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7시, 마지막 대리 운전이 끝났다. 온몸이 찌뿌둥하다. 지난밤에는 비가 와서 그런지, 손님이 좀 있었다. 다행이다. 신년회 시즌이 지나고 일거리가 많지 않아서 쪼들리던 중이었는데, 이제 좀 숨통이 트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구청 앞 기사식당에 들른다. 일을 마치고 이 집에서 아침 식사로 제육볶음을 먹는 건 나의 오랜 루틴이다. 사장님 손맛이 특히 좋고, 또….
“왔어?”
가게 앞을 청소하던 사장님이 먼저 인사를 건넨다. 반백의 파마머리를 감싼 머릿수건, 꽃무늬 티셔츠, 팥죽색 앞치마에 후줄근한 몸빼 바지, 검은 고무신. 일 년 내내 사장님의 옷차림은 바뀌는 법이 없다. 나는 늘 변함없는 모습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야야, 얼굴이 반쪽 아이가. 어제 또 죽어라 일만 했제?"
“네.”
”어린놈이 그리 기운이 없어서 우짜노, 어여 들어가 밥부터 무라.”
사장님의 말투는 투박하지만, 사실은 나에게 유난히 다정하다. 메뉴에도 없는 반찬도 몰래 챙겨주고, 오늘처럼 피곤해 보이는 날에는 음식이 남는다며 제육볶음을 산처럼 담아준다. 새벽 6시에 문 여는 식당이 아침 8시부터 음식이 남을 리가 있나, 거짓말인 걸 알면서도 챙겨주는 마음이 좋아서 나도 모르는 척 넘어간다.
“삼춘, 이거 봐라?”
자리에 앉자마자 민재가 쪼르르 다가와 장난감 자동차를 들이민다. 민재는 사장님 손자다. 맞벌이하는 아들 내외를 대신해서 사장님이 대신 가게에서 돌봐준다.
“우와, 민재 새 장난감 받았어?"
”응, 아부지가 사주신 기다! 변신도 된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몇 번 조작하니, 자동차가 어느새 로봇 모양으로 바뀌었다. 멋지다며 감탄하자 작은 어깨가 한껏 신이 났다. 고작 손바닥 만한 장난감이 저리도 좋을까, 민재의 천진난만한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다.
”아가, 삼춘 밥 묵게 괴롭히지 말어."
사장님이 부르지만, 민재는 할머니에게 눈을 흘기며 내 품으로 파고든다. 괜찮아요, 냅두세요. 웃으며 말린다.
”어이, 어제 괜찮았어?"
민재랑 놀아주면서 겨우 밥 한 술 뜨려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영배다.
”이모! 나도 제육볶음 좀 주쇼!”
“곱빼기?”
“아따 뭘 물어, 나는 늘 곱빼기제."
영배가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는다. 그는 건장한 체격에 참 넉살이 좋다. 이 식당에서 몇 번 마주쳤는데, 비슷한 나이 또래의 기사가 흔치 않아서 금세 친해졌다. 낯을 많이 가리는 탓에 허울 없이 구는 그가 부담스러웠지만, 몇 달 전 영배가 작은 시비에 휘말린 나를 구해준 이후로 급속도로 친해졌다. 아침부터 술을 마신 취객과 말다툼이 나서 하마터면 된통 얻어터질 뻔했다.
”응, 다행히 어제는 손님이 좀 있었네."
”비만 쭉쭉 왔으면 좋겄다잉. 매일 물 떠놓고 기우제라도 지내야 쓰것다."
영배와 시덥잖은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음식이 나왔다.
"워매, 이모 언제 이리 이뻐졌대?"
"실없는 놈, 밥이나 처먹어."
영배가 으레 그렇듯 너스레를 떨고,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사장님도 싫지 않은 눈치다. 새로 담근 겉절이라며, 김치가 고봉밥처럼 담긴 접시를 앞에 놓아준다. 많이 묵어.
민재랑 놀아주랴, 영배와 웃고 떠드랴, 아침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지만, 이 광경이 참 정겹고, 좋다. 제육볶음 맛만 놓고 보면 더 맛있는 곳도 있겠지만, 이곳의 사람 사는 냄새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배 부르게 먹고 나니 이내 졸음이 쏟아진다. 벌써 가게? 쉴 새 없이 떠들던 영배는 못내 아쉬운 눈치다.
"또 볼 건데, 뭐. 나 간다."
”삼춘, 잘 가!"
