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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제 Aug 30. 2022

겉을 내보이기 위해서는

아에이오우

"이--------"


침 한 번 삼키고. 다시.


"아--------"


거울 앞에 서서 입술을 가로로 쭈욱 찢었다가 커다랗게 쫘악 벌렸다가 당기는 턱선을 문지르며 칫솔에 치약을 묻힌다. 시린 이에 개선을 줄 수 있다는 치약의 씁쓸한 맛을 느끼며 거울 속의 나를 멍하니 바라보다 보면 문득 의문이 들곤 한다.

그 애가 이렇게 자랄 수 있구나.


치과 삼촌을 처음으로 본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아버지가 어딜 좀 가자는 말에 군말 없이 따라나섰는데 당도한 곳은 뜻밖에도 치과였다. 그 나이 즈음의 아이들이 보일 법한 극도의 배신감과 분노 대신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치과 의자에 누웠다. 처음 보는 삼촌은 내 이를 여기저기 들쑤시더니 급기야는 턱을 양손으로 힘껏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턱이 부러질 거야!'


나는 공포감에 빠르게 눈동자를 돌려 아빠를 확인했는데 아빠는 나를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평온한 얼굴로 삼촌이 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나는 눈물을 찔끔 흘리며 얌전히 내 턱을 삼촌에게 내주는 수밖에 없었다.


"어때?"

"교정해야겠다."


삼촌의 그 한 마디로 나의 십 년의 교정 인생이 결정됐다. 나는 아래턱이 윗턱보다 튀어나온 전형적인 주걱턱이었는데 심지어 극심한 비염이었다. 이게 무슨 상관이겠냐 싶겠지만 어린 시절 내내 구강호흡이라는 주걱턱을 자극하기 아주 좋은 습관이 있었다는 뜻이다.


얼렁뚱땅 시작한 교정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 치과를 새로 다녀올 때마다 아파서 며칠이고 눈물을 삼켜야 했고, 음식은 제대로 씹기가 힘들어 먹는 둥 마는 둥 하다 방에 들어가기 일쑤였다. 엄마는 아직도 내 키가 작은 이유가 다 교정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엄마와 나와 언니는 셋 다 비슷하게 땅딸막하다)


남들은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십 년간 겪었다는 걸 생각하면 끔찍할 정도의 불행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교정이 필요한데 하지 못하는 아이들에 비하면 삼촌이라는 '인맥'이 있었으므로 비용 절감 차원에서는 행운이었던 셈이다.


부모님에게는 아무래도 행운의 기운이 더 세게 작용했을지 모르지만 어린 당사자였던 나에게는 불행의 기운이 더 강했다. 학교에서 급식을 먹으면 남들이 보기 전에 얼른 화장실에 가서 양치를 하고 교정기를 닦아 끼워야 했다. 아무리 신경을 써도 꼭 화장실에서 몇몇 아이들을 마주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야, 쟤 틀니 낀다."

"저걸 왜 여기서 닦아?"

"아, 더러워."


나는 세면대 구석에 서서 최대한 보이지 않게 몸을 숙이고 교정기를 닦았지만 화장실의 거울은 늘 유난히도 크게 나와 교정기를 비추고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다양한 소리들을 듣게 되었고, 결국 나는 학교에서 교정기를 닦는 대신 오후에 교정기를 끼지 않는 것으로 타협을 맺었다. (엄마는 아직도 이 사실을 모르신다. 이 자리를 빌려 비싼 교정기를 사주신 어머니께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창피함은 초등학교를 넘어 중학생 때까지도 이어졌다. 그때는 탈부착용이 아닌 이에 띠처럼 두르는 형식의 교정기를 하고 있었는데, 뭔가를 먹으면 꼭 그 사이에 이물질이 끼거나 색이 변하곤 했다.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간식을 나눠먹을 때마다 양치를 할 수는 없으므로 종종 나는 친구들의 지적을 받아야 했다. 결국 여기서 내가 맺은 타협점은 같은 교정기를 끼는 아이를 찾아 친구가 되는 일이었다. (이제와서지만 그 친구의 교정 스토리도 만만치 않았던 것 같다)


내 턱은 점점 상태가 호전되기는커녕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는데 턱을 밀어 넣는 것과 동시에 왼쪽 턱이 좀 더 크게 자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릴 때는 상상하지 못했던 성장기의 반전이었다. 그랬다. 나는 주걱턱에 이어 안면비대칭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는 더욱 빡센 교정과 우울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 상태로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여전히 아이들이 나의 교정을 보고 비웃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게 웬 걸? 오히려 부러워하는 아이들이 수두룩했다.


