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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by 김대리

장마가 끝난 지 한참이건만, 아침부터 주룩주룩 비가 내린다. 창문을 도닥이는 빗소리가 좋아서, 한참을 창가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원장님, 이 과장님께서 마지막 인사하러 오신답니다.”

아, 그게 오늘이었나. 흘깃 책상 위 달력을 본다. 빨간 동그라미까지 그려놓고도 깜빡했다. 요즘 참 정신없이 바쁘다.

“네, 십 분 뒤에 내려갈게요.”

간호 부장이 나가고, 원장실 안쪽 문을 열어 선대 원장실로 들어간다. 아버지 저 왔어요.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비서에게 목례를 하며 아버지에게 인사를 건네지만, 그는 고개도 들지 않고 분주히 서류를 검토 중이다. 책상 위 서류더미를 슬쩍 보니, 2000년 대 날짜가 적혀 있다.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진다. 아마 오늘은 저 시대로 떠나셨나 보다.


6.25 전쟁 직후 진주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서울의 내로라하는 의대를 졸업하고 외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작은 의원을 차렸다. 1980년 대, 진주에는 괜찮은 병원이 없었다. 고향 사람들이 아플 때, 언제든 진료받을 수 있는 병원을 차리는 것은 아버지의 오랜 꿈이었다. 아버지는 밤낮없이, 주말도 없이 환자를 치료했다. 아니지, 교회에 가는 주일 아침에는 문을 닫았다. 우리 집은 진료소 위 2층이었는데, 늦은 밤 환자들이 문을 두드리면 아버지가 옷을 챙겨 입고 내려가 봐주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버지의 진심은 통했고, 쪽방에서 시작한 의원은 몇 년 만에 진주 사람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곳으로 거듭났다. 몰려오는 환자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아버지는 시내의 건물을 빌렸다. 그쯤부터 입원 환자도 받기 시작했고, 후배 의사도 여럿 두었다. 이천 년대에 들어오면서 병원은 신관과 별관을 증축할 만큼 커졌고, 종합병원 인증도 받았다. 이제는 진주에서 가장 큰 병원이었다.

나는 장남이었고, 의대를 졸업하고 아버지를 따라 외과 의사가 됐다. 진로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도 한 적 없었지만, 아버지에게도, 나에게도 숨 쉬듯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 다른 길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원래 아버지는 병원을 나에게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에 환원할 생각이었다. 입버릇처럼 네 것이 아니니 욕심내지 말라고 말했다. 나도 물려받을 생각이 없었다.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자마자 이 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했지만, 일을 배우며 아버지를 거들 생각이었지, 원장 자리를 욕심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십 년 전쯤 아버지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지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잘 모르는 사람에게 병원을 넘길 수는 없다는 직원들의 뜻에 따라 내가 원장이 되었다.

아버지가 기력을 회복하면 계속 진료를 볼 수 있게 원장실 옆에 선대 원장실을 두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예전 같지 않았다. 다행히 거동은 할 수 있었으나, 뇌출혈 후유증으로 인지 기능이 많이 떨어졌다. 아버지의 시계는 이십 년 전에 멈췄다. 아버지는 본인이 여전히 현역이고, 한창 환자를 진료 중이라고 믿었다. 그는 아침마다 집무실에서 환자 차트를 검토하고, 하루 두 번 회진을 돌았다. 차트 속 환자는 이미 오래전에 병원을 떠났지만,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병실의 환자들에게 상태를 묻고, 말을 걸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버지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그즈음 전용 비서를 구했다. 아버지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일상'을 유지할 수 있게 돕는 역할이었다. 고맙게도 직원, 환자, 보호자들도 장단을 맞춰주었다. 평생을 지역사회에 헌신한 늙은 의사에게 주민들이 해줄 수 있는 선물이었다. 원장님, 오늘도 날이 참 좋지요. 사람들은 아버지를 마주치면 먼저 다정하게 인사를 건넨다. 언젠가 아버지의 상태가 악화될 것이고, 지금처럼 원장 노릇을 하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그때까진 아버지의 일상을 지켜드리고 싶다.

