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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몰랑맘 Oct 03. 2024

슈퍼소닉

0.8 배속도 괜찮아

처음 안무 동작을 배우고, 춤을 맞춰볼 때는 원곡 빠르기의 0.7 배속 즈음에서 시작한다.  엉거주춤  0.7 배속도 겨우 따라가다가 점차 익숙해지면 제 속도로 맞춰보기 시작한다. 분명 다 익혔다고 생각했던 동작이 1배속에서 무너진다. 움직여야 하는 쪽보다 움직이지 말아야 하는 쪽을 제어하기가 어려워진다. 한 마디로 오른팔을 휘젓는 동작을 하는 것보다 왼 팔을 허리 위에 가만히 올려놓는 게 더 힘들어진다는 얘기다. 갑자기 빨라진 리듬에 당황한 나머지 멈춰 있어야 할 아이들이 움찔거리며 헛손질, 헛발질을 해댄다. 1배속에 익숙해지려면 수업시간 외에 개인 연습시간이 꼭 필요한 이유다.

 

1년 동안 이런 과정을 겪다 보니 어떤 날부턴가 느린 속도보다 제 속도로 했을 때 오히려 더 편하게 춰지는 느낌을 받았다. 드디어 내가 리듬을 좀 타기 시작한 것이다. 빠른 비트에 맞춰 강약 조절을 하다 보면 동작에 오류는 조금 있을지언정 느낌 살리기는 훨씬 수월하다. 늘어지다 튕기고, 쪼이고 하는 포인트들을 그때그때 탁탁 쳐낼대의 희열이란! 동작 외우기에 급급해  머릿속이 복잡했던 지난날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이다.




슈퍼소닉을 만나고 알았다. 제 속도도 속도 나름인 것을. '초음속'이라는 뜻의 '슈퍼소닉'답게 엄청난 속도로 흘러가는 곡이다. 첫 안무를 배우던 날 힘겹게 손동작을 해내고, 턴에 다리까지 올리며 골반을 트는데 이 모든 동작이 5초 안에 이뤄지니 말 다했다. 그래도 이 곡을 부른 주인공 프로미스 나인의 어여쁜 멤버들은 미소를 잃지 않는다. 곡 정보를 찾아보니 이 곡은 찌는 여름의 더위 속에서 빠르게 달려가 팬들을 구해주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한다. 가사의 도입부를 보면 이렇다.


"You 이른 아침 해는 너무

뜨겁고 짜증만 타올라

적셔도 계속 목이 타지

그땐 불러봐 I'll be right there from now

911 Calling calling"


무식하게 춤만 따라 하는 40대 아줌마에게는 큰 감흥이 없지만, 팬들의 입장에서는 이 얼마나 설레고, 흥분되는 일이겠는가. 가만있어도 땀이 줄줄 새어 나오던 날씨에 부르기만 하면 달려가겠다니. 특히 더웠던 올여름, 이 노래가 인기를 얻을만했다. 솔직히 내가 춤을 배우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노래였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뒤이어 '슈퍼소닉'이 반복되는 후렴구에서는 동작이 어렵지는 않지만, 빠르게 하려니 정리가 안된다. 꼭 빠르게 달려가 구해야 할까. 이 더위에 빠르게 달려가다가 우리 예쁜 프로미스 나인 아이들이 먼저 지치진 않을까. 염려가 되는 구간이지만, 영상 속 그녀들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 손쉽게 동작들을 해낸다.




0.8 배속 정도의 속도가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리듬을 타기에도 늘어지지 않고, 정확하게 골반을 흔드는 동작을 해낼 수 있는 정도의 빠르기다. 처음부터 1배속으로 배우면 더 빠르고, 재밌게 춤을 배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오만함이 부끄러웠다.


0.8배속. 아니 그것도 너무 빨랐다. 처음으로 부엌에 섰던 때가 떠오른다. 지금이야 빠르게 밥을 올리고, 국을 끓이면서 반찬 2개쯤은 30분 내에 너끈히 해내지만, 예전엔 주섬주섬 냉장고에서 식재료를 확인하는 것부터 재료 손질과 칼질에 이미 기를 다 빨리고, 국 하나를 겨우 끓여냈다. 동시에 다른 반찬을 해낼 여유 따위는 없었다. 30분이면 해낼 수 있는 요리를 그때는 1시간이 넘게 서 있어도 영 결과물이 어설펐다.


지금 쓰는 글도 마찬가지다. 마음을 먹고 앉아서 키보드를 두드리기까지는 여전히 시간이 걸리지만, 일단 앉아 쓰다 보면 써지기는 한다. 평소에 생각했던 글감들을 떠올려 하나하나 적어보기라도 한다. 매일 쓰는 작가님들의 0.5배속일지라도 말이다. 처음엔 어땠겠는가. 앉는 것도 힘들었지만, 도저히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고민만 하다 일어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다 미루는 것이다. 그렇게 일주일, 한 달이 흐르고, 점점 글과는 어색한 사이가 돼버린다.


내가 처음부터 욕심을 내 30분 안에 요리를 하겠다고 덤볐으면 어땠을까. 피를 봤을 수도 있다. 처음부터  빨리 쓰려고만 했으면 어땠을까. 의지대로 써지지 않는 글에 질려 지금은 쓰지 않는 사람이 됐을 수도 있다. 산을 오를 때도, 달리기를 할 때도 내 속도대로 움직여야 목표지점에 도달할 수 있다. 0.5배속이든 0.8배속이든 내 속도를 존중하자. 빨리 보단 꾸준히를 택하자.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꾸준히가 빨리를 이긴다는 것을 체감한다. 빨리 걷고, 빨리 뛰고, 선행을 하는 주변 아이들을 보면 불안했다. 그래서 나도 아이 손을 잡고 그들의 속도에 맞춰 뛰었었다. 남들 다 하는 거라고. 안 하면 뒤쳐진다고. 헐떡이는 아이를 보지 못하고, 답답한 마음을 쏟아내기 바빴다. 그러다 어느 날 숨을 몰아쉬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그래도 엄마 손을 잡고 뛰어보겠다고,  그 작은 고사리손을 빼지 않던 아이가 보였다. 그때가 고작 여덟 살이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 너무하기도 했다. 처음부터 1배속으로 음악을 틀어놓고 따라 추라고 한 꼴이다. 아이의 속도대로 꾸준히 해 온 지금이 되려 낫다. 결과야 아직 모르지만, 아이의 표정이 밝으니 그걸로 되었다.


수 십, 수 백번을 반복해야 겨우 30초 남짓의 동작이 외워진다. 그것도 곡에 따라서는 슈퍼소닉처럼 0.8배속도 버거울 때가 있다. 어쨌든 반복하다 보니 1배속도 어렵지 않게 바로 적응하고, 영상까지 무사히 촬영을 마쳤다. 프로미스나인의 미소까진 못따라가도 꽤 여유롭게 출 수 있었다. 욕심부리지 말자. 0.8배속도 괜찮다. 어차피 다 하게 된다. 1배속, 아니 1.2배속 까지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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