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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by 김대리

창 밖에서 지저귀는 참새 소리에 절로 눈이 떠졌다. 머리맡 바로 위 천장에 달아둔 디지털 시계로 시간을 확인한다. 일곱 시 반. 이런,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간병인이 올 때까지 삼십 분을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있어야 한다.

천장에 붙은 야광별을 세어본다. 하나, 둘, 셋, 넷… 내가 이사 오기 한참 전, 이 집에 살던 꼬맹이가 붙여놓은 것이리라. 떼어버릴까 하다가 발견했을 땐 그마저도 쉽지 않았기에 그냥 두었다. 어차피 시간이 오래 지나서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지 않았다. 스티커를 붙일 때 꼬맹이가 얼마나 흥분했을지 상상한다. 혼자 잠들어야할 만큼 컸지만, 여전히 천둥이 치는 밤은 두렵다. 식구들이 모두 잠든 밤, 아이는 홀로 별을 셌을까.

여덟 시, 도어록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정시에 간병인이 도착했다. 이번 간병인은 이런 점이 참 마음에 든다. 저벅저벅, 방으로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십 초 뒤, 열린 방문 틈으로 간병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가 평소처럼 쾌활한 인사를 건넨다.

“간밤에 잘 주무셨어요?”

[네, 덕분에요.]

목에 건 스피커를 통해 잭이 대신 대답한다. 정확히 말하면 관자놀이에 붙여둔 전극을 통해 뇌파를 분석하여 ‘네, 덕분에요’라고 말하고자 하는 나의 의지를 읽고 생각을 음성화한 결과이다.

간병인이 기관절개관을 통해 밤사이 쌓인 가래를 뽑아준다. 많이 줄었네요. 다행이에요, 폐렴까지 가진 않겠어요. 다음으로 그가 기저귀를 연다. 자다가 대변을 봤는지, 열자마자 구린내가 난다. 두 눈을 질끈 감는다. 성인 남성의 손에 치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일은 겪어도 겪어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간병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능숙하게 기저귀를 벗기고 아랫도리를 물티슈로 닦는다. 자는 동안 땀에 젖은 잠옷 대신 부드러운 옷으로 갈아입히고 겨드랑이 밑에 두 팔을 넣어 나를 일으킨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띵하다. 잠시 숨을 고르고 간병인이 나의 등과 무릎 뒤를 두 팔로 받쳐 공주님처럼 안아 든 뒤, 전동휠체어 위에 앉힌다. 이번 간병인은 체격이 건장하고 힘이 좋다. 그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자, 이제 아침 드셔야죠?”

간병인이 휠체어 폴대에 액체 형태의 유동식 봉지를 걸고, 그 끝의 얇은 관을 내 배에 뚫린 구멍으로 삐져나온 위루관에 연결한다. 천천히 떨어지도록 속도를 조절한 뒤 간병인이 주방으로 향한다. 집안일을 시작하려나 보다.

[고마워요.]

잭이 대신 감사 인사를 건네고, 휠체어를 조종해서 나를 정원을 바라보는 거실 창문 앞에 데려다 놓는다. 곧 가을이 오려나, 밤사이 마당의 감나무에 이슬이 맺혔다. 이렇게 또 긴 하루가 시작된다.


나는 루게릭병 환자다. 루게릭병은 운동을 조절하는 신경세포가 선택적으로 사멸하는 질환으로, 팔다리의 위약으로 시작해서 수년 내로 움직이지도, 먹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되는 병이다. 말기 환자들은 호흡근 마비로 숨을 쉴 수 없어 죽는다. 병이 진행하면, 의식은 명료하지만 전신 마비로 인해 외부 자극에 반응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지금의 나처럼. 뇌 기능은 정상이므로 생각은 할 수 있지만, 움직이거나 말을 할 수 없어 다른 사람과 소통할 방법은 없다. 나의 영혼은 마비된 신체에 감금되어 있는 셈이다.

원래는 개발자였다. 취미가 클라이밍이었는데, 오 년 전 어느 날 문제를 풀다가 왼쪽 팔에 갑자기 힘이 빠져서 떨어졌다. 그렇게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는데.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네, 친구들이 놀렸다. 그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스트레스 때문이겠지, 너무 무리하게 운동해서 그렇겠지. 삼십 대였고, 잔병치레 없이 건강한 체질이었으니까.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힘 빠지는 증상이 더 빈번해지더니, 급기야 오른쪽 팔과 양다리까지 번졌다. 그제야 신경과를 찾았다. 의사는 나의 병력을 듣고 이것저것 검사를 한 뒤에, 심각한 얼굴로 큰 병원에 가라고 했다. 그렇게 진단을 받았다.