문 밖까지 따라 나온 민재가 한 손에 장난감을 꼭 쥔 채, 목청 높여 인사한다. 나도 한껏 손을 흔든다.
[202X년 X월 X일 오전 8시: 김현수가 아침 식사를 한다. 다른 반찬도 있지만 그는 늘 제육볶음만 고집한다. 그가 식당 아주머니의 옷차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으로 훑더니, 안도한 듯한 한숨을 내뱉는다. 김현수가 앉은 식탁 근처에서 '소년'이 장난감을 가지고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다. 맞은 편에 앉은 남자는 투박한 전라도 사투리로 쉴 새 없이 떠든다. 김현수가 남자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 같진 않다. 식사를 마친 김현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을 향해 과장되게 손을 흔든다. 마치 '또 봐!'라고 인사하듯이.]
퇴근길, 휴대전화 속 여자 친구 사진을 본다. 아리는 평범한 대학생이다. 어찌어찌 사귀긴 했어도, 가난한 대리 기사와 곱게 자란 여대생이 이어지긴 어려웠다. 반년 전, 그녀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공항에 데려다주고, 애써 덤덤한 척 돌아섰다. 아리는 많이 울었다. 공식적으로 헤어진 건 아니다. 그녀가 미국으로 떠난 뒤에도 우리는 며칠에 한 번씩 꼭 통화를 했다. 주로 그녀가 전화를 걸었다. 내일은 일 마치고 돌아오면서 먼저 전화를 해봐야겠다.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김현수 씨?"
아파트 현관을 향해 걸어가는데, 누군가 나를 불러 세운다. 놀이터 입구에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서있다. 그 형사다.
"오랜만입니다."
놀이터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일찍 들어가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형사는 꼭 오늘 같은 날 찾아온다.
”김춘배 씨는… 아직 연락 없습니까?”
“네.”
형사는 나의 양아버지를 쫓고 있다. 고등학생 때 집을 나온 이후로, 나도 그의 소식을 알지 못한다. 그 작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을 마셨고, 취하면 나와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하기 일쑤였다. 상종하고 싶지 않은 인간 말종이었지만 어머니는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그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어느 밤 나 혼자 집을 나왔다. 그 이후로 어머니에게는 가끔씩 전화를 드렸지만, 그 남자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우리 사이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거머리같이 어머니에게 기생해서 밥이나 축내는 줄 알았는데, 일 년 전 찾아온 형사가 그가 사람을 죽이고 도망쳤다고 알려주었다.
“처음에 다 말씀드렸잖아요, 저도 아는 건 그것뿐입니다.”
형사가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하긴, 일 년째 수사의 난항을 겪고 있으니, 그도 답답하겠지. 딴에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경으로 나를 찾는 것 같지만, 김춘배 그 인간은 나를 증오했다. 도망자 신세가 되어서도 연락을 해올 리가 없다. 나에게 도움을 구하느니 차라리 혀 깨물고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시간 뺏어서 죄송합니다. 혹시라도 연락 오면 꼭 알려주십시오.”
소득 없는 대화를 마치고, 형사가 돌아선다. 험상궂은 얼굴에 사시사철 가죽 재킷을 입는 그는, 어딜 봐도 형사 혹은 깡패처럼 보여서 잠복 수사는 어려울 듯싶다. 그래도 나는 그가 싫지 않다. 잊을만하면 나타나 사람을 귀찮게 하지만, 그와 함께 있으면 묘하게 든든하다. 어쩌면 김춘배가 내 주변에 어슬렁대지 않는 것이 형사 덕분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가 찾아오는 게 싫지 않다.
[202X년 X월 X일 오전 10시: 식당을 나온 김현수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 보더니, 환한 미소를 짓는다. 시종일관 무표정이었는데, 갑자기 몹시 즐거워보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요원이 다가가자 김현수의 얼굴이 짐짓 심각해진다. 다만 겁먹은 표정은 아니다. 김현수가 뭐라뭐라 말하고 있다. 남자는 등을 보이고 있어, 어떤 표정인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다.]
똑똑.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잠에서 깨어났다. 이런, 놀이터 정자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이제 일 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
“이것 좀 먹으라고.”
옆집 할아버지가 보자기가 덮인 그릇을 건네준다. 갓 삶은 옥수수다. 달달한 냄새에 불쑥 허기가 진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 게요. 할아버지는 며칠에 한 번씩 간단한 주전부리를 나눠 준다. 음식을 함께 먹으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눈다.
“다짜고짜 반말하는 손님을 만나면 진짜 화나요.”
