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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셜리 Jun 16. 2022

내가 사랑한 한 남자

외할아버와의 추억





서울에 살던 내가 가끔 고속버스를 타고 광주를 갈 일이 있었다. 적게는 한 달에 한두 번인가?

고속버스 타고 광주 갈 땐 늘 깜깜한 밤, 나는 창문 쪽에 앉았다. 지금은 없지만 어려서 멀미가 정말 심해 꼭 창가에 앉아야 했다. 5시간이 넘는 고된 길인데 광주 가는 버스가 마냥 힘들진 않았다. 엄마가 휴게소에서 편의점 오뎅을 데워 와 나를 먹여두고 잠재워준 기억이 있어서 그랬다. 그렇게 광주에 도착하면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셨다. 도착해 짐을 풀고 나면 엄마는 어린이집에서 배운 장기를 할아버지에게 보여주라고 했다. 엄마 앞에선 잘하던 재롱도 꼭 외할아버지 앞에서 시키면 그렇게 세상 부끄러울 수 없었다. 엄마는 어린이집에서 배운 것들을 해보라 시켰고 할아버지는 기대에 찬 반짝반짝함 눈으로 쳐다보셨다. 난 서서 몸만 베베 꼬는 것으로 모든 쑥스러움을 표현해 할아버지의 기대와 실망을 주곤 했다. 외할아버지 집은 새벽까지 티비가 켜져 있는 게 특징이다. 그래서 항상 할아버지랑 자려고 하면 깨곤 해, 나중엔 이모들이 지내는 방에서 잤다. 그 방은 신기한 조명이 있었는데 어떻게 하면 불그스름한 방 조명이 켜졌다. 난 그게 어찌나 궁금하고 신기해 보여 달라고 매번 이모들에게 떼를 썼다. 호기심도 많고 궁금한 건 더 많은 아이라 어떻게 켜지는 걸까 싶어 이것저것 눌러보고 했다. 나중엔 이모들이 내 호기심에 질려 “어~, 이거 이제 안 돼.”라고 거짓말을 하더라. 그럼 그게 왜 안 되는지 또 꼬치꼬치 캐물었다. 단 한 번을 넘어가는 법이 없다고 이모들이 질려했다.


나는 외할아버지를 아직도 기억한다. 지금은 돌아가신 지 20년이 되어 가지만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또, 어떤 거짓말을 나에게 자주 했는지 마지막으로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나만 영원히 간직하며 기억이 주는 보물이 있다.

그 누구도 나보다 사랑받은 손자, 손녀가 없고 나 빼곤 외할아버지를 기억하는 이가 없다.


외할아버지에겐 두 가지의 아이템이 있었다.

하나는 은빛에 가까운 회색 오토바이와 검은색 가죽재킷이다. 할아버지는 오토바이에 날 자주 태우고 동네를 돌아다니셨다. 나는 할아버지의 오토바이를 사랑했다. 내가 볼 수 있는 시야에서 더 높게, 더 넓게 볼 수 있고 늘 내 등 뒤엔 할아버지가 계셨다. 가끔은 친구를 만나도 날 데리고 내 예쁜 손녀라고 가서 자랑하셨다. 할아버지랑 그렇게 다닌 손자 손녀는 나 밖에 없다. 가끔은 엄마가 나 몰래 일하러 가면 엄마 따라간다고 울면서 맨발로 뛰어갈 땐 할아버지가 허리도 안 좋은데 날 업고 동네를 돌 때도 있었다고 한다. 외할머니가 어찌나 날 미워했는지 아직도 그 이야기가 나오면 어떻게 할아버지가 했고, 나는 할머니는 거부하는데 할아버지는 졸졸 따라다녔다는 과거를 술술 이야기하신다.  이때도 언제나 엄마는 나를 떼놓고 일을 가셨다. 펑펑 울면서 엄마를 태운 버스를 따라갔는데 엄마가 맨 뒷자리에서 손을 흔들어 주저앉아 오열을 했다. 하도 반복된 일상이라 할머니가 질린다는 듯 뚝! 하라며 화내셨다. 아침이 되면 엄마 따라간다며 세상 무너진 것처럼 울며 따라가려 했었다. 이렇게 매일 반복되니 엄마도 지치고 할아버지는 내가 안쓰럽고 할머니는 징글징글하신 상태였다. 어느 때처럼 엄마를 태운 버스를 울면서 쫓아가는데 할아버지가 한 가지 제안을 하셨다.