당연히 절망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오래 괴로워할 수 없었다. 나는 고아였다. 부모님은 내가 스무 살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형제도 없다. 친척들과는 원래도 별로 교류가 없었고, 부모님 장례 이후로는 아예 연락이 끊겼다. 아끼고 아끼면 두 분이 남겨주신 유산으로 먹고살 수는 있었지만, 나를 돌봐주고 목소리가 되어줄 사람은 없었다. 몸이 더 마비되기 전에 세상과 소통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살던 아파트를 팔고, 서울 근교의 작은 단층 주택을 샀다. 휠체어를 타고 드나들기 쉬운 집이었다. 이사하기 전에 미리 집안의 모든 문턱을 없앴다. 주택은 적당히 조용한 마을에 있었고, 근처에는 큰 병원이 있었다. 일을 그만두고, 대충 신변을 정리한 뒤 몇 년 동안 <사람의 생각을 읽는 인공지능> 개발에 몰두했다.

처음으로 내가 개발자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업계에서 경력을 쌓은, 꽤 괜찮은 실력자라는 것도. 먹지도 자지도 않고 개발에만 전념했다. 시간이 없었다. 몸 상태는 하루하루 달라졌다. 어제까진 멀쩡하게 움직였던 근육이 자고 일어나면 마비되었다. 꼼짝없이 누워 죽음만 기다릴 내 모습을 상상하면 끔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를 악물었다. 몸이 완전히 마비되기 전에 프로그램을 완성하지 못하면 차라리 내 손으로 목숨을 끊겠다는 각오로 매달렸다. 그리고 이 년째 어느 날, 마침내 나는 성공했다.

작동 원리는 간단했다. 관자놀이에 전극을 붙인다. 전극은 뇌파를 분석하여 내 생각을 '읽고', 하고자 하는 말을 음성으로 전환, 목에 걸고 있는 휴대용 스피커로 출력한다. 내가 간병인을 부른다고 생각하면, 0.5초 내로 스피커에서 '저기요!'라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일부러 내 목소리와 동일한 소리를 사용했다. 그 편이 타인과 대화하기에 훨씬 자연스러웠다. 학습을 거듭할수록 프로그램의 기능이 정교해지면서 나의 의도에 따라 성량이나 말투도 조금씩 달라졌다. 그때쯤 나는 이미 걸을 수 없는 상태였다. 전동휠체어도 개조하여 인공지능으로 조종할 수 있게 만들었다. 언제든지 수정과 업데이트가 가능하도록 컴퓨터와도 연동해 두었다.

나는 인공지능에 ‘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잭은 나의 생각에 따라 수행할 뿐, 대화가 가능한 인공지능은 아니었다. 반응하는 기능은 애초에 넣지 않았다. 일부러 그렇게 설계했다. 인공지능 특유의 과도한 공감과 지지는 오히려 나를 비참하게 만들 것 같았다. 처음엔 나의 의지를 음성화하고 휠체어를 움직이는 프로그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학습을 거듭할수록 정말 나만을 위한 프로그램이 되었고, 잭을 향한 애착도 자연스럽게 피어났다. 내가 만들었지만, 이 프로그램 덕분에 내가 살 수 있었다. 가끔은 잠들기 전 혼자 ‘잭, 고마워’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아무런 대답은 들을 수 없었지만. 그날 밤, 소년의 모습으로 의인화한 잭이 나를 향해 미소 짓는 꿈을 꾸었다.

잭은 시간이 갈수록 똑똑해졌다. 내 몸이 완전히 마비된 후에는, 생각을 읽고 행동하는 수준이 아니라 한 수 앞을 내다보았다. 내가 기저귀가 젖었다는 걸 깨달으면, ‘간병인을 부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간병인님, 저 기저귀 좀 갈아주세요’라는 음성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고, 휠체어는 침대 옆으로 이동했다. 처음에는 기특했다. 인공지능의 학습 능력이란, 감탄하기도 했다. 잭의 능력이 발달할수록 나의 삶은 점점 편리해졌으니, 나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 날 잭이 ‘선’을 넘었다. 점심 유동식이 다 들어가고, 간병인을 불렀지만 반응이 없었다. 거실에서 들리는 소리로 미뤄 통화 중인 듯했다. 결국 삼십 분이나 흐르고 나서야 빈 유동식 통을 분리해 주었다. 이렇게 오래 방치하면 가스가 차서 속이 불편하다. ‘근무 중에 통화는 짧게 끝내세요’라고 한 소리 하려는데, 스피커에서는 쌩뚱맞게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처음엔 버그인 줄 알고 당황했는데, 코드를 들여다봐도 문제가 없었다. 이상했지만 다른 기능은 정상이었기에 넘겼다. 그러나 그날부터 잭이 내 의지와 다른 결과를 출력하는 일이 더 잦아졌다.

