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회
다 나 까
(부제 : 군대 사투리)
이 정 윤
희뿌연 하늘을 한 번도 벗어나 보지 못한 서울 촌년입니다.
여행에서 배우고 쓰는 사투리는 익숙하지도 재미있지도 않습니다.
인사법도 다르고 말투도 다른 곳
‘안녕하세요?’라는 우리식 인사를 받으며
이 지방 어르신은 버럭 화를 내십니다.
‘다나까’라는 이곳의 사투리만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막 학교에 들어간 초등학생처럼
혼이 날까 무서워 사투리가 익숙해지도록 노력합니다.
언니도 동생도 다 똑같은 사투리를 쓰는 친구가 되고
어느새, 힘들었던 사투리가 이젠 표준어보다 익숙합니다.
첫 면회,
두 달 만에 보는 어머니와 친구에게도 자연스레 사투리가 나옵니다.
“그동안 건강하셨습니까? 전 건강히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친구와 엄마는 처음 들어보는 내 사투리에 박장대소합니다.
바짝 얼어 각 잡고 있는 나는 웃지도 못하는 바보 인형.
그날 밤하늘은 별 하나 반짝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하지만 나는 낮에 실컷 웃으셨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아니 그보단 남겼던 닭강정 생각에 억울해서
잠 못 이루고 두 눈 환하게 반짝입니다.
점심에 사발면에 건빵까지 꺼내주셨던 중대장님 의도에 한없이 화가 납니다.
사투리가 익숙해지고 있는 나의 갑상샘 호르몬이 여성성의 탈피를 촉진하고 있습니다.
여군학교 추억 – 면회
20주의 훈련 기간 중 절반 정도의 시기에 첫 면회가 있었다. 군에 오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부모님과 떨어져 보지 않은 내가 두 달 동안 부모와 떨어져 있으니 없던 애정이 생길 만큼 부모님과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첫 면회 날을 동기들 모두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여군학교 훈련 생활은 배고픔의 연속이었다. 일명 군대 특식이라 불리는 햄버거가 나오는 날이면, 한 사람당 두 개씩 나오는 빵을 한 개만 먹는 다른 동기들의 빵까지 7개의 햄버거를 먹는 동기를 보기도 했다. 밥을 적게 줘서 배고픈 것보다는 군에 다녀온 사람들은 알겠지만, 단 게 먹고 싶고, 내가 먹고 싶을 때 먹지 못하는 절제라는 것을 한다는 게 힘든 것 같다. 아주 가끔 식사 후 건빵이나 사발면을 보급받는 날이 있었다. 보급되는 날을 미리 알려주지 않고, 저녁 시간에 사발면이 보급되면 군대에서 쉽게 먹을 수 없는 사회의 맛이라 거부할 수가 없었다. 첫 면회는 토요일 13시였다. 다들 부모님이 맛있는 것을 가져오면 친한 동기들끼리 나누어 먹자고 한 달 전부터 계획을 짜고 설레발을 치며 생각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첫 면회 날은 초등학교 소풍날처럼 들떠서 오전 교육에 집중할 수도 없었다. 너무나 보고 싶은 부모님과의 만남도 기대가 되고, 사회에서만 맛볼 수 있는 치킨, 피자도 기다려졌다. 점심을 먹지 않고 오전 일과가 끝나는 12시에 면회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고지식한 군대에선 융통성 있게 되지 않았다. 부모님과 친구가 사무치게 그립고, 사회의 맛이 떠오르면서도 오전 일과를 마치니 그날 역시 돌아가는 국방부 시계처럼 배꼽시계는 울리고 배가 고팠다. 그날의 점심 메뉴는 이젠 기억나지 않는다. 점심시간 자율배식을 할 때까지는 면회 시간에 사제(외부) 음식을 먹겠다고 생각하면서 평소의 반만 배식했다. 들떠있는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식사하는 도중 중대장님께서 평소에 보급해 주지 않던 사발면과 건빵을 꺼내오셨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유혹을 참고, 30분 후 사회의 맛을 느끼는 게 백번 맞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성의 끈을 놓고 사발면을 하나씩 받고 있었다. 잠시 후 일은 모르겠고 지금 당장 눈앞에 민간인 때 먹었던 라면에 맛에 취해있었다. 조금 전 적게 배식했던 식판이 무색할 만큼 배가 부른데 군대에서 나오는 음식은 보관해 두거나 식당에서 가지고 나갈 수가 없다. 그 자리에서 다 먹거나 먹지 않는 선택밖에 없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먹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20여 년을 자유롭게 지내던 여자들의 급격한 변화와 먹고 싶은 욕구를 지나치게 억제할 때 생긴 식탐이라고 생각했다. 배가 부른 상황에서 또 한 번의 고민을 한다. 지금 충분히 배가 부르다. 적게 배식했지만 밥을 먹고 사발면도 먹었는데 식당에서 나가지 않고 건빵을 먹어야 하는지 고민했다. 앞에 있는 동기들의 얼굴을 보니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눈이 마주친 동기와 하나를 뜯어서 같이 먹자고 합의했다. 그냥 나가는 것은 건빵에 대한 예의가 아닌 거 같아서 하나를 뜯었더니 6명이 앉는 식탁에 손이 하나둘씩 다가왔고 한 봉지가 금방 바닥이 났다. 다른 동기가 일어나 건빵 한 봉지를 더 들고 왔다. 그 건빵도 금방 없어지고, 3봉지도 순식간, 4봉지도 삽시에 사라졌다. 건빵은 생각보다 아주 팍팍하다. 