“울지 말고, 엄마한테 갈래? 할아버지가 오토바이 태워줄게! 할아버지랑 같이 엄마 따라가자.”


그 어린 시절엔 울다가도 ‘엄마’, ‘오토바이’ 단어만 들어도 뚝 그쳤다. 고갤 연신 끄덕이자 할아버지는 알겠다고 오토바이 꺼내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씀하시고 마당으로 들어가셨다. 그동안 할머니가 날 보고 계셨는데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으시며 “앵간히 해라, 너도” 잔소리하셨다. 조금 지나자 할아버지가 오토바이를 타고 나오셨는데 대체 어디서 출발하셨는지 알 수 없지만 굉장히 빠른 속도로 달리시며 “안녕~~~~!!” 손 흔들어, 내가 안 보일 때까지  저 멀리 사라지셨다. 할아버지는 엄마만 찾는 울보,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탈출하신 것이다. 나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판단하다가 거짓말에 속았다는 사실을 알고 그날 길거리에서 할아버지 때문에 더 더 크게 울었다.



할아버지의 두 번째 아이템은 가죽 재킷이다.


가죽재킷 하면 떠오르는 일상이 있다. 어릴 때 잠시 난 외가에서 지낸 적이 있는데 유일하게 할아버지와 리모컨으로 싸운 손녀가 ‘나’다 정말 유일무이해서 같이 살던 이모들이 놀랄 정도였다. 할아버지는 잠도 없다. 새벽 내내 티브이 보시고 아침엔 아침마당을 보셔야 했다. 어린 나한텐 아침마당이 세상에서 제일 지루하고 오랜 시간 동안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끝나긴 할까 싶을 정도로. 이 지루한 아침마당을 할아버지가 보고 있으면 당돌하게 내가 보고 싶은 투니버스를 틀어 자주 투닥거렸다. 할아버지는 왜 채널을 돌리냐 입장, 나는 나도 티비 보고 싶다! 입장이었다. 이 둘의 기싸움에 아무도 낄 수 없었다. 며칠을 밤낮 가리지 않고 투닥거리니 할아버지가 아침엔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오후엔 할아버지가 보는 것으로  딜을 걸었는데 시간적 계산을 해보니 내가 유리한 것 같아 성사되었다. 그렇게 약속을 하고 첫날부터 투닥거렸다. 아침인데! 할아버지가 계속 리모컨을 들고 아침마당을 보고 계셨다. 언제 리모컨을 내게 주나 기다리는데 리모컨을 들고 주무시기 시작하니 내가 우 씨! 하는 마음에 리모컨을 훽 뺐어서 투니버스를 틀고 한 5분 넘어갈 때쯤 할아버지는 눈을 감고


“할아버지 안 잔다~”


자는 줄 알고 돌린 건데, 손에서 리모컨을 뺏을 때도 눈 안 뜨는 할아버지가 계속 눈 감고 ‘나 안 자니까 채널 돌려놔’ 하니 화들짝 놀랐다. 남들은 아빠랑 이런 기억이 있다는데 난 아빠와 그런 적 없다. 할아버지랑 아침마다 그랬다. 반복된 일상이 되면 어느 날부턴 채널을 돌려놓으라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럼 보란 듯 할아버지가 돌아누워버렸다. 본인이 삐졌고 지금이라도 아침마당으로 채널을 돌리면 봐주겠다는 의미였다. 그렇다고 내가 돌렸을까? 아니다. 무시하고 계속 투니버스를 봤다. 무시당한 할아버지가 주섬주섬 일어나 분하다는 목소리로


“에잇, 저놈의 시키는 진짜….”


