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나라에 산다고 다른 사람이 된다
뮤지컬 <그리스>, 원조 하이스쿨 뮤지컬. 10학년 때 우리 학교에서 올린 공연이다. 미국 학교는 주로 1년에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뮤지컬 하나, 연극 하나를 올린다. 화려하고 볼거리가 많은 데다 넘버도 클래식하면서 신나는 <그리스>는 남녀노소가 함께 즐기는 학교 뮤지컬로 잘 어울린다. 딱 한 가지 특징만 빼면. 한국에선 많이 순화되었지만, 원작 영화를 보면 수위가 꽤나 높아 학교에서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실제로 그리스를 공연한다고 발표된 주말에 케이티와 제니가 영화를 보려나고 해서 같이 봤다. 내가 모르는 어휘가 많아 질문할 때마다 케이티는 얼굴이 새빨개지고 제니는
"Umm.... 그냥 검색해 봐. 잠깐, 아냐! 절대 검색하지 마!"
라고 황급히 정정했었다. 아직까지도 영화 대사의 반은 정확한 뜻을 모른다. 다행히 학교에서 공연하는 대본과 가사는 School Edition이라 많이 조절해 둔 것 같다.
<Grease: School Edition> 포스터가 붙자마자 오디션 신청서를 뿌렸다. 오디션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주조연에 도전하고 싶은 친구들은 신청서를 작성하고, 각자 정해진 시간에 한 문단의 독백 연기를 펼친 후, 선택한 지정곡을 1분 정도 보여줘야 했다. 앙상블로 참여하고 싶다면 코러스 콜(Chorus call)이라고 사실상 다 통과시켜 주는 간단한 단체 오디션을 본다. 어느 쪽이든 단체로 안무를 배우고 팀별로 발표하는 댄스 콜(dance call)에도 참여해야 했다. 그런데 그 신청 명단에 칸이 부족할 정도로 참여하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리고 난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신청서에 바로 이름을 적어 넣었다.
사실 나는 무대 공포증이 있는지 알기도 어려울 정도로, 주목받을 기회를 모조리 피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사람들 앞에서 노래나 춤, 연기를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시선이 쏠리는 것이 싫어서 어릴 때, 꼭 발표를 해야 하면 전날 밤에 막 울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런 복잡하고 어려운 오디션 절차를 거쳐 무대에 서고 싶을 리 없었다. 내 손가락은 그런 뇌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주조연에 도전하는 신청 명단에 이름을 썼다.
'다른 나라에 간다고 다른 사람이 되겠어?' 근데 나는 좀 그랬다. 언어마다 자아가 달라진다는 말은 들어봤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합창단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서 생전 해본 적 없는 독백 연기도 준비하고 처음 불러보는 솔로곡도 연습했다. 열심히 하면서도 내가 맞나 정말 신기했다. 내가 아는 이지우는 이런 사람이 아닌데, 자진해서 무대에 서겠다고 이러고 있다니. 내가 뮤지컬을 사랑한다는 건 이전 글들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매번 무대 앞에 앉아있었을 뿐, 제대로 무대 위에 선다는 건 상상만 해본 일이었다. 상상 속에만 갇혀 있던 나 자신이 참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오디션 날이 결국 다가오고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다독이며 강당 앞에서 기다렸다. 문이 열리더니 합창단 선생님이 웃으며 "Come on in!" 하고 들여보내 주셨다. 텅 빈 객석에는 선생님의 자리, 연출가 선생님, 연기 지도 선생님밖에 없었다. 한 마디씩 인사를 던지셨고 난 되게 자신감 있고 여유 있는 모습으로 대답했다. 연기를 했다기보다는 심장이 하도 뛰다 그냥 멈춰버려서 여유 있어 보였던 게 아닌가 싶다. 계단 몇 개를 올라 자연스럽게 무대 가운데 섰다. 합창 연습 때마다 반주를 담당하시는 선생님이 피아노 앞에 앉아계셨다.
"연기부터 시작할래, 노래부터 해볼래?"
"독백부터 할게요."
서랍장 위에 핸드폰을 세워 말하는 모습을 찍고 또 찍으며 연습했다. 어디서 감정이 터져야 하는지, 어디서 숨을 쉬는지, 어디서 잠깐의 정적이 있어야 할지, 다 계획한 시간들을 믿고 심호흡 한번. 천천히 입을 열었다.
"I'm an adult now. You look at me and..."
정확히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몸이 기억하는 대로 했다.
"That was great! Are you ready to sing your solo?"
노래할 준비가 됐냐니, 이제 막 숨이 쉬어지는데... 그래도 여러 번 녹음하고 또 연습했던 대로 하면 되겠지.
음... 일단 노래를 시작하는데, 중간쯤에 갑자기 가사가 기억이 안 났다. 결국 잘 노래하다가 "Sorry"를 남발하더니 기억난 부분부터 다시 노래를 끝마치는 웃긴 모양새가 되었다. 다행인 것은 미국의 분위기가 용기 내서 도전한 사람은 잘 못하더라도 비난하거나 비웃지 않는 것이라, 박수를 쳐주시고 잘 나왔다. 실수를 한 건 너무 아쉬웠지만,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었다.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놀랄 정도로 큰 도전을 한 것 자체로 목적을 이루었다.
며칠 뒤, 댄스 콜이 있었다.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망했다. 애초에 춤에 전혀 일가견이 없는 데다 키가 큰 친구들 앞에 서 있는 춤 선생님의 동작도 잘 보지 못했다. 떨어질 걸 확신하고 앙상블이라도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캐스팅 발표날을 기다렸는데 그 결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