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생적 오지라퍼 Nov 08. 2024

고양이를 키우시나요?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역시 틀렸다.

동물을 좋아라 하지는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어렸을 때는 동네에서 강아지를 마구 풀어놓고 키우던 시기였다.

딱히 키우는 것인지도 알 수 없는 들개 수준의 개들이 쉴새없이 골목을 돌아다니고

나는 그들이 무서워서 피해다니곤 했던 기억뿐이다.

그 당시에도 골목엔 고양이도 있었을테지만 고양이에 대한 아무런 기억조차 없다.

그나마 동물원을 가서는 내가 호랑이띠이니 호랑이에 관심이 조금 갔을 뿐

일요일마다 동물의 왕국을 보고 계시는 아버지가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 내가 제일 싫어하는 동물로 손꼽은 것은 단연 쥐였다.

그 시대에는 왜 그렇게 쥐가 많았던 건지 사방에서 찍찍거리고 돌아다니는 쥐를 안보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전국적으로 쥐잡는 날이 있었을 정도였는데 쥐잡는 전문가가 바로 친정 엄마였다.

쥐약을 치고 쥐잡는 틀을 놓고 자면 아침에 일어나보면 한 마리씩이 그 안에서 몸부림치고 있던 그 광경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우리 엄마는 그렇게 잡힌 쥐들을 물에 담가 죽이기도 하고 연탄불에 올려 죽이기도 하는 강심장의 소유자였다. (그래야 쥐의 씨를 말리게 된다는 엄마의 지론이셨다.)

그런 쥐를 다시 보게 된 것은 대학에 들어가서 였다.

대학교 지하 연구실에 내려간 적이 있는데 흰색 실험용 쥐를 대량으로 키우고 있는 공간이 있었다.

지하 1층부터 잊어버렸던 특유의 쥐 냄새가 났고 그리고는 생각보다 찍찍거리는 소리가 꽤 크게 들렸었다.

쥐가 전염성이 있고 보기에도 거부감이 있고 사람들이 선호하는 동물은 아니지만

아직도 동물 실험의 주 대상이며 의약품의 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조금은 있다.


친정아버지의 최애 강아지를 키우게 된 것은 딸들이 다 커서 대학생이 되었을 때였다.

조그마한 강아지 한마리가 집안을 돌아다니면서 주는 행복감이 이렇게 큰 것이구나를 처음 느꼈던 것 같다.

물론 똥을 치우고 사방에 오줌을 싸놓고 그리고 그 냄새가 느껴질때는 귀찮기도 했었으나

자고 있는 모습은 천사이고

뛰어다니는 모습은 귀엽기 짝이 없고

가끔 애교를 부리는 모습을 보면 이맛에 강아지 키우지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그랬던 강아지에 대한 관심이 멀어지기 시작한 것은 출산 직후였다.

친정집에서 산후조리를 하던 시기에

강아지가 아들 녀석을 건드리지는 않을까, 이쁜 얼굴을 긁어놓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 강아지에 대한 애정도가 급속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으나

막상 강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는 살짝 눈물이 났다.

내가 유일하게 집에서 같이 놀았던 그 강아지 이름은 백순이였다.


강아지를 키울 수는 없었다.

매일 산책을 시키고 배변 훈련을 시키고 자주 짖어대는 소리를 듣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이런 나에게 고양이는 그렇지 않다고

고양이는 숨어서 가만히 잠만 잔다고(누구보다도 부지런하게 집안 돌아가는걸 살핀다)

배변도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물론 모래통에 잘 숨겨두지만 결국은 치워야한다) 

먹을 것도 알아서 먹는다고(사료는 알아서 먹지만 물은 깨끗한 방금 떠 준 물만 먹는다. 츄르는 짜면서 먹여줘야한다. 우유 먹여주는 것처럼)

이렇게 잘못된 정보를 계속 에게 주입시킨 것은 아들 녀석이다.

그리고는 어느 날 흰 아기 고양이 설이가 예고도 없이 집에 왔다.

똘망똘망하나 만만치 않았보였던 그 눈이 나는 무서웠다.

고양이랑 둘이 한 공간에 같이 있다는 것 숨막힐 정도로 부담스러워서

한동안은 어린 설이를 방 하나에 가두어두고 출근을 했고

아들 녀석이 퇴근해서야 비로서 설이는 거실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궁금증이 많은 설이에게 너무도 가혹한 처사였다.

그래서 지금도 설이는 문을 닫는 것을 엄청 싫어하고 문을 닫으려하면 낑낑대면서 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닫힌 문 앞에서 늘 기도하는 모습으로 열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 때문이라고, 가두어두었던 어렸을때의 경험이 있어서 그럴 것이라고 아들 녀석은 힐난을 한다.

그렇게 설이가 마냥 무섭고 부담스러웠는데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덜 무서워지고 고양이 혼자있는 시간동안이 걱정 되기 시작하면서

설이를 보는 나의 눈에 조금씩 애정이 생겨나기 시작했고(이쁜 짓을 많이 했다)

결정적으로는 중성화수술을 하고 아파서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나면서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고양이 설이를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이제는 흰 고양이 설이가 없는 집을 상상할 수도 없고(물론 가구와 벽지를 조금 뜯어놓긴 했다)

숨어있는 설이를 내가 찾아다니느라 바쁘고(나는 숨바꼭질 놀이라 생각하지만)

아침마다 나에게 안짱다리로 사박사박 걸어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뛰는것 말고 걷는게 좋다)

옛날, 동물이라고는 좋아하지 않았던 나도 틀렸고

설이를 무지막지하게 좋아하는 지금의 나도 조금은 틀렸다.

너무 과하게 애정을 구걸한다고

설이에게 과하게 집착한다고

아들 녀석에게 종종 구박을 받기도 한다.

동물은 예나 지금이나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데

나만 무서워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하고 피하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했다.

눈꼽을 닦고 츄르 하나를 먹은 설이는 거실 캣타워 요즈음 최애 자리에서 초저녁 잠을 자고 있다.

한 시간쯤 지나면 하품을 하고 엉덩이를 치켜들면서 나를 찾아올 것이다.

나의 하루는 항상 설이의 궁디팡팡으로 마감된다.

사진 속의 설이는 어리다.

집에 데리고 온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의 사진이다.

이제는 설이도 나와 함께 늙어가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늙지않은 혼밥요리사의 비밀 레시피 9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