"보기 흉하지 않아?"

"뭐가 흉해! 교정은 부의 상징이잖아!"


불개미가 들끓는 자그만 반지하방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우리 집 살림에 나에게 처음으로 '부의 상징'을 물고 다니는 아이라는 별명이 붙기 시작했다. 자기들도 교정을 하고 싶다며 이것저것 물어오는 아이들도 생겼다. 고등학생쯤 되면 돈과 외모에 다른 시각을 갖게 되는구나, 하고 나는 깜짝 놀랐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나는 '부의 상징'으로 아이들의 부러움을 사고 다녔다. 물론, 집은 점점 더 가난해졌지만 우리 집을 모르는 아이들에게는 나의 치아를 새하얗게 감싸고 있는 교정기가 곧 나의 이미지였던 셈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웃긴 일이지만, 방학마다 해외여행을 가고, 부모님이 가게를 여러 채 운영하며, 집에 도우미를 두고 사는 친구들 사이에서 교정기는 나의 최후의 자존심이었다.




교정은 성인이 될 때까지 이어졌고, 성인이 된 후에도 치과와 병원을 들락거리며 치아와 잇몸, 턱관절에 대한 치료를 꾸준히 받은 덕에 지금은 교정을 시작할 때의 모습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좋아졌다. 물론, 학생 때 친구들을 만나면 여전히 그대로라는 말을 듣긴 한다. 하지만, 양치를 하기 위해 화장실 거울 앞에 설 때마다 나는 내 모습을 확인하고, 놀라고, 의아해졌다가, 흐뭇해지곤 한다.


창피함을 몰고 다니던 불행의 아이콘이었던 그 아이가 지금은 이렇게 번듯한 치아를 가지게 되었구나.


사실 안면비대칭은 비교적 좋아졌을 뿐 아직도 티가 날 정도다. 조금만 방심하면 제자리를 찾아가려는 치아 때문에 정기적으로 검진도 다니고 있다.


그럼, 역시 나의 십 년을 넘은 교정 인생은 불행일까?


치과 삼촌은 아빠의 사촌 형이라고 했다. 아빠를 보자마자 매우 반가워하며 나 역시 반겨주셨던 걸 이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또렷이 기억한다. 아빠와 방문할 때도, 엄마와 갈 때도, 나이가 들어 나 혼자 치과에 방문할 때도 삼촌은 한결같이 나를 반겨주며 가족의 안부를 묻곤 했다. 덕분에 나는 지금도 치과를 가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삼촌에게 인사하듯 반가운 마음으로 방문한다. (삼촌에게 교정을 받은 것은 청소년기에 끝났지만 아직도 치과를 보면 마음속이 간질간질하다)


몇 년을 산 동네에서도 길을 잃는 아이가 처음으로 제 힘으로 혼자 먼 길을 떠난 곳도 치과였다. 친구와 단 둘이 지하철 여행을 한 것도 치과를 가는 길이었고, 늘 일에 바빠 밤에만 볼 수 있는 엄마와 대낮에 함께 지하철을 타며 나른한 햇살과 반짝이는 한강 다리를 보게 된 것도 치과를 가는 길이었다.


교정은 나의 어린 시절을 모두 얼룩 지울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지만, 동시에 다양한 경험과 기억, 감각을 선물했다. 교정은 내게 검은색이면서 동시에 푸른빛이다. 청소년기 감정을 그대로 담아낸 듯한 어지러운 감정이 그 안에 담겨 있다.


그렇다고 교정을 하게 된 걸 행운이라고 할 순 없겠다. 그저 불행과 행운 그 사이에서 지나온 시간일 뿐이다. 지금도 나는 무언가 잘 풀리지 않을 때면 거울 앞에 서서 입술을 당겨 "이-"와 "아-"를 만든다. 그 순간 역시 지나간 시간이 되리라는 것을 되새기면서.






외발 잡이 기차 하나

아무 객도 타지 않고

다른 기차들이 앞서 가도

지이잉 지이잉

다리를 끌며 울퉁불퉁 철로를

끄떡없이 자나 간다

칙칙폭폭

기차는 이렇게 달려야 한다고

시범을 보여도

지이잉 지이잉

끄떡없이 지나간다


우산을 쓴 신사 하나

외발 잡이 기차에 우산을 던진다

문고리에 걸린 우산 하나

끼이익 끼이익


우산을 옆구리에 낀

외발 잡이 기차 하나

지잉끼익

끄떡없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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