징글징글하다며 고갤 저어 주섬주섬 가죽재킷을 꺼내 입고 나가셨다. 그럼 난 내가 이겼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한 자리를 계속 지켰다. 할아버지가 가죽재킷을 입는 순간부터 그 안방은 나의 놀이터이자 자유시간이다. 더 이상 할아버지와 투닥거리지 않아도 되고 돌아눕던 말던 딱히 신경을 안 썼는데 아예 신경 쓸 일이 없다. 또, 할아버지 말곤 누구도 날 건드는 이가 없어 방에만 있지만 방에서 느끼는 자유가 달콤했다. 매일 그렇게 할아버지랑 다투고 투닥거리다 져주시곤 밖에서 나가 놀다 정말 딱 4시 반이 되면 돌아오셨다. 어린 마음에 그런 할아버지를 볼 때마다 몸이 시계인가 아님 시계를 삼켜 몸에서 알람이 울려? 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들어오자마자 하는 말은 항상 똑같았다. 굉장히 신난 목소리로 “이제 비켜! 내 시간이야!”하시며 가죽재킷을 벗으셨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네..’ 비켰다. 그냥 그 안방을 나왔다. 내가 아침에 할아버지의 아침마당을 뺏어 기뻐한 것처럼 할아버지는 4시 반이 되면 들어와 비켜! 하고 내가 시무룩해 자리를 피하는 순간을 즐겼다.


그러나 이 시간을 나도 즐겼다. 매일 4시 30분이 다 될 때마다 안경 이모(유일하게 안경 쓴 이모여서 우리가 안경 이모라 불렀다.)는 “어머~, 할아버지 올 시간 다 됐네~ 이제 비켜야겠네~” 놀리기도 하셨는데 정말 오늘도 또 같은 시간에 오실까? 맞춰봐야지 하며 즐겼다. 아주 적은 확률이나 가끔 5시 넘어서 오실 때가 있었다. 그럼 왠지 모르게 더 초초했다. 걱정이 돼서 라기 보단 그냥 그대로 더 많이 볼 수 있는데 당장이라도 할아버지가 온다면 비켜야 하니까. 시간적으로 계산했을 때 내가 유리하다 생각한 이유가 따로 있다. 알 수는 없지만 밤 9시가 넘으면 할아버지는 또 가죽재킷을 꺼내 외출하셨다. 그때만을 항상 기다렸다.

그저 그때 난 조금이라도 더 티비를 보는 거 말곤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자야 할 시간까지 버려가며 할아버지가 없는 틈을 타 투니버스를 보고 대문 쪽에서 들리는 도착한 기척 느끼면 아무 일도 없는 척 이모 방에 들어가 잤다. 이런 기억은 나에게 언제나 떠올려도 똑같이 너무나 큰 행복을 준다. 아빠와 리모컨 싸움, 그 흔한 “안 잔다.” 이 것을 할아버지와 했다는 건 지금까지 또한 앞으로도 외가 그 어떤 사람도 믿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모두에게 다 호랑이보다 무서운 사람이라서.


내가 할아버지랑 투닥거린 일을 이모들이나 삼촌 그리고 사촌들도 믿지 않듯 나는 그들이 말하는 무서운 할아버지에 대해 믿지 않는다. 나에겐 정말 친구, 아빠처럼 있어주셨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신 동안 외가에 있는 그 누구도 날 건들지 못했다. 내 삶의 방패이자 보호자 그 이상의 의미로 더 크고 사랑했던 존재였다.



할아버지는 신 것을 안 좋아졌다. 이모들이 제 아무리 권유를 해도 먹어보지 않고 “셔.”

