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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신 Oct 01. 2024

1. 사랑의 역사

내가 받고, 건넨 사랑들

사랑. 입에서 굴린 단어가 달았다. 혀에 남은 끝맛마저 환상적이다. 사랑을 시각화한다면 그 형태는 분명 아름답겠지. 그럴 수밖에. 사랑은 강렬하다. 사랑을 형태로 담아낸다면 그건 어떤 예술작품보다 눈부시고 격렬할 것이다. 매혹적인 그 물건은 모두의 시선을 빼앗고 온갖 찬사를 가져가겠지. 오, 위대하며 아름다운 사랑.


-라고 매체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대체로 사랑은 갖가지 미사여구로 표현된다. 우상화되고 미화되어서는. 찬란한 개념으로 대중들에게 각인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사랑'은 정말 아름다울까? 정말로 달고 강렬하며 애틋하기만 할까?


물론 그런 사랑도,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사람들의 표현 방식은 모두 동일하지 않으며, 사랑이란 개념의 이해도 또한 제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사랑'은 추상명사다. 비가시적인 개념이란 것이다. 눈에 담기지도, 만져지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사랑은 그 당사자가 자신의 애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명명되는 것이다.(물론 뒤늦게 깨닫는 사랑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참 복잡한 감정이다. 사람의 사랑은 모두 다르다. 표현 방법부터 깊이, 인정 방식, 그리고 종류까지. 연인 간의 불타는 사랑, 친구끼리의 우애, 헌신적인 가족애. 사랑은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아마 사람의 사랑을 형상화한다면 전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겠지.


사랑. 그중에서도 첫사랑은 유독 애틋하다는 사람들의 감상이 많다. 내 첫사랑 또한 그렇다. 그래, 모든 처음의 기억은 유독 각별한 느낌이 있었다. 내 사랑의 역사들. 그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내 사랑들 중 가장 강렬했던 사랑이 떠오른다.


'아이에게 부모는 세계다'라는 말을 기억한다. 식상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내 첫사랑의 대상은 부모님이었다. 대개 모두가 그렇지 않을까? 내가 최초로 주고, 받았던 사랑의 대상은 어머니였다. 나는 애정에 굉장히 예민한 아이였다. 엄마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나는 '애정의 그릇'이 컸다. 엄마가 주는 애정은 날 만족시키지 못했다. 난 더 많은 애정과 관심을 원했다. 어쩌면 엄마의 애정을 오빠와 공유하기보다는 독점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지금도 엄마의 사랑을 완벽히 신뢰하지 못한다. 애정의 그릇에 담긴 애정이 내게는 부족해서. 갈증이 나서. 나의 애정결핍은 애정불신으로 이어졌다. 엄마가 언젠가는 나를 두고 떠날 것 같아서 두렵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엄마가 나를 포기하기를 조금은 바란다. 엄마. 내가 엄마의 걸림돌이 되는 것 같아. 나는 정신병자를 딸로 둔 엄마를 사랑하면서도 동정했다. 


참 웃기는 꼴이다. 모순되는 감정들은 거칠기 짝이 없어서 벼린 칼처럼 사람을 찔러댔다. 주로 그 피해자는 엄마였다. 언젠가 상담선생님과 한 대화가 기억난다. 기억 속 내가 말한다. 제가 엄마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는 것 같아요. 그때, 선생님은 뭐라고 답했더라?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냥 그 말만이 내 머리를 맴돌았다. 내 우울과 불안은 자주 폭력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뒤늦게 제정신이 돌아오면 후회와 자기혐오가 나를 휩쓸었다. 그러면서 나는 나를 향한 엄마의 애정이 식지 않았는지를 확인하려 들었다. 나를 사랑해? 정말? 어디까지? 이래도 나를 사랑해? 입으로는 차마 꺼내지 못하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배했다.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그 애정을 확인받고 싶어 했다. 상대가 그 사랑을 증명해 주기를, 그 애정의 크기를 측정해서 보여주기를. 사랑받고 싶어 하는 주제에 사랑을 의심했다. 이유 없는 호의와 선의는... 그것들은 내게는 너무 부드럽고 다정해서 감사한 마음보다는 의심과 의혹이 먼저 고개를 들고 마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뒤늦게 그 선심과 따스함의 기억을 더듬었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난 그 다정함을 제법 좋아했다.


엄마의 사랑이 내게 부족했다면 아빠의 사랑은 건조했다. 아빠의 사랑은 참 비겁했다. 어린 시절의 내 기억 속 아빠는 늘 뒷모습이었다. 그 사람은 내게 관심이 없었다. 아빠와 내 관계는 뭐랄까... 어장 속 물고기와 무관심한 주인 같은 그런 관계였다. 가끔 기분이 좋으면 먹이를 조금 던져주는 그런... 아빠는 정말 가끔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믿었던 바보 같은 순간이 나한테는 있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욕구라는 말을 어디서 들은 적이 있다. 그래... 솔직히 나는 아빠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이상적인 가정을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노력하면. 내가 조금만 더 잘하면. 그런 가정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결국 인정했어야만 했다. 아빠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이제는 그 사실을 안다. 너무 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방적인, 짝사랑을 했었다. 그 '애정'은 내가 노력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미숙한 사랑과 짝사랑을 배웠다. 아름답기보다는 초라한 사랑이었다. 그 영향인지 나는 사랑에 대한 불신과 애정을 향한 욕구가 굉장히 높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친하다고 생각하는 친구의 '베스트프렌드'라는 호칭에 집착하고, 대화에서 소외되는 분위기를 극도록 싫어했다. 유치하기 짝이 없던 시절이다.


애정결핍은 다양한 증상을 동반한다. 좀 더 몸이 자라고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도 내 애정결핍은 해결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애정결핍이라는 사실도 꽤 뒤늦게 인지했다. 그러니까 나한테는 '누군가가 나를 순수하게 좋아한다'는 가정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내게 남의 사랑을 눈치채는 재주 같은 건 없다. 그러나 그런 나라도 결국 그 애의 애정을 수긍해야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애'의 사랑은 정말 가시적이었다. 둔한 내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래. 참 순도 높은 애정이었다. 고백을 받은 것도 아니었고, 연인 관계로 발전할 생각도 없었지만... 나는 이기적인 호기심을 참지 못했다. 왜 내가 좋아? 그 질문에 나는 여러 대답을 들었다. 어떤 대답이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는 않지만, 나는 간혹 그 애정을 떠올렸다. 왜 하필 날 좋아했을까. 이렇게 초라한 나를. 대체 왜? 내 엉망인 모습을 봤어도 그 애는 나를 좋아했을까? 아마 영원히 해소되지 않을 의문은 잘도 들었다.


사랑. 다시 한번 입에 굴린 단어가 쓰다. 내 사랑의 역사는 대체로 그랬다. 내 사랑은 위대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그러나. 그래도 사랑을 해야지. 초라한 나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내 삶과 그걸 구성하는 것들을. 삶이라는 그릇에 내가 사랑하는 존재들을 채워야지. 


이상한 인생이다. 나를 짓밟는 것도, 다시 나를 일으키는 것도 끝내에는 전부 사랑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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