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실패자야
내신이 꽤 좋았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내게 선택이 아닌 당연한 사실이었다. 서울과 아주 가까운 경기도에서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살고 있었던 터라 서울로의 진학은 나에게 꿈은 아니었다. 최상위권은 아니었지만, 항상 상위권, 못해봐야 중상위권이었다. 고1 때는 전교에서 공부 잘하는 애들만 뽑아 따로 만드는 소위 말하는 '영재반'이었다. 그런 내가 서울에 있는 대학을 못 갈 리가 없었다.
엄마와 아빠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별로 손이 가지 않던 둘째 딸이었던 나는 그들의 희망이자 자랑이었다. 내신 100%로만 가겠다는 나의 자만은 하늘을 찔렀고, 남들이 수능을 볼 때 나는 마음 편하게 수능 보러 가서 다 찍고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안전함을 중요하게 여기는 아빠는 혹시 모르니 전문대에 원서도 넣어놓자고 했다. 자존심 상했지만 붙어도 안 갈 거니 그냥 원서 값을 기부한다 생각하고 넣었다.
6개의 대학 목록에서 붙어도 가지 않을 거라는, 아주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서 넣었던 대학에만 붙었다. 그것도 예비 6번으로. 경기도에 있는 곳이었다. 수능으로 최저를 맞추지 않은, 크게 모험하지 않으려고 했던 나의 성향이 입시 실패로 이어졌다. 좋은 4년제 대학이 아니면 전문대로 가겠다는 나는, 4년제가 아니면 안 된다는 아빠의 의지를 꺾지 못했고, 그저 그런 경기도에 있는 4년제 대학교 의류학과로 입학했다.
자존심이 상했다. 그 당시 남자친구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서 신입 생활을 즐기며 살고 있는데, 나는 오티도, 새터도, 입학식도 참여하지 않았다. 내가 그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고 느껴졌다. 나는 훨씬 잘난 사람인데, 너희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인데, 그런 내가 왜 여기 있지?
그래도 재수는 죽어도 하기 싫었다. 여기서 열심히 하면, 4점대 성적을 유지하고 중간에 교환학생도 가고, 공모전은 물론이고 자격증도 따고 나면 좋은 곳에 취업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들려오는 건 인맥, 그리고 학벌을 많이 본다는 회사의 이름들 뿐. 좌절했지만, 여기서 열심히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비리가 많은 학교. 국회의원의 딸이 교수로 있는 학교. 학장이 돈이 많지만 항상 부실 대학교로 꼽히는(이렇게 말하면 다들 알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학교였다.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너 ㅇㅇ 대학교 다니잖아"라고 말하면 그 친구의 주둥이를 때리고 싶었다.
나는 실패자다.
엄마 아빠의 기대를 저버린 천하의 못된 딸. 입시 전략을 제대로만 짰더라면, 내가 그때 수시 100%가 아닌 최저라도 맞췄더라면,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 당시 남자친구에게 질투와 열등감을 느끼며 그렇게 학벌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나는 내 남자친구와 달리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정확히 알기 때문에 의류학과에 온 거라며 그렇게 나의 열등감과 질투를 숨긴 채 자위해야만 했다. 그래야 내가 실패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줄 알았다.
"나는 시작하기만 하면, 마음만 먹으면 여기서 1등도 하지~"
그렇게 첫 중간고사를 보기 좋게 말아먹었고, 학교가 후져서 내가 열심히 공부해도 의미가 없다고, 나는. 그냥 이 삶을 즐길 거라고 또 그렇게 나의 자존심을 챙겼다.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었다.
의류학과는 실습이 있다. 손재주가 좋은 아빠를 닮지 못해 항상 슬펐지만, 그래도 그 아빠 피가 어디 가겠냐며 첫 재봉틀을 잡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익숙해지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성격이 급한 나는 디테일 부분을 놓치기 일쑤였고, 그 디테일이 점수에 반영되면서 또 점수는 좋지 못했다.
"나는 그냥 이 점수에 만족해~"
핑계.
실패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고작 대학교 하나로 내 인생이 실패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그저 그런 4년제에 다니고 있으니, 내가 아무리 인생에 대학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 실패자가 울부짖는 발악밖에 더 되나? 끝도 없이 자존심이 상하고 재수해서 좋은 학교를 갔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질투와 열등감이 들었지만 그렇지 않은 척했다.
학원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도 학벌이 아쉽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 흔한 키즈 카페에서 하는 알바에서도 열심히 공부했다는 지난 이야기를 할 때 "그래서 그 학교 갔냐?"라며 조롱받기 일쑤였다. 나에겐 학벌이 내 발목을 잡았다. 항상, 늘.
나는 뼛속까지 실패자였다.
입시 실패자, 인생 실패자, 낙오자, 불효녀. 내 학벌 콤플렉스는 평생 극복하지 못할 거야, 난 그냥 그저 그런 사람이니까. 난 실패자야. 실패자야. 실패자야.
*2015년의 저의 이야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