안 먹어보고 신 것 같으니 안 먹겠다 투정하는 할아버지 모습을 기억해보면 정말 귀여우셨다. 귤이나 오렌지 등 단 과일도 무조건 “셔, 안 먹어.” 하는 게 특기였다. 하다못해 방울토마토, 포도까지도 거부하셨다. 매일 권유하는 이모들도 대단하지만 끝까지 고집하는 할아버지는 더 대단했다. 계속되는 실랑이에 조용히 과일을 먹는 나에게 시선이 왔다. 할아버지가 날 보고


“쟤가 먹어보고 말해준 걸로 판단할게.”


에잇! 나한테 또 떠넘긴다. 부담스럽게 이모들과 엄마는 나에게 과일을 까주며 복화술로 말 잘해야 한다고 압박을 줘 억지웃음을 살살 짓고 한 입에 먹었다. 그러니 다들 내 입모양만 뚫어지도록 보더라. 어린이가 맛 표현을 뭐 얼마나 할 수 있겠나. 그냥 어디 동요에서 배운 새콤달콤 단어만 알아서 “새콤달콤해!” 그 새콤달콤은 맛있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말하면 맛있다는 말로 통할 줄 알았다. 달달하다는 말을 모르니까 대충 알겠지 싶어서.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첫 번째, 할아버지.

굉장히 승리감에 찬 얼굴과 기쁨으로 단호하게 하신 말씀.

거봐, 내 이럴 줄 알았다. 봐, 안 먹어.


두 번째, 엄마와 이모들

야! 그렇게 말하면 어떡하냐?! 너 때문에 할아버지 안 드신다잖아.


고갤 갸우뚱했다. 맛있는데? 할아버지가 안 먹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싶었다.

과일에 대한 기억은 이쯤에서 끝난다. 할아버지가 유일하게 나를 양보하지 않았던 ‘밥’ 이야기. 할아버지는 밥 남기는 행동을 극도로 싫어하셨다. 그래서 다른 땐 친구처럼 편하다가도 밥, 쌀 한 톨이라도 남길 시 노발대발을 하셨다. 할아버지가 살던 시절은 살 한 톨도 귀해 밥그릇을 박박 긁어먹어야 했는데 그게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어 밥을 깨끗이 먹지 않으면 그게 ‘나’여도 엄청 무섭게 화내셨다. 평소에도 말 한 번 건네지 못할 만큼 무서워하는데 밥에 예민한 할아버지가 다들 편식이 정말 심한 사촌들을 보면 극대노를 해 기피하는 사람이 많아서 할머니와 엄마, 이모들은 밥을 여러 차례 준비했다. 할아버지만 따로 드시고 그 후에 우리가 먹는 것으로 말이다. 나는 따로 준비한 밥상에서 사촌들과 밥 먹을 때도 있지만 주로 할아버지와 밥을 먹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가진 식사예절이 마음에 안 들어 매번 혼을 내시며 지적하셨다.


“밥은 남기지 말고 딱딱 깨끗하게 어? 긁어서 다 먹어야지! 왜 남겨!”


노발대발하시는 할아버지를 순수한 표정으로 보며 대꾸한 말이 기억난다.


“아니야, 밥 다 먹었어요!”


할아버지 눈엔 그릇에 남은 두 세알의 흔적이 싫은 거고 난 있던 밥을 다 먹었으니 안 먹어도 된다 입장이었다. 평소엔 한두 번 이렇게 하면 져주시긴 했는데 밥만큼은 정말 훗날 지나서도 몇 년을 지적하셨다. 지적해도 난  ‘밥 먹었고 더 이상 먹을 것도 없다.’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또 할아버지는 등을 보이며 ‘그래, 너 알아서 해라, 해’로 끝이 났다.