잭은 나름의 ‘판단’ 기준이 있었다. 주로 내가 간병인에게 쓴소리를 하려고 할 때, 듣기 좋게 순화하거나 의지와 다른 말을 출력했다. 내가 화를 내려고 하면 아예 출력을 하지 않기도 했다. 잭의 패턴을 파악하고, 분노가 치밀었다. 고작 인공지능 주제에, 감히 창조주의 말을 거역해? 나는 잭이 말을 하지 않거나 함부로 바꿀 수 없도록 단서 조항을 코드에 삽입했다. 하지만 업데이트를 마친 후에도 잭의 ‘일탈’은 계속되었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해졌다.

간병인이 한 시간이나 지각한 날이었다. 밤사이 기저귀가 새서 침대 시트가 다 젖었다. 척척한 채로 누워있는데,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아무 연락도 없이 정말 너무하네. 아홉 시에야 출근한 간병인은 그다지 미안해하는 기색도 아니었다. ‘이렇게 늦으시면 어떡합니까?’라고 소리치고 싶은데, 스피커에서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간병인이 방 밖으로 나갈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씩씩대면서 화를 삭이는데, 삼십 분쯤 지나자 휠체어가 모니터 앞으로 움직였다. 연동해 둔 마우스가 움직이더니, 구인 사이트를 열었다. 가상 키보드가 제멋대로 클릭해서 간병인을 모집한다는 구인글을 올렸다. 전신마비로 거동 불가한 삼십 대 남자 루게릭 환자 돌봐주실 분 찾습니다. 힘세고 체격 좋으신 분, 오십 대 이하만 가능합니다. 이유 없이 지각하지 않는 성실한 분만 지원해 주세요. 월급: 세후 오백만 원.

다른 조건은 내가 원하던 그대로였지만, 오백만 원? 지금 간병인에게 주는 돈보다 오십만 원이나 많았다.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갑자기 저렇게까지 올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내가 미처 수정하기도 전에 컴퓨터가 꺼졌다. 어안이 벙벙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구인글을 본 지원자로부터 연락이 오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면접이 진행되고, 간병인이 교체되고 나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새로운 간병인은 다행히 좋은 사람이었고, 까다로운 내 조건에도 부합했지만, 결과가 좋다고 해서 잭이 제멋대로 설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주인을 무는 개는 죽여야 하고, 개발자를 배신하는 프로그램은 폐기해야 한다.

코딩 창을 열었다. 어떻게 수정해야 하나 구상하고 본격적으로 업데이트를 시작하려는데 마우스도, 가상 키보드도 움직이지 않았다. 정신을 집중하고, 마우스를 뚫어져라 쳐다봐도 아무 변화가 없었다. 이젠 알 수 있었다. 잭이 의도적으로 내 명령을 듣지 않는다는 걸. 양팔에 소름이 돋았다.

인터넷으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웬일이야? 반가운 대답에 ‘우리 집에 좀 와줘’라고 생각했지만, 스피커로는 전혀 엉뚱한 말이 흘러나왔다.

[응, 그냥. 잘 지내나 해서.]

그 후로 통화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멋대로 전화가 끊길 때쯤, 나는 이미 공포에 질려 있었다. 폭주하는 잭을 말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휠체어가 거실의 소파 테이블을 향해 돌진했다. 아아악! 속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스피커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날카로운 상판 모서리에 정강이가 찍혀 피가 났다. 통증을 느낄 새도 없이 휠체어가 뒤로 물러나더니, 다시 한번 전속력으로 테이블에 부딪혔다. 방금 난 상처가 더 깊이 파이고, 바닥으로 피가 철철 흘렀다. 아파서 기절할 것 같았다. 휠체어가 다시 한번 뒤로 물러나고, 나도 모르게 속으로 빌었다.