병원을 물려받고 전문의를 대거 채용했다. 오래도록 수술만 전문으로 하는 외과 병원이었지만, 도태되지 않으려면 시장의 흐름에 발을 맞춰야 했다. 건강검진센터도 짓고 호스피스 센터도 지었다. 김대중 정권 때 규제 철폐라는 미명 하에 진료권 제도를 폐지한 뒤로, 사람들은 사는 곳에 관계없이 본인이 원하는 곳에서 진료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제도가 바뀌고 삼십 년도 채 되지 않았으나, 현장은 많이 바뀌었다. 이제는 진주 사람들도 큰 병에 걸리면 모두 서울로 간다. 전신 마취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바로 서울 큰 병원에 보여줄 진료 의뢰서를 써달라고 한다. 실력 있는 외과 전문의를 고용해도 수술받을 환자가 없었다. 병원은 나날이 적자가 났다. 병상을 줄일까도 생각했지만, 아버지가 한평생 쌓아온 업적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시장이 바라는 대로 적당한 타협을 했다. 장례식장도 운영하고, 로비 명당자리는 카페나 빵집에 세를 주었다. 부 수입이 들어오니 숨통이 트였다. 그즈음에 호스피스 센터 문을 열었다. 아버지의 숙원 사업이었다. 사람은 죽음을 앞두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익숙한 곳에서 삶을 마감하고 싶은 것은 동물의 본능이다. 아버지는 주민들의 마지막을 지켜주고 싶어 했다.

호스피스 센터를 운영하기 위해서 유능한 내과 의사가 필요했다. 연륜 있는 의사도 좋지만, 열정적이고 에너지가 좋은 의사를 두고 싶었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환자들의 고통을 공감하고, 센터 운영 취지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지방에서 의사를 채용하기는 몹시 어렵고, 좋은 의사를 채용하기는 더욱 어렵다. 수소문 끝에 의대 동기의 아들을 소개받았다. 이 과장은 서른 초반으로, 부산에서 의대를 졸업한 내과 전문의였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면접에서 초롱초롱 빛나던 그의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로부터 2년, 그는 열심히 일했다. 성실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직원들도, 환자들도 모두 그를 좋아했다. 덕분에 센터도 자리를 잡고 안정되던 중이었다. 직원들 사이에 이 과장이 그만둔다는 소문이 퍼졌다.

내가 먼저 불러 면담을 했다. 서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를 기다리면서 할 말을 생각했다.

‘네 아버지랑 나 사이의 친분이 얼만데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끝까지 버텨봐야 하는 게 아니냐.’

친구 아들이어도 평소엔 깍듯하게 존칭을 썼지만, 이번엔 좀 친근하게 반말을 해볼까? 어쨌거나 그가 떠나면 아쉬운 건 나랑 병원이다. 월급이 부족했을까? 하긴 지방에서 의사를 모셔오려면 서울보다 최소 두 배는 더 줘야 하는데, 병원이 어렵다는 핑계로 넉넉하게 챙겨주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병원 재정을 가늠해 본다. 당장 올해부턴 어렵겠지만 내년부턴 기본급의 이십 퍼센트는 올려줄 수 있다고 이야기해야지.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린다. 들어오세요.

면담 시간에 맞춰 이 과장이 원장실로 들어왔다. 주눅 들고 죄송스러워할 줄 알았는데, 웬걸, 당당한 표정이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이런가, 나도 모르게 빈정이 상했다.

“그만둔다며.”

불쑥 반말이 나왔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 과장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 듯,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다음 달까지 일하고 떠나려고 합니다.”

“어디로 가게?”

“고민 중입니다. 부산으로 갈까, 아니면 서울로 갈까.”

