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남편과십 주년을 맞았습니다. 특별한 이벤트 없는 기념일이었지만 의미는 남달랐습니다. 사람에게 권태를 자주 느끼는 제가 한 남자를 만나 십 년 동안 마음의 안정을 누리며 사랑하고 있다니.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돌아보며 우리가 사이좋게 지내는 비결이 무엇인지 되짚어 보았습니다. 저와 남편은 사랑한다는 말만큼이나 미안하다는 말을 곧잘 사용합니다.
제가 남편과 결혼을 결심한 이유 중 하나도 '사과 사건'이었습니다.연인들의 잦은 사랑싸움은 남녀관계의 풀리지 않는 영원한 숙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사과가 주특기인 남자를 만나기 전까진 말입니다.
남편과 연애하고 처음으로 다퉜던 날. 둘 다 황소고집을 부리기 시작했고 분위기는 무척 심각했습니다. 긴 싸움이 될 것이라 예감했던 순간 그가 적막을 깨고 "미안해."라는 말을 건넸습니다. 저는 "뭐가 미안한데?" 하며 못난 멘트를 던졌습니다. 남편은 저의 이름을 부르며 이렇게 답했습니다. "네가 기분이 나빴다면 내가잘못한 거야." 말문이 막힌 여자는 "참나. 나도 미안해." 하며 황급히 상황을 마무리했습니다. 그의 사과를 받고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공이 보통이 아니군.', '이렇게 빠르게 싸움을 끝낼 수도 있구나.' 그의 진솔한 사과는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오래전에 마주했던 그의 표정과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감정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느껴졌거든요. 지는 게 이기는 것이라는 말을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후로 서로 기분 상하는 실수를 범하거나, 잘못이 크든 작든 간에 사과를 잘 주고받는 커플이 되었습니다. 이따금 남편이 제게 사과를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그 말은 섭섭했으니까 사과해." 그러면 저는 하던 일을 멈추고 곧장 사과합니다. "그랬어? 미안해.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사과 후엔 악수와 포옹을 나누는 것이 우리 부부의 끈끈한 팀워크 유지 비법입니다. 제가 사과를 하면 남편은 항상 등을 토닥이며 안아줍니다. 사과에도 골든타임이 있으니 이를 놓치면 잘못한 사람만 손해입니다. 도량이 넓은 그는 제게 쉽게 사과하는 노하우를알려 주었습니다. 자존감이 강한 사람일수록 결정적인 순간에 자존심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죠. 옹졸한 치기가 올라올 때면 연애 초반에 먼저 손 내밀었던 그를 떠올립니다. 사과할 땐 상대방이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떨 때 상처를 입는지를 파악하고 기억하고자 노력합니다. 사과는 곧 성숙을 향한 나 자신과의 다짐이기도 합니다.
오랜 시간 익숙한 존재일수록 "미안해. 사랑해. 고마워."라는 말을 아낌없이 퍼부어야 합니다. 이런 짤막한 표현이 의외로 상대방의 내면에 초점을 맞추게 만듭니다. 무엇 때문에 고마운지, 무엇이 미안한지 입술을 열어 고백하면 신뢰와 사랑은 뒤따라 무르익습니다.
갈수록 우위를 따지며 계산하기 바쁜 세상에서 이유 없이 나를 지지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딱 한 명만 있어도 세상은 살아갈만합니다. 사과든 애정 표현이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베풂에 관대한 연인이 되기를. 논리를 따지지 않고 사과할 줄 아는 사람과 함께 걸으면 우리가 밟고 선 작은 땅도 천국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