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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들이여

by 김대리

오후 세 시, 오늘도 어김없이 소란이 벌어졌다. 아정이 또 조장에게 혼나고 있다. 이번에도 화장실 문제다.

“어떻게 된 게 화장실만 갔다 하면 함흥차사야!”

아정은 척수장애인이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어릴 때부터 걷지 못했다고 했다. 그녀는 근무하는 여덟 시간 동안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딱 두 번 화장실에 다녀오는데, 매번 공장 부지 밖 식당 건물의 화장실을 이용한다. 휠체어로 공장 앞 공터를 가로지르고 대문을 통과한 뒤 식당 건물을 빙 둘러 가야 하므로, 왕복으로 최소 십오 분 이상 걸린다. 그래봤자 서너 시간에 한 번 자리를 비울 뿐이지만, 한창 바쁜 시간에 부하 직원이 자리를 비우는 것이 조장은 거슬렸나 보다. 일주일 사이 벌써 세 번이나 면박을 주었다.

“저기 장애인 화장실 있잖아! 왜 굳이 거기까지 가서 오줌을 싸?”

조장이 공장 내 장애인 화장실을 가리키며 아정을 몰아붙인다. 직원들은 못 들은 척 바쁘게 손을 움직이지만, 너는 모두의 귀가 그쪽을 향해 쫑긋거리는 걸 느낄 수 있다.

공장 안에 장애인 화장실이 있기는 하다. 회사는 지체장애인 중에서도 두 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척수장애인은 고용하는 편이었고(물론 칼 같이 법정 의무고용률 3.1%를 넘기지 않는다), 상시 직원 50명이 넘으면 장애인을 위한 별도의 화장실, 경사로 등을 마련해야 했다. 공장 내 작은 휴게 공간이 남성 전용 장애인 화장실로 바뀌었다. 여성 전용 장애인 화장실은 애초에 없었다.

공장은 오래도록 ‘남자의 일터’였다. 일 년 전 너와 아정을 비롯한 여성 기술직 다섯 명이 입사했을 때, 언론은 창사 이래 처음으로 ‘금녀의 벽’이 무너졌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중에서도 여성이자 장애인인 아정은 ‘혁신적 변화’, 그 자체였다. 신규 입사자를 위한 교육이 끝날 무렵, 공장 내 장애인 화장실의 남성 표지판이 소리소문 없이 남녀공용 표지판으로 바뀌었다. 좌변기가 하나뿐이긴 해도, 남녀공용 화장실이니 아정도 여느 남성 직원처럼 공장 내 장애인 화장실을 쓰라는 것이 조장의 논리였다.

아정은 윽박지르는 상사의 얼굴을 차분하게 올려보고 있다. 미간 한 번 찌푸리지 않는다. 조장이 잠시 숨을 고르는 틈을 타, 그녀가 또렷하게 말했다.

“남녀공용 화장실은 쓰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누가 버튼 잘못 누르면 문이 열릴 수도 있는데, 저긴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구조잖아요. 전 불안해서 못 쓰겠어요.”

“아, 거참. 누가 문을 연다고 그래? 아정씨 오줌 싸는 거 보고 싶은 사람 여기 아무도 없어! 자, 다들 집중!”

그놈의 오줌, 오줌. 너의 인상이 절로 찌푸려질 때쯤, 조장이 갑자기 손뼉을 쳐서 주변 직원들의 시선을 모은다.

“앞으로 아정씨 화장실 쓰는 동안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아요! 어기면 이 시간부로 인사고과에 반영합니다! 다 들었죠? 나 분명히 얘기했어요!”

조장의 말에 몇몇 직원이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자, 됐지? 아정씨도 앞으로 공장 밖 화장실 사용 금지예요.”

조장이 으름장을 놓지만, 아정은 입을 꾹 다물고 대꾸도 하지 않는다. 조장이 못마땅한 얼굴로 사라지고, 그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작업에 집중한다. 숨 죽인 채 눈치만 보고 있던 네가 속으로 혀를 내두른다. 쟤도 참, 어지간하네.


너는 지난해 아정과 입사한 ‘독수리 오 자매’ 중 한 명이다. 네가 동기들보단 연배가 좀 있는 편이다. 십 년 전, 너는 OO자동차 협력 업체에 입사했다. 일을 시작하고 몇 년 뒤, ‘협력업체에서 2년 이상 일한 사람은 OO자동차 본사에 지원할 수 있다’는 공고가 났다. 함께 일하던 남성 동료들은 여럿 대기업의 정규직이 됐다. 너도 해마다 이력서를 냈다. 안 될 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오기로 넣었다. 결과는 매번 불합격이었다.