“화나지. 세상은 다 그런 거야, 네 마음대로 되는 건 없지. 헌데 힘들 때일수록 웃어야 해. 웃으면 복이 온다고 하잖아.”
친손주처럼 넋두리를 늘어놓으면, 할아버지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런저런 조언을 해준다. 그때마다 어려서 시골 할아버지 댁에 놀러 가던 시절이 생각 난다. 가을의 언저리, 코스모스가 피어나는 골목에서 한창 잠자리를 잡으며 놀고 있으면, 할머니가 큰소리로 부르곤 했다. 현수야, 와서 옥수수 먹어라. 작은 반상 앞에 둘러앉아 옥수수를 먹노라면, 할아버지가 종이로 딱정벌레를 접어주셨다. 아, 그때 정말 좋았는데, 행복했는데.
“다녀왔습니다.”
할아버지와 함께 집에 들어온다. 왔니? 기사식당 사장님, 민재, 영배, 형사가 나를 반긴다. 모두가 나를 향해 활짝 웃고 있다. 모두 함께 살기엔 비좁은 집이지만 이 복작복작함이 참 좋다. 우리는 한가족이니까. 함께 있을 때, 우리는 강하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모두가 함께 있을 때, 아무도 우리를 해칠 수 없다.
부리나케 씻고 또 집을 나선다. 또 평화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오늘도 대리 운전 콜이 많으면 좋겠다.
[202X년 X월 X일 오후 1시: 김현수가 벤치에 앉아 있다. 간식을 먹는 듯, 입을 연신 오물댄다(구강안면 이상운동증 의심). 동시에 옆을 바라보며 어린아이처럼 재잘거린다. 하루 중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김현수의 풀어진 모습이다. 그는 파안대소 하기도 하고, 진중하게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한다. 홀로 대화를 마친 김현수가 벤치에 기대어 스르르 잠이 든다.
오후 6시: 해가 질때까지 잠들어 있던 그는, 저녁 무렵 다시 깨어나 활동하기 시작한다(수면-각성 주기 전도).]
나는 김현수의 주치의다. 스물두 살의 청년은 일 년 전 의붓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가 유년 시절 김현수를 상습적으로 성폭행했으며, 이로 인해 그가 해리성 정체장애, 즉 다중 인격 장애를 앓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전문가들은 정밀한 정신 감정 끝에 김현수가 총 여덟 개의 인격을 보유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김현수 본인, 칠십 대 여성, 일곱 살 남자아이, 이십 대 남성, 연령을 추정하기 어려운 남성, 김현수가 여자 친구라고 주장하는 비슷한 나이 또래의 여성, 팔십 대 남성, 그리고… 여자 친구는 항상 회상을 통해서만 묘사되었다. 김현수는 그녀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고 믿고 있었다.
이 사건은 '한국판 빌리 밀리건 사건'으로 언론과 정신과학계 등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떠들썩한 재판 끝에 법원은 김현수에게 치료감호 명령을 내렸고, 그는 국립법무병원에 수용되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나는 그와 면담을 한다. 하지만 본체인 김현수는 좀처럼 전면에 나서지 않고, ‘박사’가 찾아온다. 박사는 김현수의 여덟 번째 인격으로, 인격 중에서 가장 똑똑하다. 그는 김현수의 몸에 또 다른 인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았고, ‘집’이라는 안전한 장소에서 나머지 인격들을 다스리며 '가족'을 진두지휘한다. 한마디로 김현수와 나머지 인격들의 '대변인'이자 '지휘자'인 셈이다.
김현수의 판결이 나던 날을 기억한다. 나는 청중으로서 그의 재판을 참관했다. 법정 안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고요했다. 최후 변론 때, 피고인석에 앉은 김현수는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는 낯설 만큼 또렷했고, 억양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박사가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김현수와 그의 몸 안에 존재하는 인격들의 대표입니다.”
순간 방청석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믿을 수 없는 현상에 청중은 흥분하여 웅성거렸다. 정숙하세요, 판사가 외쳤다. 소음이 가라앉을 때쯤 박사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피고인 김현수는 무죄입니다. 본인이 저지른 살인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범행은 김현수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격 중 하나인 ‘형사’가 저질렀습니다. 우리 중 가장 폭력적인 인격이죠. 김춘배가 살해당하던 그 순간에, 현수는 단지 겁을 먹고 심연에 숨어 있었습니다.”
박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시선을 그를 향했다. 박사에게는 청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법정 전체의 분위기를 통제했다.
