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중 인기 없는 안주를 주문할 때 주문자의 올바른 행동은?
글 | 미지
“사장님, 여기 아이스 황도 하나 주세요.”
술자리에서 아이스 황도를 시키는 사람은 누구인가. 우선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주목해보자. 그들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유형 1은 면박을 주는 사람. “누구야!”라며 주문한 사람을 색출하기 시작한다. 유형 2는 되묻는 사람. “아이스 황도??????”라며 말 끝에 물음표를 10개씩 붙이는 것이 특징. 유형 3은 관심 없다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 하지만 표정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세 가지 유형 중에 주문을 동의하거나 주문자를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아이스 황도를 주문하는 용기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 사람은, 바로 나다. 나는 아이스 황도를 시킬 때면 더욱 우렁찬 목소리로 말한다. “맞아요. 복숭아 통조림에 담긴 그 아이스 황도!”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용감해야 하는 법이다.
사실 남다른 취향 때문에 난처했던 적이 꽤 있었다. 노래방에서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1988)’라든가 ‘가려진 시간 사이로(1992)’와 같은 노래를 부를 때(참고로 나는 90년대생이다), 영화를 보다가 혼자 다른 장면에서 울거나 웃을 때, 허광한과 임영웅은 모르지만 지브리의 남자 주인공 이름은 줄줄이 외우고 있을 때 나는 조금 난처하다.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취향을 알리고 싶다가도 ‘취존’이 불가능한 사람 앞에서는 이내 얼굴을 붉힌다.
나를 노래로 표현한다면, 아이돌 가수의 수록곡이지 않을까. 뜨지도 망하지도 않고 애매하게 활동을 이어나가는 아이돌 가수. 그 가수의 타이틀 곡은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봤겠지만 수록곡을 들은 사람은 거의 없다. 오직 소수의 팬덤 사이에서 꾸준히 사랑받는 노래. ‘락 마니아‘, ‘인디 덕후’와 같은 멋진 타이틀을 부여받지도 못한다. 누군가는 특이한 취향 또는 독특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때부터 나는 음악을 포함한 모든 분야에서 대중의 취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된다.
사실 나는 아이스 황도를 좋아하지만 떡볶이도 좋아하고, 관객평이 낮은 B급 영화를 n차 관람하지만 넷플릭스 인기 차트 상위권에 있는 영화도 자주 시청하고, 인기 없는 아이돌 가수의 수록곡을 찾아 듣지만 BTS의 타이틀 곡도 매일 같이 듣는다. 소수의 취향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다수가 좋아하는 것들을 훨씬 많이 소비한다. 그런데도 몇 가지 취향으로 인해 나는 특이한 사람으로 분류되는 날이 많았다.
질풍노도의 시기에는 ‘특이하다’는 말이 정말 싫었다. 사람들과 다른 취향을 들키는 날이면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부끄러웠다. 그래서 다수가 좋아하는 취향을 내 것으로 만들어냈다. 오아시스, 아바, 그린데이의 노래 대신 투피엠이나 샤이니의 노래를 들었고, 카시오페아(구 동방신기의 팬덤 이름)인 척을 한 적도 있다. 급식으로 나오는 코다리찜을 기다릴 정도로 무척 좋아했지만 별로 관심 없는 듯 행동했고, 당시 여자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나로서는 견디기 힘든 인터넷 소설까지 몇 권 읽었다. 미국 하이틴 드라마에 나오는 학생들이 ‘쿨함’에 목숨을 건다면, 한국의 청소년들은 ‘찌질함’에 극도로 예민하다. 나 역시도 ‘찌질’해 보이는 게 무섭도록 싫었나 보다. 정말로 좋아하는 것들은 최대한 숨기고, 온갖 멋진 취향들을 모아 쿨내가 진동하는 15세의 나를 만들어냈다.
처음에는 그런 내가 괜히 멋져 보였다. 친구들 사이에서 대화 주제도 훨씬 풍부해졌다.
“이번에 나온 투피엠 신곡 들어봤어?”
“당연 들었지. 이번 곡에서는 준호의 귀여움이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급하게 만든 옷은 금방 해지기 마련이다. 아기돼지 삼 형제에서도 짚더미로 후다닥 만든 첫째 돼지의 집이 가장 빨리 날아가버리지 않았던가. 내가 필사적으로 만들어냈던 ‘쿨’한 취향들은 금방 들통나버리고 만다. 왜냐하면 그 가짜 취향들 사이에는 작은 디테일이 빠져 있었으니까. 투피엠의 새로운 앨범 속 노래들은 알고 있었지만 저번 주 인기가요에서 준호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 알 수는 없었다. 하쿠(‘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남자 주인공)와 세이지(‘귀를 기울이면'의 남자 주인공)가 입은 옷이라면 모를까.
사춘기가 지나서부터는 가짜 취향을 만들어내는 일을 그만두게 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춘기라는 이름 하에 얼마나 피곤하게 살았던가. 하지만 사춘기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스물여섯이 돼서 그때를 회상하니 조금 귀엽게까지 느껴진다.
지금은 가짜 취향을 훌훌 털어버리고 온전히 내가 가진 취향에 집중하게 됐다. 하지만 종종 남과 다른 취향이 밝혀질 때는 조금 긴장이 된다. ‘앗 괜히 말을 꺼냈나!’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나와 취향이 비슷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내 취향을 무시하다 못해 짓밟아버리는 사람이라면?라는 생각이 약간의 긴장을 불러온다. 아무렴, 일단 지르고 보자. 남들이 이해해주지 않아도 내가 소중히 여겨주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러니 아이스 황도파(派)들아, 시킬 때 머뭇거리지 말고 당당하게 말해보자. 예, 저 아이스 황도를 좋아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