미련이 사라질 때쯤, OO자동차 부산 공장의 ‘2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불법 파견을 인정받으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소송이 시작되고 무려 십 년 만에 나온 판결이었다. 판결 이후 너도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지금은 OO자동차 엔진공장 생산관리부에서 일한다. 네가 속한 부서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부품을 조립해 자동차에 들어가는 엔진을 만든다. 너는 일을 좋아한다. 특히 임팩 드릴을 써서 깔끔하게 볼트를 조일 때 느끼는 ‘손맛’이 좋다. 어리바리한 남성 신입이 너를 누나라고 부르며 따를 때면 자부심도 느낀다.

너는 열혈 노조원이다. OO자동차에 직접 고용되자마자 노조에 가입했다. 노조 설립이래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여직원이었다. 대학시절 학생운동이나 사회운동에 딱히 관심은 없었지만 원청에서 일하게 되면 노조는 해야지, 막연하게 생각해 왔다. 본격적인 교육도 받고, 가끔 작은 시위에 동원되기도 했지만, 네가 체감하기에 노조 생활이라는 것은 친목 도모 모임이나 대학시절 동아리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일하는 공장이 속한 지부에는 정기적인 배구모임이 있었다. 또래 노조원들과 함께 구슬땀을 흘리며 운동 하는 것도, 시합이 끝난 뒤 다 같이 모여 술 한 잔 걸치는 것도, 술김에 늘어놓는 상사 험담도 즐거웠다. 어느덧 노조 활동은 힘든 근무 중 오아시스 같은 존재가 되었다. 노조 덕에 자연스럽게 친하게 지내는 동료도 생겼고, 계속 사람들이 모이고 움직이는 조직에 속해 있다는 게 든든했다. 너는 협력업체에서 일하는 동안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소속감을 느꼈다. 번듯한 대기업 직원이라는 게 자랑스러웠고, 노조라는 울타리는 안락했다. 어쩌면 너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점심시간, 너와 동료들은 공장 앞 컨테이너에 모여 도시락을 먹는다. 다 같이 둘러앉아 도시락 뚜껑을 여는데, 아정이 다가와 말한다.

“전 앞으로 도시락 안 먹고, 대신 점심시간에 화장실 다녀올게요. 제 휴게 시간에 가는 거니까, 먼 화장실 가도 괜찮죠?”

아정은 본인 할 말만 하고 휠체어를 돌려 나가 버린다. 조장의 얼굴이 단숨에 울그락불그락해졌다. 저, 저! 당장이라도 따라나설 듯 조장이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동료들의 만류에 못 이기는 척 다시 앉았다. 점심까지 거르고 화장실에 가겠다는데, 그것까지 뭐라고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요즘 애들은 진짜,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당최 알 수가 없어. 조장이 넋두리처럼 푸념하고, 둘러앉은 동료들이 한 마디씩 거든다. 맞아, 하나도 손해 보려고 하는 법이 없다니까. 어찌나 되바라진지, 말 섞기도 무서워. 너는 굳이 말을 보태지 않고, 묵묵히 식사에 열중하는 척한다. 열어놓은 문 틈으로 공장 대문을 나서는 아정의 뒷모습이 보인다. 점심도 못 먹고 일할 그녀가 신경 쓰인다.

식사 후 쉬는 시간, 아정이 공장 앞 아름드리나무 밑 그늘에서 홀로 쉬고 있다. 네가 조용히 다가가 오전 간식으로 나왔던 빵과 우유를 내민다. 아정이 가볍게 목례하고 음식을 받는다.

“고생이 많아요. 조장님도 참, 화장실 그게 뭐라고 저렇게까지 한대.”

네가 아정의 눈치를 보며 말을 건네 보지만,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고, 기회를 엿보다 네가 조심스럽게 권한다.

“아정씨 노조 가입 안 했지? 이참에 들어와서 노조 통해서 얘기해 보면 어때?”

아정이 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당황한 네가 횡설수설 말을 잇는다.

“아니, 개인이 건의하는 것보다 노조에서 말하면 힘도 더 실리고, 또…”

“전 그런 거 안 해요.”

단호한 거절에 네 얼굴이 달아오른다. 괜한 말을 했나 보다.

“아니, 나는 부담주려던 건 아니고…”

황급히 손사래를 치는데, 아정이 휠체어 바퀴를 굴려 자리를 벗어난다. 네가 어쩔 줄 몰라 앞만 바라보고, 멀어지던 아정이 고개를 돌려 묻는다.

“조장님도 노조 소속 아니에요?”

