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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xan Oct 21. 2022

저와 흔한 유희를 즐깁시다

두 번째 편지

친애하는 B, 오늘 저는 어떤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아니, 실은,

이전에 헤어졌던 전 남자 친구를 만났습니다. (전 남자 친구는 어떤 한 남자라기보다 '그' 남자에 가깝겠지요?)


헤어진 지 반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에서 뭣하러 다시금 그런 미련한 짓을 하느냐 물으신다면, 첫 번째 편지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원래 미련한 탓도 있는 데다, 꽤나 천박한 이유로 헤어지게 된 그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내심 헤어질 때의 시점 그대로, 천박한 그대로 지내고 있길 바랐으려나요.)


그의 모습은 멀리서부터도 알아볼 수 있었으나 왜인지 모르게 제 기억보다 멀쑥하였습니다. 물론 허여멀건 얼굴 위 능글능글한 웃음만은 여전하였지만요. 그는 그 능글능글한 웃음을 띠고 다시 만나자 하더군요. 천박한 이유로 헤어짐을 당해놓고선,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우습지 않아야 하는 말을 뱉는지... 물론 연애할 당시에는 그의 이런 모습마저 너무, 너무 사랑스러웠지만...


이제는 좋다 싫다 하는 별 감흥조차 없어져 그저 담담히 거절하였습니다. 다시 만난다면 여전히 그렇게 사냐며 비꼬기를 벼르고 있기도 했으나, 진짜로 여전히 그렇게 사는 그를 보니 딱히 비꼴 마음도 없어졌습니다.


천박한 행복함.

그는 여전히 그것을 사랑하며 살고 있던 것입니다.



B,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해 산다 합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의 역사는 유구하기까지 합니다. 기원전의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요. (갑자기 무슨 철학적 이야기냐 하시겠지만 앞으로의 편지에는 짧게나마 제가 알고 있는 철학적 깨달음을 전해드리려 합니다. 부디 도움이 되길 바라며.) 그의 목적론적 세계관 속에서 모든 존재는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는데, 그 목적이 바로 행복이라 합니다. 허나 이때의 행복은 천박한 행복과 확연히 다릅니다. 뭐 철학이 늘 그러하듯 약간은 고리타분한, 그런 행복이지요. 정확히 (그러나 쉽게) 말하자면, 인간 고유 이성의 활동인 '탁월함(덕)'을 따르면 '최고선(善)'인 행복에 도달한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은 영적이고 고귀하다 볼 수 있겠습니다. 이는 천박함과 다르고 말고요.


그러나 B, 가만 생각해보면 그 고귀한 행복이라는 건 좀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고귀하고 선한 영혼의 행복은 거저 얻어진답니까? 우리는 그런 행복을 위한 과정이 때로는 절대적으로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음을 경험적으로 잘 압니다. 불교에서만 하더라도 영혼이 열반과 같은 최고의 경지에 이르려면 고통스러운 수행을 거쳐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처럼 행복을 위해 행복하지 않은 것은 옳은지요? 결국에 존재는 영원히 현재만을 삽니다. 과거나 미래는 관념 속에 존재할 뿐, 실재하는 것은 단지 끊임없는 현재입니다. 관념 속에서만 존재할 (혹은 그마저도 확실치 않은) 행복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 그것이 옳습니까? 물론 희생이 있어야지만 고귀하다 하겠지만은, 저는 그런 희생이 과연 시간을 옳게 쓰는 방법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비롯한 존재에게 존재 이유나 목적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우리를 만들고 거기에다 목적을 부여했습니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우리는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입니다. 났으니 사는 것이고, 죽어야 하니 죽는 것입니다. 따라서 태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목적은 무엇인가 같은 "왜?"와 관련된 질문은 조금 불필요해 보입니다. 존재가 난 데에는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기에 그러합니다.



되려 우리는 "왜?"라기보단 "어떻게?"라고 질문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라고 자문하면 존재에 목표나 이유를 마음대로 가져다 붙일 수도 있고, 혹은 그저 흐름대로 순응하며 살 수도 있습니다. 천박한 행복에 빠져 향락을 즐길 수도 있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고통을 감내할 수도 있습니다. 타고난 이유와 목적에 매몰되지 않아야 이처럼 존재는 자유롭겠습니다.


그리하여 내가 "어떻게" 살아왔나를 되돌아보면 B,

실은 저도 천박함 행복함으로부터 완전한 무죄라고 하긴 어렵겠습니다. 시간을 당장의 행복으로 범벅하는 일은 얼마나 달콤하던가요? 돈을 좇고 탕진하는 일, 몸을 위해 몸을 섞는 일... 아니면 당장에 학창 시절만 떠올려 봐도, 시험 기간에 공부 대신 다른 무언갈 하며 보내는 시간의 맛은 아주 달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니까, 제가 아주 고귀하게만은 살지 않았다 그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박한 맛을 좇는다는 이유로 그를 멀리한 까닭은 제 시간이 고귀한 맛도, 그렇다고 천박한 맛도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그저 적당히 섞인 맛.

비율이 적당한 라테나 블렌디드 위스키처럼, 제 시간은 적당히 섞인 맛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랫동안 입에 머금고 음미할수록 새롭게 와닿아 깨달을 수 있도록 적당히 달고 쓴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결국 제게 "어떻게?"라고 물으신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을 사다가 매우 아끼며 함께할 것입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내와 손을 잡고 과거의 잘못과 미래에 저지를 잘못을 성찰할 것입니다. 네온사인이 떠다니는 황혼의 도시를 헤집다 마음에 드는 벤치에서 동이 틀 때까지 사유하는 글을 쓸 것입니다.


흔한 유희 속에서도 숭고한 사랑을 믿을 것입니다.


그러니 B, 오늘은 저와 흔한 유희를 즐깁시다.

흔한 유희 속에서 흔하지 않은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시간의 맛을 음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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