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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킴 Apr 24. 2023

번외 #1

관찰

잠이 오질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윗침대 — 나는 이층침대의 아래층을 쓴다 — 매트리스를 받쳐주는 스프링의 삐져나온 끄트머리에, 도무지 쓸 일이 없을 것만 같았던 손전등을 살짝 걸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생산적인 일을 하기엔 밝기가 역부족이지만, 어둠을 힘겹게 몰아내고 겨우 내 시야만큼만을 밝혀주는 LED 불빛이 어쩐지 편안하다. 아까 낮에 면상을 태울 기세로 내리쬐던 햇살과 꽤 대비된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에 선선한 바람이 부는 캘리포니아의 오후도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소음도 따가움도 없이 고요한 방 침대에 누워 적당한 불빛 아래 손가락만 움직이게 하는 야심한 밤도 꽤나 맘에 든다는 생각을 한다.

너무 많아서 쏟아질 것 같았다.

이 기숙사에는 카페가 하나 있다. 이 기숙사의 설립에 관여한 에드먼즈 씨의 성을 따서, 카페 이름은 에드먼즈(Edmonds)가 되었다. 전형적인 미국식 이름 붙이기 기법이다. 어쨌든 이 카페는 여러 모로 나의 ‘최애’ 카페이다. 우선, 아울렛 — 충전기를 꼽는 곳이 한국어로 뭐였는지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는다 — 이 많고 와이파이가 잘 터져 ‘카공’하기 딱 좋다. 그런데 그것보단, 아래 사진처럼 버클리의 지형이 한눈에 내다보이고 저 멀리 금문교가 보이는 창가에 바 테이블(bar table)이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 Edmonds

사실 저 자리에 앉으면 공부가 그리 잘 되진 않는다. 악동뮤지션의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라는 노래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도입부 몇 소절의 가사가, 창가에 앉아 멍하니 밖을 내다보는 나를 정확히 묘사해준다. 이 자리에 앉으면 모든 사람들의 걸음걸이 관찰할 수 있다! 나에게 자주 발견되는(?) 친구 D는 스트라이프 상의와 검은색 — 어쩌면 네이비색 — 바지를 자주 입고, 한 손으로는 가방끈을 꼭 쥐고 뚜벅뚜벅 씩씩하게 걸어간다. 절친 H는 보폭이 크다. 어쩐지 하늘하늘 걷는 것 같아서 이 친구가 걷는 걸 보고 있자면 나비가 연상된다. S도 보폭이 큰데, 이 친구는 걸어가면서 핸드폰을 하는데도 걸음 속도가 느려지지 않는 것 같다 — 이런 점은 나랑 정반대이다. 금발머리 J는 햇살이 꽤나 따가운 오후에도 스웨터를 입고 에어팟 맥스로 포인트를 주고 살짝 눈을 내리깐 채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자주 마주치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금발 여성분들이 많이 지나다니는데도 그 사이에서 J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게 신기하다.

잡았다!

낮이 되면 햇빛이 따가운데도 웃통을 벗고 러닝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연인들도 참 많이 지나가는데, 이 동네 연인들은 한국에서 마주친 연인들보다 서로 손을 더 꼭 움켜쥐고 걸어가는 것 같다.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차도를 역주행하는 무법자들도 많이 보이고, 전동 킥보드를 타고 머리칼을 날리며 순식간에 시야를 스쳐가는 사람도 많다. 이 촌구석같은 동네에서 이렇게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을 볼 수 있는 게 여기가 미국이어서 그런 건지, 내가 너무 오래 앉아있어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광경을 하염없이 보는 것이 꽤나 재미있다. 제니 오델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에서 알려준 내용들을 꽤나 잘 실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책의 내용은 결국,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예상치도 못한 굉장한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의 발견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라고 얼렁뚱땅 요약했던 기억이 난다. 작가도 서문 즈음에서 그런 말을 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은 사실 복작복작 무언가를 하는 것에 관한 책이라고.

이 바 테이블에서 내가 사람들을 관찰함으로써 굉장히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 같지는, 아니, 아예 뭔가를 하는 것 같지조차 않지만, 과제와 밀린 강의에 파묻혀 순식간에 사라지는 오후의 존재감을 톡톡히 일깨워주는 행위인 것은 분명하다.


관찰

모네는 인상파 화가이다. 모네의 그림 중에는 시간대별로 물체를 그린 연작이 많다. 물체에서 반사된 빛의 양상이 시각마다 다르니까, 시간대에 따라 물체의 모습이 다르게 포착되는 걸 반영하기 위해서였던가, 뭐 그런 이유라고 한다. 모순적이게도, 물체가 반사하는 순간적인 — ‘빛’이니까 아주 짧은 시간이겠지 — 빛의 모습을 제대로 포착하기 위해서는 빛이 반사되는 양상을 아주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 하루 중에도 순식간에 해가 기운다는 점과 매일 남중고도가 달라지는 점을 감안했을 때, 자연광을 가지고 그림을 그린다면 그건 아주 부정확한 그림이 될 수밖에 없다. 빛은 매일, 매분매초 물체를 다르게 비추기 때문이다. 모네가 그림을 정확히 — 의도한 대로 — 그리려면, 대단한 동체시력의 소유자여야 할 것이다.

그도 나처럼 하염없이 매일 똑같은 광경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물체와 그 빛반사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어제와 다른 오늘의 모습을 발견하고 재밌어 했을까? 참, 별게 다 재밌다.


「번외#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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