“아, 그렇지…?”

네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아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공장으로 들어가 버린다. 민망함에 네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날 저녁 노조 회관 맞은편의 단골 술집, 삼삼오오 둘러앉은 사람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일주일 전 새벽, 장장 열여덟 시간의 협상 끝에 얻어낸 성과를 축하하느라 모인 자리다.

“우리가 해냈다!”

지부장이 우렁차게 건배사를 외치자 사람들이 앞다퉈 술잔을 부딪힌다. 테이블마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 달 전부터 공장은 술렁였다. 임금 인상안을 두고 사측과 노조가 팽팽히 맞섰다. 노조는 대법원의 판례를 근거로 “조건부 정기 상여금도 통상임금에 포함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임금체계 전면 개편을 요구했다. 사측은 경영난을 들먹이며 난색을 표했고, “10% 이상 인상은 절대 불가”라며 못을 박았다. 십수 차례의 교섭이 무위로 돌아가는 동안, 조합원들 사이에서는 ‘파업밖에 답이 없다’는 분위기가 고조됐다.

너는 휩쓸렸다. 하청에서 일할 때는, 밤낮, 주말 없이 일하면서도 한 달에 이백만 원 이상 손에 쥐어본 적이 없었다. 원청에 직접 고용된 후에도 살림살이가 썩 좋아진 편은 아니었지만, 내로라하는 대기업에서 일하는 직원이라는 자부심은 돈보다 더 큰 만족을 주었다. 그러나 노조 모임에 참석할수록, 술자리에서 ‘돈 밖에 모르는 경영진 놈들’이라는 비난에 익숙해질 때쯤, 스스로의 노동의 가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네가 부품을 조립하여 만든 엔진은 고급 세단에 들어갔다. 신형 자동차의 가격은 일억이 훌쩍 넘었다.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자동차는 불티나게 팔렸고, 신차 출고까지는 일 년 이상 걸렸다. 삼 분기가 지나기도 전에, OO자동차가 연 목표 매출을 달성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노조가 경영난이라는 회사의 핑계를 믿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노사가 협상을 이어가는 동안, 문 밖에서 너와 동료들은 피켓 시위를 벌였다.

“임금 인상 쟁취하자!”

“우리가 없으면 OO자동차도 없다!”

반복적으로 구호를 외치며, 너는 시나브로 세뇌되었다. 너는 OO자동차이며, OO자동차는 곧 너였다. OO자동차의 가치를 드높이고 싶다면, 회사는 너를, 노동의 가치를 인정해야 했다.

노조는 결국 파업을 선포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공장을 최대한으로 가동해도 신차 출고 일정을 맞출 수 없었다. 경영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 소문이 돌았고, 노조는 승리를 확신했다. 파업 전야, 노사 대표가 지방노동위원회에 모였다. 양측은 밤샘 협상을 벌였다. 날이 밝아도 결론은 나지 않았고, 조합원들은 피켓을 손에 쥔 채 건물 밖에서 시위를 지속했다. 너도 노조의 유니폼을 입은 채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예정된 파업 개시 직전, 임금 20% 인상 합의안이 발표됐다. 사측의 ‘백기투항’이었다.

“자, 승리의 잔을 들어라!”
분위기는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목청껏 승전고를 울리면, 너 나 할 것 없이 술잔을 들어 올렸다. 짠하는 소리와 함께 맥주 거품이 튀고, 누군가는 즉석에서 노래를 불렀다. 너도 따라 웃으며 연거푸 잔을 비웠다. 동지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취기에 벌겋게 달아오른 볼이 사랑스럽다. 유쾌하고, 단순한 사람들. 너는 그들과 함께한 투쟁이, 쟁취한 승리가 자랑스럽다. 사람들이 서로의 어깨를 치며 덕담을 주고받는다.

“우리 지부장님 아니었으면 절대 못 받아냈지.”

“무슨 말씀을, 이게 동지들 덕분이지!”

모두가 술집이 떠나갈 듯 떠들어댄다. 술잔이 오가느라 흐른 술이 테이블 위로 흥건히 번져도 누구 하나 아까워하지 않는다. 너는 주변의 들뜬 얼굴을 바라보며 따뜻함을 느낀다. 비단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다. 이들과 함께라면 세상에 못 이룰 게 없겠구나. 너도 다시 잔을 기울인다.

“어때, 할만해?”

