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나의 회사와 육아로 지친 마음을 위로해주고 싶다며 스키장 근처 숙소를 예약했다. 친정엄마께 아기를 하루만 맡기고 가잔다. 본인이 아니라 자신의 아내인 나를 위해서..
나는 또 그렇게 속는다. 첫 시작할 때의 목적은 정말 나를 위해서였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첫 아이가 태어난 지 1년 만에 둘만의 스키여행을 떠났다. 처음 가보는 스키장은 신기하기만 했다.
그는 전에도 가봤는지 스키복부터 부츠, 스키 모두 척척 대여했고 부츠 신으면 걷기가 많이 불편하다고 먼저 주의를 줬다. 남편 말대로 스키부츠를 신으니 한 발자국 내딛기 조차 힘들었다.
처음엔 초보 코스로 가서 나를 가르쳐줬다. 항시 스키 날 끝이 서로 바깥으로 벌어지면 안 되고 수평이나 살짝 안쪽으로 향해야 하고 넘어지는 법부터 잘 익혀야 한다며 친절히 알려주었다. 어렵긴 해도 원래 불평을 잘하지 않는 편인 나는 열심히 배우려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한동안 나에게 스키를 가르쳐 주던 남편은 레슨을 받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난 돈이 아까워 그냥 남편이 알려주는 대로 연습하면 되겠다고 하며 계속 낮은 곳에서 연습을 했다.
드디어 남편이 슬그머니 본색을 드러냈다.
"여기서 연습 좀 하고 있을래? 나 중급코스 가서 한 번만 타고 와도 돼?.."
괜스레 나 때문에 신나게 스키를 즐기지 못하고 있는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그러라고 했다.
"그래. 금방 갔다 올게. 연습하고 있어."
금방 올 줄 알았던 남편은 한 시간쯤 지나서 왔고 리프트쪽에 줄이 너무 길어서 내내 기다리기만 했고 이제 막 한 번 타고 내려왔다그러고는
"한 번만 더 타고 와도 돼?"했다.
그렇게 남편의 스키 사랑은 시작되었고 스키장비가 하나둘씩 우리의 좁은 공간을 또 먹어대기 시작했다. 스키복도 몇 벌 사고 스키, 부츠, 고글, 급기야 최상급자를 위한 헬멧도 하나 마련했다.
주말 저녁이면 누워 위를 바라보다 천장이 온통 하얀 눈으로 보여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다며 밤에 출발해서 오전에 돌아오는 식으로 홀로 스키를 타고 왔다. 아기를 데리고 따라붙어봤자 나만 고생이고 아이도 아플 수 있으니 그냥 혼자 가게 내버려 뒀다.
그렇게 마라톤, 수영, 사이클링에 겨울엔 스키까지 더해지게 된 것이다. 장비를 사들일 땐 나와 의논 없이 그냥 질러버리고 숨겨뒀다가 슬그머니 커밍아웃시키니 말릴 도리가 없었다. 정영 나와 결혼한 건 자신의 취미생활을 완성시키기 위함이었을까?
큰 아이가 스키를 탈 수 있을 무렵엔 저렴한 아동용 스키를 마련해 함께 했고 인도네시아로 떠나기 전까지 겨울엔 빠지지 않고 스키에 전념했다. 그 열정을 업무경력에 도움 되는 쪽으로 쏟았으면 가계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같이 벌고 혼자 아껴봤자 살림살이 나아지지도 않는데 나도 남편처럼 한번 사는 인생 걱정 없이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면서 살아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그럴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인도네시아로 떠나기 일 년 전 다니던 외국계 회사가 철수를 할 계획이라 했고 남편은 일자리를 잃게 되었지만 지금 타는 차가 너무 작다며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 조금 더 큰 산타페를 사자고 했다. 아이들을 위해서란 말에 가깝게 잘 지내던 시매서께 전화해서 어쩌면 좋겠느냐 조언을 구하니
"글쎄. 근데 그걸 사서 가정이 평화롭고 행복할 수 있으면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하셨다.
나는 오래되지 않은 중고로 사자고 제안했고 남편은 혼자 중고차 매매하는 곳으로 갔다. 그가 전화를 걸어왔다.
"돈을 조금만 더 보태면 산타페 말고 소렌토를 살 수 있을 거 같은데 어때?"
차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던 나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알아서 하라고 했고 우리는 소렌토 중고를 사게 되었다.
10년이나 지나 얼마 전 그에게 왜 그때 갑자기 산타페에서 쏘렌토로 바뀐 거냐고 물으니 그의 기막힌 답이 돌아왔다.
"스키를 싣고 다니려면 좀 더 큰 차가 낫겠다 싶어서.."
우리 집의 독은 밑이 빠져있고 가장은 늘 문제 인식을 하지 못하니 나라도 정신을 차리고 살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