내 삶에서 할아버지를 절대 빼놓을 수 없지만 할아버지의 거짓말은 더더욱 빼놓을 수 없다. 앞서 말한 적이 있는데 나는 엄마랑 어디든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이였다. 껌딱지도 이런 껌딱지가 없다. 그런데 나한테 엄마한테 가자 거짓말을 해놓고 맨날 오토바이 타고 지나가며 나에게 인사하면서 도망갈 때마다 원통했다. 발을 동동 구르고 길바닥에 누워 이리저리 뒹굴거려도 떠난 할아버지와 오토바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화 다 풀린 것 같다 생각이 들면 혹은 지쳤을 때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나타나셨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거짓말은 엄마가 결혼식을 한 후.


결혼식 때도 난 엄마의 딸로 그 자리에 있지 못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안경 이모가 날 몸이나 두 팔을 붙잡고 있었고 누가 나에 대해 물어보면 정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친척의 조카 혹은 잠시 누가 맡아달라고 하며 핑계로 마무리했다. 또한 결혼식 끝의 가족들을 찍는 시간에도 날 붙잡고 있느라 이모는 가족사진을 못 찍었다. 오라고 해도 안 된다며 거절했다. 그때 난 그런 상황에서 모든 걸 느꼈다. 엄마의 결혼엔 내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있어도 어쩔 수 없이 결혼식에 왔지만 안 되는 존재로 조용해야 한다는 것. 아는 만큼 조용히 있었다. 사실 그때 나는 정말 슬프기도 했다. 엄마한테 그 짧은 순간에 있어선 안 되는 존재라는 사실은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난 후에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 역시 나중에 꼭 이야기할 내용이다.


아무튼 붙잡힌 상태로 구석에서 엄마의 결혼식을 보고 엄마에게 달라붙으려 했다. 껌딱지는 언제나 껌딱지. 그런 날 말린 건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에겐 ‘나’도 중요하지만 엄마는 더 중요했을 것이다. 결혼식 끝나고 엄마에게 아는 척을 한다거나 신부대기실에서 사진을 찍는 것도 안 됐다. 어떤 인사도 할 수 없이 외가로 돌아왔다. 당연히 내가 외가에 있으니 엄마가 한 번쯤은 올 줄 알고 있었다. 엄마랑 산 시간이 있는데 그거 하나 모를까. 계속 거실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기다렸다. 한참으로 그렇게 기다리니까 할아버지와 안경 이모가 회의를 하는 모습이 안방의 문틈 사이로 잠깐 보였지만 엄마를 기다리는 게 나한테 가장 먼저였다. 한참 후 안방에서 할아버지가 불렀는데 내가 계속 대답 없이 거실을 뱅뱅 돌자 안방에 나와 엄마가 올 수 없는 상황이 있는데 딱 4번 밤만 자면 된다며 같이 기다리자고 했다. 4번의 밤이 지나야 엄마를 볼 수 있다니 서러워서 울고 또 우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그 순간 엄마라는 걸 알고 뚝 그친 후 할아버지와 안경 이모에게 달려가 “엄마 맞지? 엄마잖아, 다 알아!!!” 나에게 전화기 주라고 고집을 부렸지만 가차 없이 자기들만 통화하고 전화를 끊었다. 엄마 목소리도 들렸는데 엄마가 아니라고 계속 거짓말하는 모습을 보니 또 울었다. 그렇게 터진 눈물에 울고 또 울었는데 그날만큼은 달래주지도 어떤 반응도 하지 않고 할아버지는 단호하게 내버려 뒀다. 그렇게 밤 7시가 넘고 8시가 넘어갈 때 엄마는 내 예상 그대로 외가에 왔다. 그러나 엄마는 엄마가 아닌 척을 했다.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근처 슈퍼 앞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엄마를 만나고 다시 돌아오면 나를 잡고 있던 안경 이모가 엄마를 만나러 갔다. 그때 그 누구도 엄마를 만나러 간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무언가 사 온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엄마가 왔다는 걸 눈치 안 채는 건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란 사실을 어른들은 몰랐다. 엄마의 냄새도 났고 일단 차례로 나갔다가 사 온다고 해놓고 아무것도 안 들고 왔다. 안경 이모가 엄마 만나러 가자 할아버지한테 쪼르르 가 “엄마 왔지? 그렇지? 다 알아, 그러니까 엄마한테 가자 응?” 이젠 애원을 했다. 하루 종일 엄마 곁에 있지도 엄마의 결혼식 사진에 찍히지도 못했다. 지금도 결혼식 사진부터 비디오까지 보면 나는 없다. 없어야 했던 존재였으니까. 안경 이모 돌아오자 이번엔 안경 이모한테 가서 닦달을 했다. 아니라고 끝까지 말하고 날 방으로 보냈는데 한참을 울다 그 잠깐 나온 사이에 안방에서 흘러나온 말은 “쟤, 왜 이렇게 눈치가 빨라? 힘들다, 힘들어.” 분명 안경 이모와 할아버지의 대화였다. 아이에게 거짓말을 할 거라면 완벽하고 분명하게 해야 하고 차라리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게 낫다. 거짓말보단 그냥 사실 그대로 이야기하고 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인지 납득이 되게 설명을 충분히 해준다면 되는 거다. 거짓말로 순간을 피하려는 의도조차 아이는 다 알고 있다. 내가 결혼식에서 어떤 존재여야 했는지 아무도 말 안 했는데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용히 있었다. 평소 같으면 엄마에게 달려가 생떼를 부렸을 텐데 엄마가 한 이 결혼식이 어떤 의미인지 느낄 수 있었고 내가 왜 그렇게 구석에서 이모 손에 잡혀 있었는지 다 알아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4번의 밤을 이야기했지만 매일 거실에서 엄마를 한참 기다렸다. 매일 그렇게 기다리는 일이 나에겐 너무 슬프고 고통스러웠다. 4일의 밤이 지나 5일째 되는 날도 소식이 없었다. 모레가 지난 후 엄마는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일주일 가까이 기다려 겨우 엄마를 만날 수 있었다. 시간이 제일 안 갔던 순간이며 마음이 뭉개지는 느낌이 무엇인지 느껴 엄마를 보지 못한 그 7일이란 시간에 거실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것으로 위로 삼으려 했었다. 당장이라도 엄마가 온다면 내가 먼저 마중 나가기 위해.


