폐쇄병동에 입원해 자는데 옆에 서서 가만히  쳐다보는 듯해 매일  고통의 연속이었다.  당시 치료할 적엔 영문을  몰랐는데 살다 보니  이렇게 글을 쓰고 보니  그게 힘이 가장 강한 인격인지, 어떠한 것으로 생겼는지  기억을 통해   있었다.



순간이 영원히 남는 기억이 또 있다.

1년에 4가지의 계절이 있다. 8살, 한 겨울이 찾아왔다. 한 겨울이 됐는데 날씨가 쨍쨍하고 눈이 올 생각을 안 한다. 나는 얼른 눈을 보고 싶은데 매일 구름 하나 없이 햇빛이 넘쳤다. 가만히 베란다로 통하는 창문에 걸쳐 앉아 대체 언제 눈이 올까, 어떻게 하면 눈이 내릴까 궁리하다 번뜩 생각한 건 내가 눈을 뿌리는 것이다. 8살, 3층에 살 때 엔틱 한 서랍장 안에 비타민 캔디가 있었다. 처음은 다들 하나씩 잘 챙겨 먹었는데 나중엔 그 캔디가 처박혀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 난 그걸 생각해 한 줄로 연결된 캔디를 다 뜯어 포도맛, 레몬맛 등 다양하게 준비했다. 누구도 안 먹고 보이는 곳에 처박힌 거니까. 다 한 개씩 뜯고 모아둔 캔디를 베란다에 나와


“눈이다~! 내가 눈을 만들어 내리고 있다~”


엉뚱한 생각으로 비타민 캔디를 사정없이 베란다 밖으로 던지고 또 던졌다. 한참을 ‘눈이야~, 와 눈 온다!’ 주문을 걸 듯 계속 외치며 던지자 앞 집에 사시는 할머니가 생뚱맞게 비타민 캔디를 맞으셨나 아무것도 몰랐던 엄마에게 항의를 해 엄마의 머리뿔이 크게 생겨 나에게 달려왔다.


“야!!! 비싼 건데 왜 던지고 난리야!! 할머니가 뭐라고 하셨잖아! 어?! 너, 가만 안 둬.”


이게 왜 잘못이지? 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 날 베란다에 두고 창문을 잠갔다. 뿐 아니라 가정집에서 쓰는 철조망처럼 생긴 사용된 잠금장치가 있었는데 그것도 해 자물쇠로 채워 이중 잠금으로 날 감금시켰다. 나는 엄마를 닮아 잔꾀가 많은 아이라 안방의 창문이 열려 있다면 언제든 넘어가는 얘라는 것을 알고 안방 창문까지 잠갔다.


“반성하고 있어!!! 알겠어?!?”


영하의 날씨였는데 내복 한 장, 위아래로 입고 베란다에 갇혔다. 갇혔을 땐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는 시간이고 햇빛도 강해서 그렇게 춥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환하게 있던 해가 저물어 저녁이 되자 쌀쌀해 조금씩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웅크려 앉았다. 죄송하다고, 잘못했으니 열어 달라 하면 되는데 그럴 수 없었다. 이유는 엄마가 날 베란다에 감금시켜놓고 놀러 갔기 때문이다.


이 글을 보는 모든 이들이 믿지 않겠지만 실제로 엄마는 날 그런 차림으로 베란다에 날 감금시켜놓고 놀러 갔다. 돌아온 시간은 대략 8시간이 흐른 후에. 날이 쨍쨍했는데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으나 캄캄해질 때 함박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더 추웠고 외로웠으며… 신기하기도 했다. 원하는 첫눈이 내가 던진 비타민 마법처럼 함박눈으로 내렸기 때문이다. 웅크렸던 자세를 풀고 손을 내밀어 차가운 눈을 느꼈다. 그렇게 한참을 보다 저 멀리 언덕에서 내려오는 엄마를 발견했고 입과 몸이 얼어 아무런 말을 못 한 채 서서 가만히 엄마가 오는 것을 바라봤다.


놀랍게도 엄마의 반응은 상상 이상의 이해하지 못할…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행동이다.


빠르게 달려온다거나 하지 않고 날 보며 그 자리에 멈춰 손을 번쩍 들고 한참을 흔들었다. 마치 아주 오랜 시간을 떨어져 지내다 만난 동창이 멀리서 오는 모습에 반가움을 참지 못 하고 반기는 것처럼 그렇게 있었다. 집에 돌아와 나에게 ‘나와’, 작은 명령으로 어떤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8시간이 지났단 사실은 내가 뻥 뚫린 밖과 통하는 베란다에서 얼어붙은 몸으로 집에 발 딛었을 때 시간을 보니 8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렇게 하루가 끝났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이 이야기에 대해 당연히 믿을 수 없겠지 또, 지금 생각하는 그냥 보통의 베란다에 둔 걸 거야 믿고 싶겠지만 내가 갇힌 베란다는 그냥 밖이다.

쉽게 비유로 이해가 되는 설명 하면 라푼젤이 성에 갇혀 밖을 볼 때 그 베란다, 세상과 통하는 창문이다. 물론 이 글을 쓰는 나도 이 비유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그때 살던 베란다가 집의 한 구조가 아닌 밖임을 설명하는데 이 설명만 떠오른다.



오가는 통로를 막으면 어떠한 것도 날 지켜주지 못하고, 꺼내 줄 수 없는 곳에 8시간 넘는 동안 내복 차림에 한참 동안 엄마를 기다린 아이.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으며 누구도 나서서 지켜주지 않았다. 온전히 혼자, 그 추위를 느끼며 누구라도 날 꺼내 주길 기다렸다.


엄만 결혼 후 한 번도 날 안아준 적이 없었고 따뜻한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난 서울에서 엄마를 사랑한 것보다 더 많이 사랑하고 엄마만 보며, 엄마의 마음을 누구보다 빨리 읽어 지켜주려 항상 애썼다. 내가 아픈 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했으며 엄마가 아프거나 울면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으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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