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이야기
다시 태백산맥을 읽고 있습니다. 처음 이 책을 읽었던 1990년대 초반과 비교해 2025년의 시대상황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인 1948년과 더 닮아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첫 번째는 우리의 아픈 역사를 읽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언제든 현실에서 재현 가능한 개연성 있는 사실을 읽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1948년, 중국의 공산화와 함께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냉전시대의 시작 그리고 1950년대 초반 미국의 사상적 마녀사냥이라 할 수 있는 맥카니즘으로 이어지는 시기의 초입에 우리나라가 있었습니다. 한해 전 시작된 제주 4.3과 이 소설의 모티브가 되는 여순반란 사건으로 인해 좌우가 죽창을 들고 대립하는 격한 시기였습니다. 어쩌면 좌우가 아니라 일제에 부역하며 기득권을 누려온 세력과 가난을 숙명처럼 지고 살아온 무산계급 간의 갈등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념은 그저 명분이거나 도구였을 뿐.
20세기 유럽, 지식인과 양심세력은 좌파이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답니다. 우파의 정책을 지지하면 무식하거나 수구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를 ‘우파 콤플렉스’라고 합니다. 그러나 20세기 말에 들어서면서 좌우의 구분이, 선악의 기준이 모호해지고 더 이상 자신의 성향이 혹은 선택이 우파이어도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게 됩니다. 우파 콤플렉스 보다 오히려 레드 콤플렉스가 시대의 화두가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세대는 선악이 분명한 시절을 살았습니다. 민주와 반민주, 정치적 정체성을 설정하는데 어떤 고민도 없었지요. 적어도 대학 내에서는 이견이 없었습니다.
2010년, 대학가에 전국적 우파조직이 결성된 일이 있었습니다. 2018년, 20~30대 보수지향의 젊은이들이 보수정당 창당을 준비하고 있다는 기사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2025년, 탄핵으로 대학가가 극단적, 폭력적으로 대치하는 영상을 보며 또 다른 의미에서 격세지감을 실감합니다.
당연히 민주와 반민주로 옳고 그름을 재단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지금의 대학엔 지금의 가치가 있고, 당대의 셈법이 있다는 것 인정합니다. 사고의 다양화가 더 유효한 진화라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렇더라도, 백번 천번 양보하더라도 윤석열은 아니지 않습니까? 계엄령 어느 한구석에라도 국가가, 국민이 있었는지, 탄핵 이후 그의 언행 중 어느 한구석에라도 국가와 국민이 있었는지.
푸틴, 시진핑, 트럼프 그리고 윤석열. 인류가 다시 바른 곳에 이르면 이 시기를 문명사의 암흑기로 기록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