“현수는 유년 시절 김춘배로부터 지속적인 폭력과 성적 학대에 시달렸습니다. 어린 소년은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스스로 영혼을 쪼개야만 했고, 분열된 인격들은 각자 역할을 부여받았죠. 어떤 인격은 현수 대신 두려움을 느꼈고, 또 다른 인격은 그를 도와 증오를 삭혔습니다. 그리고 현수가 성인이 된 바로 그 날, 형사는 현수를, 아니, 가족을 지키기 위해 칼을 들었습니다.”
검사가 ‘피고인은 여전히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라고 목소리를 높이자, 박사는 고개를 돌려 판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엔 두려움도, 죄책감도 없었다. 박사의 눈동자는 차분하고, 소름끼치도록 냉정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책임을 진다는 건 피고가 자신이 한 일을 인식할 때 가능한 겁니다. 현수는 진정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오롯이 형사의 선택이었으니까요. 그리고 현수와 각각의 인격들이 서로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것은, 여기 계신 분들 모두 아시겠지요? 지금까지 봐왔던 김현수와 제 차이를 눈 뜬 장님이 아닌 이상, 부인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박사가 진술을 마치고, 법정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검사조차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박사의 말대로, 그 곳에 모인 모든 이는 눈앞에 피고인이 김현수가 아닌 또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나는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전율을 느꼈다. 박사에게는 절대 내색하지 않겠지만, 그때 그에게서는 좌중을 압도하는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그순간 모두가 숨을 죽인채, 한 마음 한 뜻으로 김현수를 응원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내심 김현수가 우리 병원으로 이관되어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의사가 되고 나서 이토록 매력적인 케이스가 또 있었나. 치료가 결코 쉽진 않겠지만, 김현수가 굉장히 흥미로운 연구 주제가 되리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나 면담을 시작한 날부터, 박사가 훼방을 놓는 바람에 치료에 진전이 없었다. 마음이 조급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김현수 대신 박사가 자리에 앉아 있다. 박사는 늘 단정하다. 김현수와 달리, 그는 어깨를 곧게 펴고 앉는다.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눈빛이 상대를 꿰뚫는 것 같다. 말투는 차분하지만 단호하다. 소심한 김현수와는 정반대다.
“김 선생님, 이제 이 무의미한 상담을 종료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현수는 겉으로 보기엔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깊은 내면에선 본인이 구축한 세상에서 타인이라고 인지하는 인격들과 어울리며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어요. 현수는 괴롭지도 않고, ‘일상’에 어려움을 겪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치료가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박사는 무표정하지만, 그의 말에 조소가 묻어난다. 그는 재판에서 발언하는 변호사처럼, 때로는 제자들을 가르치는 노교수처럼 말한다. 웃음을 지어도 가볍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몸짓조차 권위가 배어있다. 그의 태도에는 일종의 자신감이 있다. 성실하게 치료에 협조하는 것 같지만, 실은 언제나 주도권을 놓지 않는다.
“글쎄요, 당신이 말하는 ‘평화로운 일상’이 정말로 김현수 씨가 원하는 삶일까요? 그가 다른 삶을 원한다면요?”
나의 질문에 박사가 어깨를 으쓱한다.
“그야 현수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수가 원하는 것은 현상유지입니다. 제가 물어봐도, 지난번에 당신이 물어봐도 현수는 똑같이 대답했어요. 아닌가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미 수차례 김현수에게 물어보았다. 박사가 김현수와의 소통을 통제하기는 하지만, 아예 막는 것은 아니었다. 김현수는 본인이 다중 인격자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으며, 일상이라고 부르는 ‘하루’가 사실은 독방에 갇혀 만들어낸 망상이라는 것도 인정했다. 간곡히 설득했지만, 김현수는 치료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완강히 본인의 ‘하루’ 속에 머무르길 원했다. 왜일까.
“왜 현수가 원하는 걸 인정하지 않죠? 당신을 비롯한 의사들은, 현수가 정신질환자이기 때문에 본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판단할 수 없다고 단정 짓더군요. 그럼 역으로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현수가 원하는 삶은 무엇이죠?”
박사의 질문에 나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를 쓴다. 덤덤하게 말을 잇는다.
“당신이 말하는 ‘현상 유지’가 김현수 씨의 바람일 수 있죠. 하지만 그것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취한 방어 기제일 뿐이고, 김현수씨는 더 큰 소망을 품고 있을 수도 있어요. 예를 들면 자유롭게 선택하고, 소통하고, 누군가와 진짜로 연결되는 삶을 바라고 있진 않을까요?”