준비해 둔 말을 꺼냈다. 혹시 그동안 서운하게 했다면 미안하다. 아들 같아서 내가 너무 편하게 생각한 것 같다. 계속 일해준다면 내년부턴 꼭 연봉을 올려 주겠다. 병원 사정 뻔히 알지 않냐. 나에게, 병원에, 진주에 젊은 의사가 꼭 필요하다. 그의 사명감에 호소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젊은이의 무심함, 치기에 대한 원망이 묻어 나왔다. 진지한 얼굴로 내 이야기를 경청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원장님, 지난 2년 간 저한테 정말 잘해주셨습니다. 원장님 뿐만 아니라 병원 분들 모두 친절하셨습니다. 여기서 일하는 동안 행복했고,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서운한 것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연봉도 아쉽지 않습니다. 돈 때문에 떠나는 건 절대 아닙니다.”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기엔 그의 눈빛이 몹시 진실하다. 그럼 왜…

“아버진 제가 크리스천으로서 봉사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시지만, 저는 봉사가 제 인생의 전부이길 바라지 않습니다. 물론 봉사는 계속하겠으나, 제가 꾸준히 지속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제가 진정으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고향에서 일하고, 진주 주민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살펴 주는 것도 고귀하고 가치 있는 일이지만, 저의 열정과 관심사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도 오랫동안 생각한 듯 거침이 없다. 청산유수처럼 말을 잇는다.

“그게 뭔데?”

“저는 사람을 건강하게 살리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생명을 연장하거나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도록 돕는 일보다는, 당장 쓰러진 환자를 살리고, 두 발로 병원 밖으로 걸어 나가게 해주고 싶어요. 저는 그럴 때 더 보람을 느낍니다.”

이 과장은 대도시의 큰 병원에 가서 전임의를 하겠다고 했다. 아마도 순환기나 소화기를 전공할 것 같다. 하긴 심근경색이나 위궤양 출혈로 온 환자는, 응급실에서는 다 죽어가지만 적절하게 치료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나아서 퇴원한다. 건강했던 사람을 다시 멀쩡하게 회복시켜 주는 일도 짜릿한 보람이 있다. 나도 그랬다. 수술이나 시술을 하는 과 의사라면 누구나 이 과장의 뜻을 이해할 것이다.

맞은편에 앉은 젊은 의사를 새삼 다시 본다. 주름 하나 없는 얼굴이 참 앳되다. 이제 겨우 서른 초반, 한창 피 끓을 나이에 고향도 좋지만, 이 작은 도시에 와서 참 외롭고 심심했을 것이다. 사람이 궁하다는 나의 욕심에, 아들이 본인처럼 봉사하는 크리스천의 삶을 살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욕심에, 젊은 친구가 괜히 고생한 건 아닌가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애초에 호스피스 센터를 운영하기에는 그의 피가 너무 뜨거웠던 걸지도 모른다.

입을 열었다가 그만 다물었다. 더 이상 붙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원치 않는 사람을 억지로 붙잡아둘 방도는 없다. 정에 호소해서, 병원 사정을 이유로 사직을 몇 달 보류한 들, 이미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사람이 더 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과장에게도, 직원들에게도, 환자들에게도 좋지 않은 선택이다.

면담을 마치고, 혼자 원장실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패기 넘치는 젊은이의 결정이 당돌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동시에 부럽기도 했다. 나는 왜 진지하게 진로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철이 든 다음부터 줄곧 아버지를 따라 의사가 되어야 하는 줄 알았다. 전공을 선택할 때도 의심 한 번 없이 외과를 골랐다. 너무 힘들지 않겠니, 몸이 좀 편한 과를 해보면 어떻겠냐,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아버지의 못마땅해하는 눈빛 한 번에 잠잠해졌다. 괜찮아요, 어머니. 저는 외과가 어울려요. 전공의 시절부터 병원에 살다시피 했지만, 몸이 아무리 힘들어도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었다. 내가 선택한 길이니 책임지는 게 당연하다고 믿었다.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고 진주로 내려왔을 때, 아버지는 어깨를 다독였다. 내일부터 출근해라. 건넨 말이라곤 그게 전부였다.

내가 이 과장 나이로 다시 돌아간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 진주를 떠나 대도시로 갔을까? 시간을 더 거슬러 전공을 다시 선택한다면, 그때도 외과를 고를까? 애초에 열아홉의 나는 또 의과대학에 진학할까?