지부장이 곁에 와 앉았다. 비어있는 네 술잔에 술을 따라주며 말을 건넨다. 갑자기 네 두 뺨이 달아오른다. 지부장은 너보다 대여섯 살쯤 많았다.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보고 이미 유부남인 건 알았지만, 너도 모르게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 처음 노조에 가입했을 때부터 지부장은 유독 너를 챙겼다. 우리 노조의 홍일점이라며, 네가 있어서 분위기가 밝아진다고 추켜세웠다. 모임이 길어질 때면, 어느새 네 옆에 다가와 다정하게 알은체를 했다. 딱히 사적인 대화는 오간 적 없었어도, 너도 ‘특별 대우’가 싫지 않았다.

“네, 덕분에요.”

네가 술잔을 부딪히며 빈말을 한다. 지부장이 사람 좋게 웃는다.

“에이, 빼지 말고. 힘든 거 없어? 누가 괴롭히는 거 아니고? 어이, 자기만 마시지 말고 우리 홍일점 좀 잘 챙겨줘.”

지부장이 맞은편에 앉은 동료에게 너스레를 떤다. 그럼, 힘든 거 있음 말만 해, 이 오빠가 다 들어준다, 동료도 유쾌하게 받아친다.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웃는다. 지부장이 채근하듯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네가 술기운에 이끌려 용기를 내본다.

“그럼 저기, 우리 공장에도 여성 탈의실 하나는 있었으면 좋겠어요, 직원도 다섯 명이나 들어왔고… 매번 남자 화장실에서 옷 갈아입는 것도 힘들어서요.”

너의 말이 끝나자, 소란스럽던 테이블이 일순간 조용해진다. 예상 못한 이야기에 다들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치다.

“아, 그럼, 그럼. 당연하지.”

지부장이 나선다.

“여성 탈의실, 그거 진짜 중요해요. 안 그래?”

테이블을 둘러보며 지부장이 진지하게 묻자, 사람들이 그제야 호응하듯 맞장구친다. 그러나 그 뿐이다.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이상하다, 아까까지 신명나게 웃고 떠들던 사람들이 너와 지부장의 눈치만 살피고 있다.

"그러니까요, 다른 공장은,"

네가 말을 이으려는데, 지부장이 너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눈을 맞춘다. 술기운에 달아오른 그의 손바닥에서 미묘한 습기가 전해진다.

“그 문제는 이런 자리에서 얘기하기엔 너무 중요하니까, 따로 날을 한 번 잡자고. 어때?”

지부장이 제안하지만, 너는 혼란스럽다. 다음번 노조 모임에서 공식적으로 논의를 하자는 뜻인가? 언제? 이게 노조 전체 모임에서 다룰 만한 주제인가? 그게 아니면, 사적으로 따로 만나자는 얘기인가? 지부장이 너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다. 마치 그렇게 일단락되었다는 듯. 네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가 술잔을 들고 다른 테이블로 옮긴다.

“얘 봐라, 우리 둘째야. 많이 컸지?”

맞은편 동료가 불쑥 스마트폰을 꺼내며 화제를 틀어버린다. 테이블 위에는 아기 사진이 돌고, “와, 아빠 판박이네.” “애 둘 키우려면 진짜 힘들겠다.” 같은 말이 오가며 다시 활기가 돈다. 결혼도 안 했고, 아이도 없는 너는 대화에 끼지 못한다. 갑자기 가게 안 분위기가 바뀐 것 같다. 방금 전까지 술잔을 기울이던 동료들의 얼굴이, 어쩐지 처음 만난 사람들처럼 낯설다.

너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잔을 들어 부딪히지만, 순간 구역질이 난다. 여성 탈의실 부족은 너만의 불만이다. 너는 사회적 약자 속 또 다른 사회적 약자다. 여성 직원은 고작 다섯 명, 여성 탈의실이 필요하다는 너의 불만은 너무 소수의 것이라 개인적인 것이나 진배없다. 여기서 네 문제에 공감해 줄 사람은 없다. 사회적 약자들끼리 모여 연대를 이루기는 했지만, 그 연대는 어디까지나 공동의 투쟁 대상이 있을 때만 성립한다. 그리고 투쟁은 그들과 네가 가진 공통적인 난제를 위한 것이다. 결코 너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너만 그 사실을 몰랐다. 이 순간, 너는 연대의 일원이라는 자부심, 소속감에 취해 으스댔던 스스로가 한심하다.

“저 먼저 일어날게요.”
너는 술잔을 내려놓고 조용히 자리를 벗어난다. 벌써 가게? 주변에서 형식적으로 묻지만, 가방을 챙기고 일어서는 너를 붙잡지 않는다. 또 다른 건배사가 터져 나온다. 몇 년 만에 얻어낸 성취에, 밤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여기, 택시 타고 가.”