박사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다. 아, 저 상대를 비웃는 표정. 박사가 저 표정을 지을 때마다, 나는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느긋한 태도로 박사가 말을 이었다.
“똑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르겠군요. 현수는 지금 삶에 만족합니다. 그리고 나는 평온을 봅니다. 판결이 나던 날, 당시 현수를 담당했던 의사가 말했어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야 한다고. 그 여자는 현수의 인격들을 현수가 의인화한 성격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그런 제안을 한 것 같지만, 현수와 나는 깊은 토론 끝에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했어요. 인격들을 그대로 인정하자. 현수와 인격들은 이미 오랜 시간 공존해 왔고, 서로의 공간을 존중합니다. 현수는 그들과 함께 하루를 보내고, 그 하루에 만족해요. 인격의 소멸을 두고 괴로운 고민을 할 필요도 없고, 다른 인격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일 필요도 없죠."
"그래서 김현수 씨는 지금 행복한가요?"
나는 포기하지 못하고 물고 늘어지지만, 박사는 여전히 태평하다. 내가 조급함을 내보이는 순간, 싸움의 승패는 정해졌다. 이미 패배의 기운을 진하게 느낄 수 있다.
"김 선생님, 현수는 지금 스스로를 벌주려는 것도, 구원받으려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자신이 만든 세계 속에서 숨 쉬고, 웃고, 일하고, 사랑합니다. 당신네들은 그것을 ‘망상’이라 부르지만, 저는 묻고 싶습니다. 고통스러운 현실보다 평화로운 망상이 더 나쁜가요? 그의 변호인이자 가족의 대표로서, 나는 당신에게 부탁합니다. 제발,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세요.”
박사의 목소리는 낮지만 분명하다. 그는 모든 질문에 성실히 대답하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고립이다’라는 메시지를 되풀이한다. 아, 또 무의미한 대화만 주고받다가 상담이 끝났다. 나는 박사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저 눈동자 너머, 김현수에게 닿기를 바라며.
“다음번엔 김현수 씨와 직접, 대화하고 싶군요.”
“얼마든지요, 현수가 원한다면.”
박사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는 여유만만한 태도로 상담실을 나선다. 아쉽지만 오늘도, 내가 졌다.
[202X년 X월 X일 오후 4시: 김현수가 벽을 마주한 채 앉아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정해진 시간에 그는 늘 같은 자리에서 같은 행동을 한다. 이상 행동은 한 시간 남짓 지속된다. 그는 역할극을 하듯이 두 명이 나누는 대화를 흉내내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계속 주절댄다. 단, 특정 단어를 자주 반복한다. 고통, 현실, 행복, 망상, 하루 등. 이상 행동을 보일 때, 김현수는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이다. 눈빛, 표정, 말투, 자세가 모두 바뀐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동일 인물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 이상 <10002305 김현수 환자 입원 관찰 일지>]
상담실은 고요하다. 시계 초침이 똑딱거리는 소리가 방을 가득 메운다. 중앙에 놓인 책상 한쪽에 앉은 의사가 내담자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손으로 펜을 돌리며 지루함을 달랜다. 똑똑, 문이 열리고 안전 요원이 들어온다.
“오늘도 허탕이네요, 선생님. 김현수 환자는 이미 ‘김 선생님’과 상담을 마쳤다고 합니다.”
“허, 참…”
의사는 잠시 펜을 놓고, 허탈하게 웃는다. 벌써 몇 번째인가.
“강박해서라도 데려올까요?”
안전요원이 묻지만, 의사가 손사래를 친다.
“아니에요, 됐어요. 나가보세요.”
안전 요원이 방을 나서고, 의사는 차트를 덮고 일어나 창밖을 바라본다. 이 지역 겨울의 해는 짧다. 지평선에 잿빛 땅거미가 젖어들고 있다. 오늘은 딸아이의 생일이다. 함께 좋아하는 식당에 가서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오매불망 자기를 기다릴 딸을 생각하며, 그의 마음이 조급해진다.
의사는 차트를 열어 적당히 휘갈긴다. 오늘도 면담 거부. 환자는 아홉 번째 인격인 ‘주치의’와 면담했다는 망상에 빠져 있음. 치료 계획: 모든 약물 두 배로 증량. 면밀한 관찰 요망.
의사가 책상의 서랍을 열어 차트를 집어넣는다. 딸각, 불을 끄고 방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