이 과장과 함께 병원을 한 바퀴 돌며 직원들과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는 떠나기 전에 아버지를 뵙고 꼭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 상태 때문에 망설였지만, 너무 간곡하게 부탁하기에 그러도록 했다. 선대 원장실에 들어서자 아버지가 이 과장을 바라보지만, 누군지 모르는 눈치다. 눈에 예전 같은 총기에 없다. 문득 환자를 두고 아버지와 옥신각신 논쟁을 벌이던 시절이 그리워진다.

“원장님, 저 이제 떠납니다. 그동안 감사했어요.”

이 과장이 아버지의 주름진 손을 꼭 잡고 감사 인사를 한다.

“어디가?”

“저 공부 더 하려고요.”

“응, 그래. 그래야지.”

누군지도 모르면서 아버지는 의사는 평생 공부해야 하는 직업이라며, 항상 학습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고 훈계를 늘어놓는다. 에이, 이제 됐어요. 일장 연설이 민망해 이 과장을 끌고 나온다. 많이 배웠습니다. 건강하세요. 그가 마지막 인사를 건네지만, 아버지는 또 환자 차트를 검토하느라 여념이 없다. 책상 앞에 앉아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어 우리를 내보낸다.

“고마웠어요,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직원들과 함께 병원 앞마당에서 마지막으로 이 과장을 배웅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비가 몰아치더니 어느새 해가 나왔다.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그의 옆에 화려한 네온색의 스포츠카가 서 있다. 새 출발한다고 한 대 뽑았나 보다. 진주에서 일하는 내내 차도 한 대 없이 뚜벅이였는데. 솔직해서 좋네, 남몰래 웃음이 났다.

가끔 놀러 올게요. 허울뿐인 인사치레를 남기고 이 과장이 떠났다. 손을 흔들어 인사하던 직원들이 하나둘 몸을 돌려 병원 안으로 들어가고,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고작 아침 열한 시인데, 차를 몰아 멀어지는 지평선으로 노을이 지는 듯한 쓸쓸함이 감돈다. 이별은 남겨진 사람에게 열패감을 안긴다. 떠나는 사람 앞에는 새롭고 신나는 모험이 펼쳐질 텐데, 나만 오늘도, 내일도 똑같은 일상을 반복한다. 그의 설렘만큼 내 손에 쥔 것의 빛이 바랜다. 원장님, 이제 들어가셔야죠. 간호 부장이 옷깃을 잡아 끈다. 못 이기는 척 뒤돌아 섰다.

회진을 돌려고 내 앞의 환자 명단을 확인하는데, 하루 사이에 환자가 열 명이나 늘었다. 이 과장님 환자분들까지 원장님이 보셔야 해서요. 옆에서 수간호사가 우물쭈물하며 내 눈치를 본다. 공고를 낸 지 한 달이 넘었는데, 이 과장이 떠날 때까지 후임을 구하지 못했다. 진주 같은 지방 소도시에서는 전문의를 고용하는 게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 이미 과로에 시달리고 있는 다른 과장들에게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아서 오롯이 내가 떠안았다. 어쩌겠는가, 한동안 또 고달프겠다.

“할머니, 잘 주무셨어요?”

병실로 들어서며 되려 활기차게 환자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내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환자도, 보호자도, 직원도 불안해하지 않는다. 새로운 의사는 언젠가 들어올 것이다. 그때까지 안온한 날들을 보내야 한다. 삼십 대의 욕망이 성장과 영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오십 대의 욕망은 지금까지 이룬 것을 보호하고 유지함으로써 충족된다. 언젠가 이 과장도 이해하겠지.

그때쯤 나는 여전히 여기 있을까, 아니면 나도 누군가의 빈자리가 되어 있을까. 떠나는 이가 있으면 남는 이가 있고, 남았던 이도 언젠가는 자리를 비운다. 병원도 어차피 작은 생태계이고, 그 속의 생물들의 선택에 따라 이어져 왔다. 생각을 떨치며 걸음을 옮긴다.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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