할아버지가 한 거짓말했지만 그거에 대해서 미워한 적은 없다. 나한테 엄마 따라 가자 약속한 뒤 오토바이로 도망가도 그랬고, 만난 엄마를 아니라 해도 역시 그렇다. 지금의 난 할아버지가 한 거짓말이 내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누구에도 무섭게 하신 할아버지가 유일하게 날 더 많이 사랑했음을 돌아가신 순간까지 알려주셨다. 할아버지가 더 오래 살 수 있었음에도 그렇지 못한 것은 여러 요인이 있다. 처음 화장실에 미끄러져 다치신 후 모두가 할아버지 보살핌에 대한 책임을 떠넘길 때 엄마를 포함한 외가 식구들은 요양원에 보냈는데, 당시 요양원에 대한 정보가 많이 없어 엄만 어떻게든 자신의 아빠를 집에 모셔 지켜드리고 싶어 하셨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해결되지 않는 가정환경과 형편에 눈물로 보냈고 가끔 찾아갈 때도 눈물로 자신의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셨다. 할아버진 괜찮다며 이해한다는 듯 웃어 주거나 혹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요양원에 들어가신 이후로 급격하게 할아버지의 상태가 안 좋았다. 시간이 흘러 요양원에서 더 이상 어렵다는 말을 들은 외가 식구는 엄마의 간곡한 부탁에 원래 살고 계신 집으로 모셨다. 침을 삼킬 수 없어 기도가 막힐 수 있어 목에 호수를 연결해야 했으며 대소변을 기저귀로 받아서 시간마다 바꿔드렸다. 누구보다 무서운 할아버지는 그렇게 힘 없이 병상에 누워 1~2년을 넘기지 못하시고 우리 곁을 떠나셨다. 사실 그때 내 나이는 10살에 불가했다. 그래서 얼마나 더 계셨는지에 대해 정확히 기억은 못 한다. 할아버지가 요양원에 나오면서 케어를 집중적으로 하기 위해 나는 타의적으로 그 근처 학교로 전학 갔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돌아간 시점은 긴팔을 입는 계절로 기억한다. 가족들이 하던 일을 그만 둘 정도로 케어에 전념했지만 상태가 극도로 나빠져 병원으로 이송된 후 내가 다시 전학을 원래 학교로 오고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말을 잘 못하셨는데 유일하게 대화가 됐던 사람은 엄마. 누구도 할아버지가 하는 옹알이에 듣지 못해 엄마를 불러 필요한 걸 해결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시간이 지나면서 기력을 계속 잃었고 그 순간, 순간 할아버지는 자신이 곧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걸 아셨을 거란 생각이 든다. 왜냐면 엄마 말곤 아무와도 얘기하지 않던 할아버지가 근처에 있는 날 불렀다. 슬프게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 그때 그 말에 대해 엄마에게 말하지 않으신 것 같았다. 그냥, 나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 있었고 온 힘을 다 해 날 불러 이야기해주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정도로만…. 감정만 조금 전달받은 것 같다. 10살, 초등학교 3학년 때 그렇게 난 가장 친하고 사랑한 친구이자 나의 멋진 남자가 떠나갔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임종도 볼 수 없었고 장례식도 갈 수 없었다. 그래서 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거에 대해 아니 ‘죽음’이 준 이별의 슬픔을 직감한 적이 없었다.

