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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다 Sep 19. 2023

지갑 없는 하루

도서관에 자주 온다.

도서관 2층에는 오페라 하우스 로열 박스처럼 생긴 공간이 있다.

오페라 하우스 로열 박스는 무대를 향해 있지만 도서관 로열 박스 좌석은 시원한 통유리를 마주하고 바깥 전망을 마주하고 있다. 낮은 건물과 집들도 있고 멀리로는 아파트 공사 현장도 보인다.

이 자리가 특별한 이유는 도서관 정원뷰가 있어 눈이 시원하다는 것이다.


도서관에 갈 때에 반드시 준비하는 것이 있다.

텀블러 두 개와 각종 티백, 커피 믹스다

책을 읽거나 공부하다 피곤하면 여러 가지 차를 마시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필기도구도 준비한다.


도서관 2층에 올라오니 역시 내가 좋아하는 로열 박스 좌석이 하나 비어 있다.

누가 보는 건 아니지만 평정심을 유지하고 마음은 뛰고 싶으나 천천히 걸어가서 빈 좌석에 가방을 내려놓는다.

누군가에게 자리를 빼앗길까 마음은 조바심이 나지만 겉모습만은 평온하고 여유 있어 보이려 노력한다.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언제나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별 것 아닌 일에 왜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와인바에 바텐더를 마주 보는 테이블처럼 일렬로 긴 책상이 있고 의자들은 통유리창을 향해 나란히 놓여있다.

의자에 앉아 책을 꺼내고 텀블러에 티백을 넣고 온수를 받아 놓으면 준비는 끝났다.

책을 읽는 일만 남았다.

책을 읽을 때에는 여러 권을 두고 이것저것 돌려가며 읽는다. 쉽게 지루해지는 성격 탓인 것 같다.

대충 생각해 보면 삼십 분 정도마다 책을 바꾸는 것 같다.

책을 한참 읽다 보니 조금 움직이고 싶어지고 집중력이 떨어졌다.

이럴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의 루틴이 있는 것도 같다.

도서관 카페, 매점 혹은 식당이 떠오른다.


'달콤한 과자라도 하나 살까'

'돈가스 하나 먹을까'


가방을 뒤져보니

지갑이 없다.

집에서 나올 때 챙겨 오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독서 외에 달리 할 일이 없어져버렸다.

점심은 강제로 단식을 하게 되어 일일 2식을 경험하게 되었다.

건망증이 의외의 경험을 하게 해 주었다.


돌이켜보니 중고등학생 때 주말이나 방학 동안 도서관을 꾸준히 다녔다.

친구와 함께.

그런데 공부는 조금 하고 늘 친구랑 매점이나 식당, 음료 자판대를 돌아다니며 먹고 마시고 떠들다 집에 온 기억이 난다.


지갑이 없는 하루를 통해 깨달았다.

돌아다니고 싶은 욕구는 지갑 혹은 돈이 있을 때 유효하다는 사실.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거나 공부를 하는데 점심을 걸러도 크게 배고프지 않다는 사실.

지갑이 없어 돌아다니지 않게 되니 의외로 집중력이 좋아지고 시간을 알차게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


건망증이 불러온 참사로 시작했지만 모든 일에는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이 있다.

지지부진하던 독서 속도를 올려 두 권의 책을 완독하고 반납했다.

브런치 글을 여러 편 읽었다.

브런치 글 한 편을 썼다.


지갑 없이 도서관에 어떻게 올 수 있었냐고 누가 묻는다면

'집에서부터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다'

라고 자랑삼아 대답하고 싶다.

삽화: 이영빈

글  :     엄마

그림  :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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