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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xan Oct 25. 2022

내 우울은 밥을 먹여줘

다섯 번째 편지

비가 오는 날은 글쓰기를 게을리합니다.

빗물 웅덩이를 무심하게 가르는 차바퀴를 하릴없이 구경하느라 여념 없습니다.

이 한심한 행위는 끝을 모르다 빗물 웅덩이에 스스로를 뉘어보는 상상까지 가야지만이 비로소 끝이 납니다. 그래서 B, 오늘 편지에는 게으름이 묻어날 게 분명합니다. 한심한 우울과 뒤섞인 게으름이 너저분히 묻어 이것이 무언 편지인가 탓하셔도 할 말 없겠습니다.


B, 그래도 한 가지 묻는다면, 삶에 선택권이 있다면 태어나셨겠습니까?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세상에 나느냐 마느냐를 만약에 선택할 수 있었다면 태어나는 걸 선택하셨겠냐, 그겁니다.


고인 빗물 웅덩이에 저를 뉘어보는 이유요. 바퀴가 빗물을 가르듯 무감각히 저를 가르면, 저는 그토록 좋아하는 빗물과 얼씨구나 뒤엉킨 채로 어디론가 흘러갈 것이기 때문이지요. 갈리고 갈려 흐르고 흘러간다면 비 갠 후 맑은 아침에 저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홀연하겠지요.


좋습니다. 태어나지도 않았다면 좋겠습니다.

일전에 매우 독실했던 남자 한 명을 만났었는데, 이런 제게 삶이 축복이게끔 느끼도록 사랑해주겠다 언약하였었습니다. 그는 퍽 열렬히 저를 사랑하긴 하였으나, 그의 사랑만으로 삶이 축복이기엔 사랑이 제 밥을 먹여주지는 않았습니다. 때문에 그 사랑의 언약은 제 가벼운 코웃음으로 끝나버렸지요.


B, 그리고 또 한 가지 더 묻는다면, (오늘은 너저분히 질문이 많군요.) 사랑은 곧 섹스라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사랑은 변함없는 약속입니까? 균일한 배열의 탄소 원자 덩어리가 달린 쇳덩이를 약지에 끼우면 변함없어지는 그런 것입니까?

아닙니다. 사랑은 그래, 차라리 섹스라고 하는 편이 속 편하겠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오늘 제 편지만큼 너저분한 인간사 사랑의 역사를 어찌 설명합니까?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세기의 연인도 첫눈에 키스하고 난 다음에 일사천리로 섹스까지 했습디다.

아니, 그렇다고 사랑이 곧 섹스라는 게 잘못되었다는 건 아닙니다. 만물이 자손을 퍼뜨리고 싶도록 설계된 것을 왜 탓합니까? 본능을 탓하고, 섹스라 말하는 걸 금기하는 게 더 우습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처음에나 재밌지요.

나중에는 권태라 다들 정으로 산다 합니다.



또 비단 사랑뿐이던가요? 권태로와지는 것은 비단 사랑뿐만이 아닙니다. 인생 자체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입니다. 사실 이 멋있는 비유는 제가 한 말이 아니라 쇼펜하우어라고 독일의 최고 철학자가 한 말입니다. (그가 최고 철학자라는 건 어디까지나 제 의견이지만은, 톨스토이나 헤밍웨이, 비트겐슈타인 같은 당대의 학식가들도 그를 매우 높게 평가하였으니 아주 틀린 의견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비유 어딘가에서 공허함과 우울함이 느껴지는 건, 실제로 그가 극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까닭입니다. 그에게 고통이란 인간의 욕구가 좌절된 어떤 상태나 지점이며, 권태란 인간의 욕구가 충족된 어떤 상태나 지점입니다. 그리고 또 그에게 인간이란, DNA에 표식처럼 새겨진 욕구 때문에 욕구가 좌절된 상태에서는 그 상태를 벗어나려 고통스레 애쓰나, 막상 애써 그 욕구를 충족시키고 나면 권태롭게 지루해하는 존재입니다. 이와 같은 연유로 삶의 매 시간은 고통과 권태 사이 어딘가라 한 것이지요. 생각건대 그의 세계관에서는 우울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더 괴랄 맞겠군요.  

 

그러나 B, 또다시 보태어 묻는다면, 쇼펜하우어에게 우울이 과연 불행이었을까요? 우울하면 응당 불행한 것 아니냐 하실 수도 있겠지만, 글쎄요, 적어도 저는 말입니다, 우울하여도 불행하지가 않습니다. 차라리 뭣도 모르고 쾌활한 편이 불행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우울한 덕분에 철학에 심취하게 되었고, 덕분에 사유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고, 덕분에 당신께 편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제가 우울하지 않았다면 해내지 못했을 것들이라 꽤 확신합니다. 아마 쇼펜하우어도 마찬가지일 테지요. 그가 우울하지 않았다면 그의 사유는 염세주의 철학을 완성시킬 수 없었을 겁니다. 그처럼 우울하게 사유하지 않는 쇼펜하우어는 쇼펜하우어가 아닐 것이고, 쇼펜하우어가 아닌 쇼펜하우어는 행복하지 않았을 것임 또한 확신합니다.


여하튼 저는 우울하고 행복해서 밥도 먹고 잠도 자고 글도 쓰고 합니다.

사랑은 제 밥을 먹여주진 않았지만 우울은 제 밥을 먹여줍니다.

고통과 권태 사이 그 어느 시간에서건 변함없는 우울한 반추로 저는 저일 수 있어 배불리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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