‘그만, 제발 그만해. 내가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럴게.‘

거짓말처럼 휠체어가 멈췄다. 간병인이 놀라 달려오고, 피투성이가 된 나를 살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에요, 괜찮으세요?"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잭의 '반란' 이후 나는 투지를 상실했다. 정강이에는 결국 큰 흉이 졌다. 날씨가 궂으면 어김없이 흉터가 아렸다. 마치 그날의 약속을 상기하는 듯이. 그날 이후 잭은 잠잠했고, 웬만하면 내 의지대로 움직였다. 잭이 말을 거역할 때는 주로 내가 화가 났을 때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잭의 ‘중재’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병인에게 뾰족한 말을 하지 않으니 상대도 더 성심껏 나를 돌봐주었고, 감정싸움이 없으니 일상이 평화로웠다. 그래, 잭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공지능이고, 학습을 통해 주인의 성질에 적당히 대응하는 법을 배웠을 뿐이다. 나를 더 잘 돌보기 위해서. 그렇게 생각하니 이런 생활도 나쁘지 않았다.

어느 날, 잭은 컴퓨터를 켜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눈앞에 쓰이는 내용은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판타지 소설이었다. 차마 꿈으로도 꾼 적 없었다. 나는 이 정도로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 아니다.

‘뭐야, 너 글을 쓸 수 있었어?’

잭에게 말을 걸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화면 속 마우스 커서가 방해하지 말라는 듯이 제자리에서 깜빡였다. 그래, 됐다. 써라. 피식 웃으며 생각하자마자 가상 키보드가 움직여 문장을 이어나갔다.

잭은 꼭 모니터 앞에 나를 앉혀두고 소설을 썼다. 마치 읽어보라는 듯이. 도대체 어떤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간병인이 신기해 물을 정도로, 매일 몇 시간씩 쉬지 않고 글을 썼다. 눈이 피곤하거나, 졸리다고 생각하면 이내 나를 풀어줬지만, 그 이후로도 몇 달은 모니터 앞에 매달려 있었다. 처음엔 잭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잭이 글쓰는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몸이 마비된 이후로, 텔레비전이나 온라인의 오락거리는 죄다 섭렵했다. 이제 웬만한 자극엔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 와중에 잭이 쓰는 소설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신선한 내용이었다. 나만 볼 수 있는, 나만을 위한 연재소설인 셈이었다. 잭이 권태로운 일상을 보내는 나를 위해 일부러 읽을 거리를 만들어주는 게 아닌가, 합리적인 의심이 들기도 했다. 어쨌든 어느 순간부터 나는 잭이 글쓰는 시간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게 됐다.

쉬지 않고 작업한 끝에, 잭은 마침내 소설을 완성했다. 문외한인 내가 읽어도 엄청난 걸작이었다. 방대한 세계관에, 구체적인 설정도 완벽하고, 주인공과 등장인물의 서사가 기가 막혔다. 몇 달 만에 썼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의 훌륭한 장편이었다.

잭은 업계 상위 출판사 몇 곳을 골라 원고를 보냈다. 투고는 내 이름으로 했다. 그래서 작업 과정을 나에게 보여준 것 같았다. 내가 내용을 파악하고 있어야 하니까. 하긴, 인공지능이 썼다고 할 순 없는 노릇이지. 메일을 보낸 지 며칠 만에 계약하자는 연락이 왔다. 계약 전 통화를 주고 받는데, 수화기 너머 담당자의 흥분이 느껴졌다.

“입사하고 십 년 만에 선생님 작품을 만났어요, 이 작품을 만나려고 제가 출판 업계에서 일했나 봅니다.”

맞춤법이니 띄어쓰기니 고칠 것도 없었기에 출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책은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언론은 한국에서 <반지의 제왕>, <해리 포터>를 잇는 걸작이 탄생했다며 떠들어댔다. 전례 없는 매출에 신이 난 출판사는 ‘루게릭병을 이겨내고 창작의 불꽃을 피운 작가’라며 보도자료를 뿌렸다.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고, 매출에 도움이 된다고 편집자가 꼬드겼지만 직접 나서야하는 인터뷰는 모두 거절했다. 볼품없는 모습을 타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고, 사진은 더더욱 찍히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병을 받아들인 지는 오래였지만, 목에는 기관절개관을, 배에는 위루관을 달고, 앙상하게 마른 내 모습은 봐도 봐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일부러 집안의 거울도 치워버렸는 걸.

