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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xan Oct 26. 2022

셰익스피어, 패왕별희, 괴테, 모비딕

여섯 번째 편지

친애하는 B,

사람들은 언제 울지요?

분명 예전에는 갖가지 이유로 ㅡ 시험을 망쳐서, 엄마에게 혼나서, 친구와 다투어서, 남자 친구가 연락을 안 해서 ㅡ 곧잘 울어버렸던 것 같습니다만, 스물대여섯 살 쯔음부터는 기껏 해야 분기 별로 한 번 정도가 고작입니다. (심지어 그마저 이전과 같이 펑펑 우는 것도 아닙니다.) 암만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슬픈 일은 생기고, 그러한 슬픔에 무뎌진 것도 아니나, 이전처럼 울지 않게 된 것은 왜일까요? 슬퍼도 울지를 않으니 되려 속에서부터 고이는 것만 같습니다. 밖으로 뱉어내지 못한 슬픔이 고여 몸속에서 웅웅 우는 것만 같습니다.


B, 사람들은 정말 언제 울지요?

다들 슬플 때 잘 울고 산답니까?

글쎄요, 다들 울어야 할 때 잘 울고 산다면, 사람들은 분명 지금처럼 비극을 사랑하진 않았을 겁니다. ㅡ 셰익스피어, 패왕별희, 괴테, 모비딕...


저는 비극을 넘어 구구절절한 신파까지도 사랑하며 그것들 없인 극히 우울하여도 눈물조차 짜내지 못하기에, 저 스스로도 그런 신파 없이 혼자서 잘 소리 내 울던 시절이 까마득할 뿐입니다. 허나 가장 첫 번째 울음부터 찬찬히 되짚어 보자면, 물론 세상에 났을 때가 가장 첫 번째 울음이었겠으나 ㅡ 그것은 제 기억 속엔 없는 관념에 지나지 아니하므로 ㅡ 제게 있어 진실된 가장 첫 번째 기억의 울음은 5살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손바닥만 한 레고 블록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공주가 사는 예쁜 성을 만들었습니다. 동시에 그 어린아이의 머릿속에서는 동화처럼 행복한 공주와 용사 이야기도 함께 만들어졌습니다. 단순히 레고만 가지고 논 게 아니라, 저 나름대로의 세계를 허술하게나마 펼쳐가고 있던 셈이지요. 그런 건 꽤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법이라 성과 세계가 거의 완성되어 갈 쯤엔 내내 참아왔던 화장실을 갔어야만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방에 다시 돌아왔을 땐 성이고 세계고, 공주고 용사고 모두 2살 어린 남동생이라는 극악무도한 파괴자의 손에 망가진 후였습니다. 저는 아직도 분노와 허탈감으로 뒤범벅된 그때의 울음을 잊지 못합니다. (또한 아직도 남동생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며 핀잔을 주곤 합니다. 뒤끝이 제법 있는 편이지요?)


어찌 되었든, 그러니까,

비극이라 함은 그런 것이겠지요.

결핍과 상실.

불행과 파멸.

죽음.


우리는 그런 비극을 마주하면 두려워하고, 동정하고,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러다 끝내는 아마 그 속에서 눈물 훔치며 울어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는 예술적 비극에 몰입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나, 예술적 비극과 현실적 비극의 한 가지 차이라 하면, 현실적 비극은 예술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아무도 현실에서 실재하는 자신의 비극이나 타인의 비극을 두고 예술적이라 칭하지 않습니다.



허나 니체만은 다르지요.

그가 신을 죽인 덕분에 그는 대표적인 허무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오히려 그는 "어차피 다 허무하니까 우리 체념하고 아무것도 하지 말자!"라는 식의 허무주의를 타파한 능동적 허무주의자입니다. 능동적 허무주의 또한 허무주의가 아니느냐 하실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다 허무하니까 우리는 아무것이나 다 할 수 있다!"라는 식의 능동적 허무주의는 일반적인 허무주의와 다른 차원의 것이니, 니체를 단순 허무주의자로 치부하는 식의 오해에 대해 그를 변호하고 싶을 수밖에요.  


니체가 세계의 허무함으로 인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역설한 이유는, 그가 이 비극적 세계를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니체의 독특한 관점은 그의 첫 작품인 "비극의 탄생"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현존과 세계는 오직 미적 현상으로서만 영원히 정당화된다. 인식하는 자로서의 우리는, 각자의 예술 극 속 유일한 창조자이자 관객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고, 시인인 동시에 배우이자 관객이다.


예술은 구원과 치료의 마법사로서 다가온다. 예술만이 현존의 끔찍함이나 부조리에 대한 구역질 나는 생각들을 삶과 양립할 수 있는 표상들로 변화시킬 수 있다. 이 표상들은 끔찍함의 예술적 제어로서 숭고한 것이고, 부조리의 구역질로부터의 예술적 해방으로서 희극적인 것이다.



"Happily Ever After."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익숙한 동화지만 절대 익숙할 수 없는 영원한 행복.

결국 죽음으로 끝나는 엔딩을 '새드 엔딩'이라고, 비극이라고 할 거라면 모두의 삶은 한 편의 정해진 비극이겠죠, B. 하지만 비극은 추함의 동의어가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비극 속에서 추하게 우는 모양새를 하고 있더라도, 니체는 그 또한 하나의 예술로서 충분히 미적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삶과 운명이 꿈같은 예술임을 알 때, 커다란 재난과 공포 앞에서도 꿈처럼, 동화 속 용사처럼, 신화 속 디오니소스처럼 용기와 자유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B, 저와 함께 차라리 비극을 찬양합시다. 그리고 찬양될 우리 비극의 유일한 창조자이자 배우로서 본질적 고통을 마음 깊이 새깁시다. 그것이 위험하다 해도 어떱니까? 그 또한 나만이 이룩할 수 있는 예술인 것을...


하지만 그토록 음울하게 묘사된 우리 지친 문화의 황량함이 디오니소스의 마법과 접촉하면 갑자기 어떻게 변하는가! 폭풍이 노쇠한 것, 썩은 것, 부서진 것, 쇠약한 것을 모두 움켜잡고, 회오리치는 붉은 먼지구름 소에 휘감아서는 마치 독수리처럼 공중으로 채어 가버린다. 이제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은 땅 밑으로부터 금빛으로 솟아오른 것과 같이 너무나 충만하고 초록빛이며, 너무나 생동감 있고 동경에 가득 차 있어 측량할 수 없다. 비극은 이처럼 풍부한 황홀감 속에서 광기와 의지, 고통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존재의 어머니에 관한 노래에 귀를 기울인다. 그렇다, 나의 벗들이여, 이제 과감하게 비극적 인간이 되어라. 그대들은 구원받을 테니까.


그래서 오늘 저는 오랜만에

이 비극의 유일한 주연됨으로써

슬픈 영화 없이

혼자서도 잘 우는 연습을 해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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