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편지
슬픈 밤입니다, B.
오늘도 어김없이 저는 무언갈 잃었습니다.
매번 잃어도 잃는다는 건 참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오늘엔 또다시 카드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올해만 벌써 다섯 번 째인가요.
현금이 희귀한 세상에서 카드를 잃으면 무력해집니다. 카드를 잃고, 현금도 없는 상황에서 암만 머리를 굴려봐도 당장에 지하철을 탈 방법이 없어 무력하게 40분 거리를 걸었습니다. 걷는 것이야 40분 아니고 4시간이라도 기쁘게 할 수 있지만은, 잃음을 자책하면서는 그러기는 쉽지 않은 법이지요.
B, 분명 당신도 무언갈 잃고 자책한 적 있겠지요?
혹여 당신이 잃은 것 중 가장 큰 것은 무엇입니까?
저만 이처럼 잃음 앞에 무방비한 것인가요?
우리는 잃음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니면 애초에 잃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도는 없답니까?
아마도, 짧은 제 생의 경험으로부터 짐작컨대 그런 기막힌 방도는 없을 듯합니다. 오히려 저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나고부턴 잃기만 한 것 같습니다. 물론 얻음이 먼저 와야지만 잃음이 있으니, 잃기만 했다는 건 어불성설로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얻은 모든 것 ㅡ 그냥 태어나면서부터 얻어진 것이든 아등바등하여 겨우 얻은 것이든 ㅡ 모두는 줄곧 예외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무엇을 쥐어도 백사장의 모래와 같은 법이지요. 하얗고 고와 가져 보려 애써 그러모아 거머쥐어도, 손가락 사이 작은 틈새로 빠져나가는 건 섭리와 같아 거스지 못합니다. 카드도, 돈도, 사람도, 시간 속 순간도 종국에 이르러서는 어떤 틈새로 빠져나갔는지 알지도 못하게 잃어져 있습니다. 때문에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다는 것과 같고, 때문에 저는 나고부턴 잃기만 했다 할 수 있겠습니다.
B, 이러한 잃는 삶을 살아왔음에도 여전히 잃음에 익숙지 않은 저는, 꽤 자주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는 상상을 합니다. 그건 상상조차 하기 싫은 순간임이 분명한데도, 제 의지와 관계없이 상상하게 됩니다. 되려 두려운 일은 떠올리지 않으려 발버둥 칠수록 더욱 생생히 떠올려지듯이... 그 그림 같은 상상 속의 저는, 이제까지 모든 잃음 앞에서 항상 그러하였듯, 여전히 무력합니다.
소중한 이가 내게서 등을 돌려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끄덕이며 지켜볼 수밖에요. 소중한 이의 까만 눈동자 속 작은 빛이 생명을 다해간대도 슬퍼하며 지켜볼 수밖에요. 이처럼 인간으로서의 저는, 시간이 선사하는 잃음 앞에 너무나도 한스럽게 무력합니다.
특히나 저는 무엇이든 자주 잃기 때문인지, 남들이 좋다 하는 것을 얻고서도 금세 무력해하기 일쑤입니다. 매번 잃기도 전부터 무력해하다 결국엔 진짜 잃고서 상실감에 헤매길 반복하는 제가 꼴불견이었는지, 안쓰러웠는지 언젠가 또 무언갈 잃고 방에 빈 깡통 마냥 찌그러져있는 제게 엄마는 이렇게 말했었습니다. (눈썹을 모으고 꽤 화난 투로 말하였는데, 꼴불견이라는 표정인지 안쓰럽다는 표정인지 알쏭달쏭하였습니다.)
"무언가를 잃어버렸을 때는 눈을 감고 손을 뻗어봐. 잃어버린 물건이 다시 네 눈앞에 있다고 생각해 보란 말이야. 또 뻗은 손으로는 더듬더듬해 보는 거지. 잃어버린 걸 다시 만진다는 느낌으로. 그러고는 네가 어디서 무얼 했나 떠올리면서, 가봤었던 모든 곳을 더듬는다는 생각으로 뻗은 손을 휘휘 젓기도 해봐. 분명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단서가 떠오를 거다."
눈을 감고 손을 뻗으면...
글쎄요, 엄마는 그게 되나 봅니다. (엄마라는 존재는 여전히, 늘 제게 만능이긴 합니다만...) 저야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몇 번 시도해 보았으나 엄마처럼 쉽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실은 오늘도 일이 끝났으니 편히 집에 가고 싶단 간절한 마음으로 눈을 감고 손을 뻗어보았으나 별 소득이 없었습니다.
B, 그래서 만약에, 당신이 이 방법으로 무언가 잃어버린 걸 찾게 된다면 꼭 제게 알려주었으면 합니다. 이왕이면 어찌하였는지 그 방법까지 세세하게 말입니다. 내 의식이 모르는 잃은 물건을 무의식 속에서 찾는다는 건 굉장히 편리한, 게다가 진짜 멋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의식 따위가 어딨냐며 비웃을 이들도 있겠지만, 아마 칼 융이 살아있었다면 무의식 속에서 답을 찾는 이 과정의 진가에 대해 분명 변호했을 겁니다.
칼 융은 페르소나 개념을 정립하고, MBTI의 원형인 성격 유형론을 제시한 정신의학자로, 그 누구보다 무의식이 가진 에너지를 잘 알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칼 융은 무의식의 에너지가 외부로도 발현된다 생각했고, 그렇게 발현된 무의식 에너지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우리가 '우연'이라 불리는 것들로 나타난다 하였습니다. (어딘가 동양 철학 느낌이 나는 것은 그가 실제로 동양 철학에 심취하였던 까닭입니다.)
이처럼 약간은 오컬트적인 이야기는 제쳐두고서라도, 나 안에 '내가 모르는 나', '내가 잃어버린 나'가 무의식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종종 경험적으로 느껴집니다. 내가 무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무아의 지경에서... 이상한 몸짓을 곁들여서 말을 한다거나, 믿기지 않는 속도로 멋있는 글을 쓴다거나, 한 시간이 십 분처럼 느껴지게 사랑을 나눈다거나...
여하튼 간에 융은 '내가 잃어버린 나'인 이 무의식에 닿아야 진실된 자아가 완성될 수 있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의식에 닿기 위해서는 가장 어두운 곳을 보라 하였습니다. 이 말인즉슨,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피하고 싶은 것을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가 의식하고 싶지 않아 꽁꽁 숨겨둔 우리 심연이 있을 테니까요.
"당신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당신이 가장 보고 싶지 않아 하는 곳에서 발견된다."
융의 말에 기대어,
슬픈 오늘 밤에 눈을 감고 손을 뻗어봅니다.
여전히 쉽지는 않습니다만,
오늘 잃어버린 카드와
지난날 잃어버린 사람들과 순간들을 위해
눈을 감고 손을 뻗어봅니다.
오늘처럼 잃어버린 무언가를 위할 때마다 눈을 감고 손을 뻗다 보면, 언젠간 찾고자 하는 것을 캄캄한 어두움 가운데 발견해낼 수 있겠지요. 시간 속에 산산이 흩어져 형체도 모르게 잃은 것조차도, 분명 내 안에서 찾아 다시금 반갑게 맞이할 수 있을 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