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여행법-일본 삿포로, 재즈바 자마이카(Jamaica)
새로 산 러닝화를 신고 홋카이도 대학 은행나무 가로수길을 뛰어 볼까요? 오도리공원 TV타워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어야겠죠? 스스키노역 맥도날드 2층 창가에서 멍 때리며 니카상을 구경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아니면 삿포로의 명물인 다루마의 징기스칸이나 가라쿠의 수프카레를 먹는 건 어떨까요? 아마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이곳을 알기 전까지는요.
삿포로의 재즈바, 모던 재즈 자마이카(Modern Jazz Jamaica)를 알게 된 건 우연한 계기였습니다. 한 유튜브 채널에서 오디오 회사 JBL의 스피커 파라곤 D44000가 60년 넘게 고장 한 번 없이 울려 퍼지는 재즈바가 있다는 소식을 접한 것입니다.
반세기 전에 단종된 세상에 1000대 밖에 없는 스피커, 그것도 한 번의 고장도 없이 점검조차 받지 않은 완벽한 순정 상태의 파라곤을 청음 할 수 있는 재즈바라니! 당장이라도 삿포로로 날아가고 싶었습니다. 스니커마니아가 1985년 발매된 에어조던 1 오리지널 모델의 새 제품을 파는 가게가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비슷한 기분이었을까요?
파라곤 D44000은 JBL사가 1957년부터 1983년까지 27년간 생산했던 홈 스테레오 스피커입니다. 리처드 레인저(Richard Ranger)가 설계하고, 산업 디자이너 아놀드 울프(Arnold Wolf)가 디자인한 파라곤의 외관은 스피커라기보다 거대하고 우아한 빈티지 가구처럼 보입니다.
가로폭 2.6m에 무게 266kg에 달하는, 중고거래라도 했다간 용달차에 인부 두 명은 불러야 할 파라곤은 거대한 덩치만큼이나 딴딴한 내공을 자랑합니다. 파라곤이 전설로 불리는 데는 스피커가 가진 오랜 역사, 우아한 외모와 함께 초창기 스테레오 오디오가 가지는 특유의 소리 울림에 기인합니다.
파라곤은 특이하게 양쪽 혼에서 난 소리가 정면을 향하지 않고 오디오의 가운데로 모여 목재 배플에 반사돼 퍼져 나가는데, 소리를 듣고 있자면 아무도 없는 산 정상에서 튼 음악이 반대편 산에 반사돼 돌아오는 메아리의 공명이 느껴집니다. 특히 스피커가 제작된 시절에 발매된 앨범들과 천상의 궁합을 보여주죠.
70년 전 기술로 제작된 만큼 최신 스피커처럼 명확하게 소리를 재현하진 못하지만, 몇 백 년 된 성당이 품은 아우라처럼 파라곤의 음향은 감동을 자아내기에 충분합니다. 노트르담 뺨치게 우아한 데다 한 번도 불타거나 보수하지 않은 원래 모습 그대로의 성당이 있다면, 사람들은 성당을 보기 위해서라도 그 도시로 향하지 않을까요?
‘얼마나 맛있는 술을 내어놓는가?'의 관점에서 자마이카는 최고의 바는 아닙니다. 적당한 위스키 라인업을 갖추고 있지만, 어느 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며 곁들이는 음식은 평범하다 못해 조악한 수준입니다. 르챔버의 화려한 시그니쳐 칵테일을 기대하거나, 특별한 미각적 경험을 원하는 분이라면 실망할 게 분명합니다. 게다가 일본의 많은 바가 그렇듯, 이곳은 흡연이 허용되는 구역이라 비흡연자에겐 자리를 지키는 것 자체가 곤욕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멋진 경험을 할 수 있는가?'의 관점에서 자마이카는 최고의 바입니다. 괴물 스피커와 1960년대 음반을 위주로 소장된 2만 3천 장이 넘는 LP와 CD 외에도, 그 둘을 완벽히 조율하는 마스터의 존재는 어째서 삿포로의 밤을 여기서 보내야만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바에 앉아 음악을 듣다 보면, 대략 10분에서 15분 단위로 앨범을 갈아 끼우는 마스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손님과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가도, 귀신같이 정확한 타이밍에 음악을 바꿔 틀고 앨범 커버가 손님을 향해 보이게 올려 두시죠. 때가 되면 음반이나 갈아주는 일이 뭣이 어려울까 싶겠지만, 사실 이건 아주 능숙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2만 장이 넘는 앨범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 음악의 기승전결을 완전히 이해해야 하고, 지금 손님들이 어떤 음악에 호응하고 있는지에 대한 관찰력도 필요합니다. 판을 갈 때도 넘치는 정수물 주워 담듯 분주하게 움직여선 안됩니다. 이 모든 것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완벽히 수행했을 때, 손님은 편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음악에 관한 최고의 경험을 선사하는 바, 자마이카는 그런 경험을 전해주는 몇 안 되는 재즈바입니다.
일본의 재즈바를 들를 때마다 십중팔구 혼자 온 샐러리맨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날도 샐러리맨 두 명이 바 테이블을 지켰습니다. 특유의 각진 크로스백을 짐 바구니에 구겨 넣고, 잔 술을 넘기는 그들의 모습에서 걱정이나 애달픔 대신 괴이할 정도의 안정감이 느껴집니다. 혼자 덩그러니 존재했을 때 더 완전해지는 파라곤 스피커처럼 말입니다.
마스터가 올려둔 빌 에반스 트리오의 첫 음이 파라곤 스피커를 타고 진하게 쏟아집니다. 가게 오른쪽에 난 유일한 작은 창으로 가타카나인지 히라가나인지 모를 문자의 네온사인이 뭉개져 들어옵니다. 평소라면 불쾌했을 담배 연기가 재즈 선율에 희석돼 그럭저럭 견딜만합니다. 재즈바가 낯선 아내는 그날의 분위기를 분주하게 그림으로 담아냅니다. 그렇게 이 순간이 영원히 이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네, 삿포로에서 딱 2시간이 생기면 저는 무조건 이곳으로 향하겠습니다.
* 글에서 소개된 곳
1. 홋카이도대학 은행나무 가로수길
https://maps.app.goo.gl/epAA8pjiDN5xscJaA
2. 삿포로 TV 타워
https://maps.app.goo.gl/None4yGc93KK8bUp8
3. 맥도날드 삿포로 스스키노점
https://maps.app.goo.gl/hyErc4ZGsd6MxqZ49
4. 다루마 본점
https://maps.app.goo.gl/ZvBqBZLyj5TaBWKV6
5. 스프카레 가라쿠
https://maps.app.goo.gl/VsVRqkQi6M7GNXd78
6. 모던 재즈 자마이카
https://maps.app.goo.gl/SeKvaVHMHnWEvXis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