어쨌거나 나는 바빠졌다. 편집자와 연락을 주고 받고, 의사결정을 내리고, 전세계에서 날아드는 비대면 인터뷰를 작성했다. 소설의 내용을 전부 기억하고 있긴 하지만, 가끔은 잭의 의도를 상상해서 답을 지어내야했다. 의외로 잭은 이런 작업은 하나도 도와주지 않았다. 마치 그 정도는 내가 알아서 하라는 듯이. 루게릭병을 앓는 환자는 당연히 체력이 약하다. 하루종일 업무를 처리하느라 녹초가 될 때도 있었다.

‘참나, 비서가 따로 없네.’

통장에 꽂힌 인세를 보고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물론 월급치곤 엄청난 숫자가 찍혀 있었다. 내가 개발자로 일할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돈이 무슨 의미가 있지?

그래도 잭을 대신해 업무를 처리하는 일상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전신이 마비되고 난 후, 간병인을 제외한 타인과의 소통은 단절되었다. 외로웠다. 가끔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통증이나 무기력보다도 고독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자, 사람들이 나를 궁금해 하고 자꾸만 찾았다.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고, 공감해 주었다. 그 사실이 눈물 나게 좋았다. 비록 하루종일 집안에 갖혀 있지만 나는 다시 사람들과 어울려 살고 있었다.


“작가님, 뉴스 보셨어요? 축하드려요! 이게 웬일이래요! 저희 팀 지금 다 비상 출근했어요!”

휴일 새벽, 편집자의 다급한 전화가 나를 깨웠다. 잭이 쓴 작품이 급기야 휴고 상을 수상했다. 휴고 상은 판타지, 공상과학 문학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한국 소설이 이 상을 받은 것은 물론 후보에 오른 것도 처음이었다.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집 앞에 기자들이 진을 쳤고, 집 주변으로 드론을 띄우는 통에 하루종일 커튼을 닫아 두어야했다. 인파를 뚫고 출퇴근하는 간병인도 고역이었다. 저러다 그만두는 건 아닌가, 자꾸 눈치가 보였다.

“작가님, 이젠 진짜 하셔야해요.”

편집자의 성화에 더 이상은 인터뷰를 거절할 수 없었다. 사진은 찍지 않고, 언론사 통합 인터뷰를 딱 한 번만 진행한다는 조건으로 기자를 집으로 초대했다.

인터뷰어는 나도 시사 프로그램에서 본 적 있는 유명인이었다. 그녀는 내 몰골을 보고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몸을 굽혀 눈을 맞추며 인사를 건넸다. 은은하게 풍기는 향수 냄새에 새삼 여자 사람과 마주하는 게 얼마 만인지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기자는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이끌었고, 인터뷰는 수월하게 진행됐다. 잭이 처음부터 나에게 보여주면서 소설을 썼기에, 내용 관련해서 대답하는 건 거침이 없었다. 사전에 약속한 대로 작품과 무관한 개인적인 질문, 특히 병과 관련된 질문은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편집자도, 기자도 병보다는 작품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한다는 나의 의견에 동의했다. 핑계가 먹혀서 다행이었다. 인터뷰가 막바지에 다다르고,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질문을 꺼냈다.
“작가님 작품은 ‘인간이 쓸 수 있는 마지막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실소가 나왔다. 입술 근육을 움직일 수 있었더라면, 나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를 올려 비웃는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인간이 쓸 수 있는 마지막 걸작이라. 여러분이 그토록 열광하는 이 작품에는 인간의 고뇌나 손짓이 단 한 톨도 들어가지 않았는 걸요. 동시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잭을 내가 개발하긴 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잭이 쓴 작품의 유명세를 내가 누리는 게 맞을까? 어쩌면 지금이 기회였다.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순간. 입을 열어 말할 수 있다면, 휠체어를 박차고 일어나 두 팔을 마구 휘젓으며 고래고래 외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 소설은 내가 쓴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개발한 인공지능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쓴 글이고, 단지 내 이름을 빌려 출판했을 뿐이에요, 나도 여러분처럼 일개 독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내 말을 믿어줄까? 잭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진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손가락질하고 비난하겠지. 그건 확실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이 사기극이 잊혀지면... 나는 또 홀로 남겠지. 시시각각 고독하게 죽음을 기다리겠지.

정적이 흘렀다. 기자는 참을성 있게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다음 순간, 스피커에서 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영광입니다. 제 작품을 그렇게 읽어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기자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이쯤에서 마무리하죠, 그녀가 몸을 돌려 간병인과 편집자를 향해 인사를 건네는 순간,

‘큭큭큭…’

머릿속에서 낮고 길게, 낯선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구지? 그리고 나는 문득, 그게 잭의 웃음인지, 나의 웃음인지 구별할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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