몇 개 입에 넣고 씹고 있으면 물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아서 건빵 4봉을 물 없이 꾸역꾸역 먹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식탁에서 일어나 식판을 놓고 물을 한 잔 먹고 식당에서 나오자마자 점점 배가 불러왔다. 10분 후엔 두 달 만에 부모님과 친구를 만나는데 라면과 건빵을 경황없이 먹었던 게 후회되기 시작했다. 나 자신의 미련함이 웃겼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지나고 면회가 시작되었다. 47명의 동기의 부모, 친척, 친구들이 작은 여군학교를 꽉 채웠다. 국방부가 들썩일 만큼 서로의 안부를 묻느라 바빴다. 딸의 입대는 어느 집안에서도 흔하지 않은 상황이라 더더욱 아들의 입대와 면회보다 더 낯설고 조금 더 수위가 높은 반응과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지고 눈물을 흘리는 부모님들도 계셨다. 각 잡은 딸의 어색함과 처음 들어보는 말투가 웃기면서도 눈물이 흐르는 감정이 들었던 것 같다. 그날의 용산은 이산가족 찾기 스튜디오 같은 웅성거림이 흘렀다. 30여 분이 지나고 나니 울다가 웃기도 하고, 웃다가 눈물을 닦기도 하던 지인들이 하나둘씩 싸 온 음식을 꺼내놓았다. 엄마는 닭강정과 동기 47명이 다 같이 나누어 먹을 수 있는 떡을 해오셨다. 그렇지만 음식물 반입은 허락되지 않았다. 삼삼오오 친한 동기들과는 오가며 싸 온 음식을 나눠주고 나눠 받기도 했다. 먹을 건 점점 쌓여갔고, 8주 만에 처음 먹어본 튀긴 음식은 혀를 자극했지만, 많은 음식 앞에서도 너무 배가 불러 먹을 수가 없었다. 싸 온 음식을 먹지 않는 딸들을 보면서 부모님들은 서운해하셨고, 4분 같은 4시간의 면회가 끝났다. 다시 혼자가 되고 밤이 왔다. 개인 정비시간에 전투화를 닦으며 남겨서 다시 돌려보낸 음식들 이야기로 바빴다. 한가지의 주제로 이렇게도 심각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진지했다. 모두가 잠들었다고 생각한 어두운 생활관에서는 또 언제나 볼지 모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서글펐고, 남겼던 닭강정 생각이 드니 중대장님의 의도에 화가 났다. 점호시간 사발면과 건빵이 나온 이유를 알려주셨다. 8주 만에 보는 딸들이 면회 시간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면, 아직도 군에서 배고픈 훈련을 받는다고 속상해하실 부모님들을 생각해서 미리부터 배고프지 않은 상태로 면회를 시키는 게 목표였다. 알고 들어도 화가 났다. 닭강정을 남겨 보낸 것이 계속 생각이 났다. 건빵만 먹지 않았다면 맛있는 음식을 조금 더 먹을 수 있었을 텐데. 중대장님의 의도와 나의 미련함에 분통이 터지는 밤을 지새우며, 조금씩 군인화 단계가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여군학교 추억 – 면회2
첫 면회가 지나고 나서 주말 오후에는 언제나 면회할 수 있었다. 희소성의 문제인지 매주 할 수 있게 되니 첫 면회의 모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나에게도 면회가 오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지금처럼 병사들도 핸드폰을 사용하던 시기도 아니었기에 누가 주말 면회할지 알 수 없었다.
처음엔 면회 시간이 짧게만 느껴졌지만, 나중엔 면회가 와도 한두 시간 사제음식을 먹고는 개인 정비시간이 부족해서 금방 돌아오기도 했다. 그래도 매주 친구와 부모님이 찾아오는 동기들이 부러웠다. 우리는 먹지 못하는 맛있는 것을 먹고 있을 동기들이 궁금했다. 하루는 친한 제주도 동기가 언니가 사다 준 음식을 먹으면서 동기들을 위해 부피가 큰 것은 안 되지만 사탕 정도는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고,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썬키스트 레몬 맛 사탕을 건빵 주머니에 숨겨 주고 갔다. 무료한 토요일 낮에 썬키스트는 깨물면 레몬 맛 상큼한 과즙이 나와 지루함이 톡 터지며 행복이 흘렀다. 사탕의 달콤함을 행복함으로 느끼고 있는 중 TV연등실에 중대장님께서 순찰을 오셨다. 지휘관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중대장님을 본 한 명이 일어나 “쉬어, 후보생 휴식 중”이라고 현재 하는 일을 보고한다. 그런데 사탕을 먹으면서 놀란 우리는 연등실에 앉아 있던 모두가 일어나서 “쉬어”를 외쳤고, 평소와 다른 우리가 의심스러운 중대장님께서는 연등실을 수색해서 결국 사탕을 발견하셨다. 사탕을 먹은 동기들 모두 썬키스트를 입에 물고 연병장으로 집합했다. 좌로 굴러 우로 굴러 등 여러 개의 얼차려를 받았다. 대략 7~8명 되는 동기들은 사탕을 주고 간 동기를 말하지 않았다. 그게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했다. 그 이후 누가 받았는지 추궁하기 시작했다. 모두 아니라고 했다. 마지막에 서 있던 나는 용감하게 내가 받았다고 했고, 그 후엔 다른 동기들은 모두 들어가고 혼자 남은 얼차려와 벌점을 받았다. 난 그때도 여느 때처럼 앞뒤 안 가리고 무모했던 후보생이었다. 사탕을 가져다준 동기를 원망하지 않고 사랑이라고 생각한 그 시기는 추억이다. 지금은 좋아하지도 않는 그 사탕을 보면 사탕 하나에도 행복하게 웃던 일이 떠오른다. 아직도 때론 언니같이 때론 친구같이 동기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빠르게 달려와 주는 현금림 후보생의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얼굴이 선명하게 기억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