철없게도 학원이 가기 싫어 할아버지 장례가 있다는 말로 학원을 빠졌다. 아직도 난 할아버지 핑계를 하며 빠진 그날을 기억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매일 항상 내 옆을 지켜줄 것 같던 할아버지가 안 보인다, 이젠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라는 사실을 인지한 후에 후회도 하지만 항상 그립다. 애틋했고 아직도 할아버지와 있던 일을 기억하며 웃곤 한다.


할아버지가 돌아간 직후 모두들 패닉에 빠져 살았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옷부터 모든 것들을 어떻게든 갖고 있으려 했으며 이모들과 삼촌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 감정싸움을 했었다. 엄마는 한 5년 가까이를 자신에게 원망하며 살았다. 자신이 모시지 않았다는 그 사실에 죄책감을 갖고 말이다.


우리 할아버지는 정말 멋있는 분이다. 돌아가시는 순간에 유언을 몇 가지 남기셨는데 첫 번째가 제사를 하지 마라는 것이다. 그 유언이 가장 크고 중요한 유언이었다. 안 그래도 슬플 텐데 제사할 때마다 울지 말고 가족들 다 모여 맛있는 밥 한 끼 두둑이 챙겨서 먹고 이야기도 도란도란 나누고 하라고 하셨다. 그 유언으로 할아버지 제사는 10년 넘도록 잔치상을 차렸다. 그 슬픔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상에 올라온 음식들은 화려하고 만들기도 힘든 것들만 있었다.

기일인데도 다들 안부를 묻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게 당연했고 그래서 더더 나는 늦게, 나중에서야 할아버지의 부재를 온몸으로 느끼게 됐다.


본인의 자식이라도 누가 됐던 날 괴롭히거나 하면 참지 않으신 우리 할아버지, 밥풀 깨끗이 안 먹어서 화내는 할아버진 결말은 언제나 부드럽고 상냥하셨다. 할아버지는 나의 든든한 힘이고 내 삶에 존재만으로도 웃게 해주는 사람이다. 항상 장난기 넘치고 때론 말을 안 들어도 ‘나’ 자체를 아꼈으며 사랑해주셨다. 뜨문뜨문 내가 호기심에 위험하게 놀았을 때 빼곤 크게 혼낸 적이 없다. 결국은 늘 날 위해 백기를 들어준 것이 내가 여태 살아간 동안 괴로울 때마다 꺼낸 기억으로 버텨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보고 싶어,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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