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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xan Oct 22. 2022

늦어서 죄송합니다

세 번째 편지

네가 누구냐는 물음에 대답을 망설이는 이유는 늦음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입니다. 착실히 살았다 생각했건만 정신을 차려보면 저는 늘 늦어있었습니다. 달리기도, 입학이나 졸업도, (이런 것까지 말해도 되나 싶지만) 첫 경험조차도 늦었습니다. 때문에 나이에 비해 미숙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하여 저를 소개할 적엔 늘 주변에서 나이답지 않아 보인다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당연히 그런 반응들이 달갑지 않아 네가 누구냐는 물음에 자꾸 숨고만 싶어 집니다.


친애하는 B, 오늘은 인사도 늦었습니다.

문득 이처럼 늦음에 대해 서술하게 된 것은, 근래 늦음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을 몇 만나게 된 때문입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매년 쌀쌀해지는 가을, 이 맘 때쯤이 상담 주간이라 가지각색의 고민들을 듣게 됩니다. 그 산통에도 매년 빠짐없이 오르내리는 고민거리가 바로 '늦음'입니다. 우리 아이가 수학 선행을 늦게 시작해서, 원래 이해가 조금 느려서... 선생님 제가 탐구 과목을 늦게 선택해서, 삼수까지 하면 너무 늦어질 것 같아서...


늦는다는 것. 그것이 무엇이길래 사람들을 괴롭히는 걸까요?

늦음에 대해 고민하는 그들의 눈에는 간절함이 배어 있어 괜히 저까지 애달파집니다.

"왜요? 좀 늦기라도 하면 인생이 다 꼬인답니까?"하고 호쾌히 달래주고 싶더라도, 일단은 저부터가 늦음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있으니 달리 방도가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늦어도 괜찮다는 흔한 위로조차 차마 건네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 데다가 돌이켜 보건대, 저 또한 그런 위로를 들으며 자라지 못하였으니... 제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잘할 수 있을 리도 만무하지요.


아니, 오히려 세상에는 늦음을 위로하기보다 놀리고 책망하는 사람들 투성이지 않습니까, B? 초등학생 때 달리기 시합에서 꼴등한 것은 그 학기 내내의 놀림감이었습니다. 스물다섯에 새로운 대학에 다시 입학했을 때 엄마는 내가 밉다 했습니다. (그때는 저도 제가 밉긴 했습니다만) 그리고 스물여덟 쯔음 되니까 지금 어떤 사람을 만나고 있는지가 중요하답디다. 허 참, 이제 슬슬 결혼 생각해야 하지 않겠냐면서요. 세상만사에는 다 적당한 때가 있대요. 그때를 놓치면 늦어질 뿐이라 합니다.



저는 그 적당한 때라는 게 참 야속합니다. 언제 무얼 해야 한다는 기준 따위가 없었다면 저도, 사람들도 하고 싶은 때 하고 싶은 것을 하기에 조금은 더 편했을 테니까요. 예컨대, 공자는 나이 40에 불혹이어야 한다 했습니다만은 저는 40이어도 설레는 유혹에는 설레 하며 즐겁고 싶습니다. 그러기엔 이미 늦었다는 이유로, 나잇값 못한다는 이유로 죄송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B. 저는 이제부터 제가 소유할 시간에 남들의 기준 따위를 들이대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애초부터  것에 남의 기준을 갖다 써서 늦다 빠르다 논하는  우스운 일이었습니다. (설령 그게 공자가 만든 기준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늦음에 대한 사람들의 괴로움 또한, 자신이 소유하고 싶은 시간에다가 자신 밖에 있는 외부 기준을 가져다 씀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지요?


이처럼 외부에서 오는 괴로움에 대해 냉철한 스토아학파의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세상만사에는 '나에게 속한 것'이 있고, '나에게 속하지 않는 것'이 있다. 나에게 속한 것은 곧 이성, 욕망, 태도와 같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며, 나에게 속하지 않는 것은 곧 재산, 평판과 같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정념은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것을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데서 생겨난다. 나에게 속한 것과 속하지 않은 것을 지혜롭게 구분하여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것은 무시해라. 그리하면 혼란과 정념이 없는 완벽한 평온함, '아파테이아(aphatheia)'에 도달할 것이니."


그는 이처럼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한 마음과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려는 용기와 그 둘을 구분하는 지혜가 있었기에 절름발이 노예임에도 왕보다 자유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이미 정해 놓은 늦음과 빠름에 대한 기준을 저로서는 바꿀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기준은 제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속할 것이고, 통제할 수 없는 그것을 마치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인 양 흐린 눈을 하고서 스스로를 끼워 맞추려 하니 어떻게 삶이 평온할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나라는 인간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내 것이 되지 않을 것은 무시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누군가 그런 건 한낱 자위에 불과하다 비판할지라도, 그러한 평판 또한 외부의 잡음이니 저에게 해를 가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이렇게 저는 무력함을 앎으로써 유력해지려 합니다.


B, 그대 또한 그대 밖에 있는 것으로 고통받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 밖에 있는 것들은 그냥 그대로 밖에 두도록 합시다. 밖에 있는 것들에다 대고 늦어서 죄송하다 하지 맙시다.

내 안에 있는 것으로 나의 시간을 평온하게 소유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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