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에 담긴 시간의 기억
지인이 직접 텃밭에 심어 수확한 무라고 보내줬다. 고마운 마음으로 무나물도 하고 생채도 해서 맛있게 먹었는데 오늘 아침에 보니 남은 무들이 좀 새들거렸다. 그래서 예정에 없던 섞박지를 급하게 담갔다.
깨끗이 씻어 무를 써는데 또 그 생각이 떠올랐다. 사실 무를 썰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이긴 하다.
재작년 초여름, 출근하려고 급하게 주차장으로 가고 있었다. 막 차문을 여는 순간, 누가 날 불렀다. 돌아보니 아는 사람인데 별로 친하지는 않고 동도 다르다 보니 마주치는 일도 거의 없는 그녀였다. 그래도 반갑게 날 부르니 나도 상냥하게 대답했다.
"아, 잘 지내셨어요?"
그녀가 활짝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를 훑어보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여태껏 자기가 마른 체형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다리가 튼실하네요."
실로 당황스러웠다. 이게, 그냥 지나쳐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사이에 출근하는 사람을 굳이 불러서 할 소린가?
"아, 그런가요? 제가 좀 바빠서."
출근 길이 좀 심란했다. 그래서 아침 조회시간에 애들한테 물었다.
"야들아, 누가 나보고 다리가 튼실하다고 말하면 그건 칭찬일까, 욕일까?"
애들은 얄짤없이 답했다.
"욕이요."
괜히 물었다.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저녁에 천변으로 운동을 가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그녀가 반갑게 다가와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 팔짱을 끼며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친밀하게 행동하는 그녀가 어색했지만 싫다고 말도 못 하고 어정쩡하게 팔을 내준 채 천변에 간다고 말했다.
"어머, 나도 그쪽으로 가는데 잘 됐다."
나는 결코 잘 되지 않았다. 더구나 그녀는 팔짱을 풀어줄 생각도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가는 동안 그녀의 이야기는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궁리 끝에 그녀가 민망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핸드폰과 물병 든 손을 바꾸는 척, 팔을 풀었다. 그 순간, 그녀가 말했다.
"자기는 이렇게 운동을 열심히 하니까 다리가 튼실한가 봐요. 나도 운동 좀 해야 하는데."
또 내 다리를 갖고 뭐라고 한다. (지금 여기에 내 전신사진을 실을까, 2초 생각했다.)
대체 이 여인은 왜 자꾸 남의 다리를 가지고 말하는가. 자기 다리가 가늘다는 소릴 듣고 싶어서 그런 걸까? 나는 누구 다리가 가는지, 두꺼운지, 튼실한지 관심이 없는데.
어쨌든 한마디 했다.
"네, 난 내 다리가 곧고 튼실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내가 좀 빈정상했다는 걸 알아챘나 보다. 그녀는 멋쩍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 맞다. 곧고 튼실한 무, 무다리네요, 그니까 아주 비싼 무."
나는 비싼 무다리로 튼실하게 서서, 맛있는 무로 맛있을 섞박지를 완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