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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분카레 Nov 11. 2023

내 영어는 초급이 아니야!

“혼자 영어공부 하다가 번번이 포기하시는 분 오세요.

초급수준보다는 높고, 중급수준까지는 안 되는 단계입니다.“


처음 영어스터디 멤버를 모집할 때 썼던 웹 광고의 문구이다. 주선자인 나의 실력에 맞춰 대상자를 모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초급이라 하기에는 약간 높고, 중급이라기엔 애매한 그 어디매인줄 알았다. 확실한 착각이었다. 회화 시작의 정석인 자기소개는 문법책 앞부분만큼 너덜너덜 낡은 경험이다. 그럼에도 상상이상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순 배열의 기본 원칙은 단지 아는 것일 뿐이고 목적어 자리에 있어야 할 단어가 자꾸 먼저 튀어 나왔다. 우리말 습성에 사로잡혀 말도 안 되는 콩글리쉬를 만들어 냈다. 영어와 안면을 트고 혼자 공부한 기간으로 산술하면 중급 이상 수준이겠지만 막상 펼쳐 보니 걸음마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운 좋게도 창단 멤버 구성이 환상에 가까웠다. 이건 순전히 내 입장에서 그랬다는 뜻이지 다른 분들의 입장은 달랐을지 모른다. 내 입장을 강조한 이유는 모두가 나보다 나은 수준을 지참하고 왔기 때문이다. 언어 배울 때 나보다 실력이 나은 사람들 틈에 낀다는 건 행운이다. 모두가 영어화화에 대한 니즈가 확실해서 분위기가 좋았다. 수준급의 실력을 선보이시는 미라님은 몇 년 간 일본 거주 경험이 있다. 아이들이 국제학교를 다닌 덕에 학교와 소통을 위해서 생존영어를 익히신 분이었다. 써니님은 초등과 유치원생 아이를 둔 엄마이다. 아이들에게 영어에 대해 강박증 대물림을 피하고 싶다며 수 년 내로 캐나다 어학연수를 계획 중이라고 했다. 소아과 의사인 파파님은 아이들을 위해 일주일 중 이틀만 일을 하고 있어서 참여가 가능했다. 해외의료봉사활동을 위해 영어 공부가 필수라 하셨다.  


모임에는 멤버를 상시 모집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초기 멤버를 넘어서 인원이 많아졌다. 지속적으로 문을 두드려 오고 있고, 몇몇 분들은 완전 초급반을 개설해 달라는 문의를 해 왔다. 지속 가능성과 확대을 고려한다면 분반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분반을 고려중이라는 공고를 몇 주 전부터 냈다. 새로 개설되는 반은 확실한 초급으로 명시를 했다. 이왕 분반 하는 김에 진행 중인 반에서 말이 잘 안 되는 분들을 신설반으로 보낼까 하는 궁리를 했었다.  


콕 찍어서 말은 못하고 에둘러 말을 꺼냈다. 내 마음 속에는 대상자가 분명하지만 상처가 될까 조심스러웠다. 세 분 중 한 분은 확실한 초급이라 선택에 있어 큰 고민은 없어 보인다. 두 분이 고려대상인데, 두 분은 매우 열정적이다. 문법은 실력급인데 비해 회화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말을 할 때 문법으로 하는 것이 아니니 난감할 따름이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초급반은 좀 그렇죠!”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학원처럼 레벨테스트를 받는 것도 아니니 강요할 수 없었다.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 이외에는 별 수가 없다. 그래 본인이 불편함 없이 하겠다는데, 당연히 존중해 줘야지라며 남은 말은 속으로 삼켰다. 


나와 실력 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들 속에 있다 보면 함정에 빠지기 쉽다. 반은 알아듣고 반을 못 알아듣는데도 불구하고 어느새 멤버들의 실력을 자신의 실력으로 착각할 수가 있다. 다행히 멤버가 몇 명이 안 될 때는 그나마 말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도 하지만, 말할 사람들이 많아지면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어야 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우리는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본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자신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일에 서툴다. 누가 봐도 회화실력이 초급인데 자신은 초급일리 없다고 강하게 부정하는 사람들이 나를 포함해 종종 있다. 그 마음가짐은 충분히 알고 있다. 예습복습을 철저히 하고 단어공부도 열심히 해서 옆 사람 실력을 따라잡으리라는 호기로운 마음도 가치 높게 평가해야 된다는 것을 안다. 


살아오면서 우리는 많은 레벨 나누기를 경험했다. 그럴 때마다 높은 레벨에 배정되기를 희망해 왔다. 특히 아이들을 기를 때의 경험은 강력하다. 학원을 가거나 바꾸기 위해서 반드시 레벨 테스트 과정을 거쳤다. 아이 실력을 생각하기 앞서 높은 레벨을 꿈꾸었다. 아이가 기죽을까하는 생각 전에 잘하는 반에 배정받기를 원했다. 지나고 나서야 그런 일들이 별 의미 없었다는 것을 깨닫지만 여전히 레벨에 집착한다. 깨달음을 느끼는 족족 행동을 바꾸었더라면 이미 경지에 올라 열반이 되지 않았겠냐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어쩜 다행이다. 여전히 인간 세상에서 중생으로 살아갈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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