지부장이 따라와 손에 만 원짜리 지폐를 쥐어준다. 네가 괜찮다며 만류하지만, 늦어서 안돼, 그가 막무가내로 네 주먹을 오므려 돈을 잡게 만든다. 다음 모임에서 봐, 지부장이 손을 흔들며 식당으로 들어간다.

너는 구겨진 돈을 내려다본다. 유리창 너머, 남자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밤거리를 울린다. 사랑스러웠던 밤이 몇 분만에 이질적으로 바뀌었다. 너는 성냥팔이 소녀처럼, 식당 안 소란스러운 광경에 속하지 못한다. 승리의 밤, 모두가 기뻐하는 이 와중에 배신감, 분노, 좌절, 도무지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느끼느라 너 혼자 분주하다. 네가 어깨를 움츠린 채 발걸음을 돌린다.

잠을 설쳤다. 좀처럼 눈을 붙이지 못한 채 맞은 출근길, 공장 앞에 낯익은 실루엣이 보인다. 아정이다. 그녀 앞에 커다란 종이 피켓이 세워져 있다.

[남녀공용 장애인 화장실은 차별입니다]

출근하는 동료들이 아정을 힐끗 보고 지나간다. 누구도 멈춰 서지 않는다. 조장은 일부러 크게 헛기침을 하며 못마땅한 눈빛을 던졌지만,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이내 공장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아정은 묵묵히 피켓을 들고 앉아 있다. 출근 시간이 임박하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피켓을 접고 공장 안으로 들어간다.

점심시간이 되자, 아정은 또다시 휠체어를 몰고 나와 피켓을 펼쳐 든다. 오늘도 점심은 거를 모양이다. 조장은 식사 중인 동료들에게 “별 희한한 짓을 다한다”며 혀를 차지만, 그 이상은 하지 못한다. 공장 앞, 휑한 그늘 아래 앉아 있는 아정을 너는 묵묵히 바라본다.

점심 식사를 마친 너는 여자 동료 셋과 함께 화장실로 향한다. 여성 전용 화장실이 없으니, 남자 화장실 가장 안쪽 칸 하나를 넷이서 나눠 쓴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 십오 분 동안 여성 직원들만 쓸 수 있도록 화장실을 쓰지 않는 것은 남성 직원들 사이 암묵적인 규칙이다. 한 명이 칸막이 안에 들어가면, 나머지 셋은 세면대 앞에서 양치를 한다. 옆에는 비어 있는 좌변기 세 칸과 소변기가 덩그러니 남아 있다. 소변기에서 올라오는 지린내가 역하다. 한 명이 살이 쪘다며 내일부터는 샐러드만 먹어야겠다고 말을 꺼내자, 다른 직원이 요즘은 가성비 도시락도 많다며 인터넷을 뒤져 내민다. 어머, 너무 괜찮다. 두 명이 호들갑을 떨고, 너는 건성으로 대꾸한다. 네, 네, 좋네요.

자리로 돌아오자, 옆자리 동료가 말을 건다. 어제 술자리에서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누가 들을까, 그는 목소리를 한껏 낮춘다.
“저기, 어제 그… 탈의실 말이야.”

네가 듣고 있다는 뜻으로 그를 쳐다보자, 동료가 우물쭈물하다가 말을 잇는다.

“그런 얘기는 집행부 있는 데서는 하지 않는 게 좋아. 사소한 걸로 분란 일으킨다고 생각하니까. 나쁜 뜻은 아니고, 자기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그의 눈빛은 진심인 듯 보이지만, 너는 속이 울컥 뒤집힌다. 하지만 반박은 하지 못한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은 결국 “고마워요”라는 빈말로 바뀐다. 네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퇴근길, 단체 대화방에 다음 배구 모임 공지가 올라온다. 참석자는 댓글을 달라는 말에, 네가 망설이다가 ‘참석하겠습니다’라고 적는다. 누군가 ‘우리 팀 파이팅’이란 댓글을 달자, 응원하는 이모티콘이 연달아 올라온다.

다음 날 아침, 아정은 여전히 공장 앞에 앉아 있다. 같은 자리, 같은 문구, 같은 표정이다. 하루 만에 익숙해졌는지, 사람들이 눈길도 주지 않고 공장 안으로 들어간다. 너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 곁으로 다가가 피켓을 잡는다. 아정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든다.
“괜찮아요. 혼자 할 수 있어요.”

너는 앞 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짧게 대답한다.
“노조 가입하라는 거 아니에요.”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너의 그림자가 새벽 햇빛에 휠체어를 넘어 길게 드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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