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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르는 세상

다들 자기만의 세상이 있다.

by 태생적 오지라퍼

이 나이가 되어도 아직은 모르는 것이 아는 것보다

더 많다.

다행이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면 새롭게 배울 것이 없지 않은가?

모르는 것이 많으면 이제부터 남는 많은 시간에 배우면 될 것이 아닌가?

물론 학습 속도는 느릴 것이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많을 것이지만.

오늘 오전에는 또 하나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전혀 모르고 있었던 세상이다.


오늘 아침에는 이상하게 배가 고팠다.

수십년 동안 학교에서 아침 먹는 때가

지금 이 시간쯤이었던 것을 내 몸은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 학교에 나가지 않으니 식사 시간을 조절해볼까 했었다.

우아하게 11시쯤 브런치를 먹고 저녁은 아들 녀석 퇴근에 맞추어서 준비하면 되겠지 싶어서

배꼽시계를 11시에 맞추는 시도를 하였으나

그게 하루 아침에 쉽지는 않았다.

할 수 없이 적은 양으로 허기짐을 막아주는 목적으로

생전 먹지않던 콘푸로스트를 우유에 타고

블루베리 몇 알 띄워서 급히 먹었다.

이럴 줄 알았는지 어제 새벽 배송으로 위의 것들을 주문해두었었다.


그리고는 앵배추랑 양파 듬뿍 넣어 오징어볶음을 하고

그 냄새에 현혹되어 10시쯤 밥에 올려 먹었다.

내가 한 것이지만 짜거나 맵지 않으면서도 맛나게 잘 되었다.

배가 부르니 산책삼아 봄동 사러 나서볼까 마음이 들었고

전통 시장을 갈까 대형 마트를 갈까 하다가

편리성과 거리를 고려하여 대형 마트로 목적지를 정했다.

일부러 개강 준비에 바쁠 대학교를 가로질러

천천이 걸어가는 경로를 선택했는데

밖에서는 보기에는 개강 준비로 바쁜 것은 전혀 안느껴졌고(교수인 동생 이야기로는 엄청 바쁘다고 한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외국인 학생 정도밖에는 안보였다.(아직 3일의 휴일이 남아있으니 그럴 것이다.)

3월 4일이면 이곳은 시끌벅적 난리가 날 것이

신입생들은 금방 표가 날 것이다.

새 옷, 새 운동화, 새 가방과 그리고 허둥지둥하는 모습과 눈빛에서 말이다.

개강 준비 하는 것처럼 주변의 꽃들도 개화 준비가 차근차근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본 것은 덤이다.

사진을 여러 장 찍는 것으로

그들의 개화 준비 노고를 인정해준다.


오전에 나를 정말 놀라게 만든 일은 마트에 도착해서였다.

평일 오전이라 한가하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갔는데 와우, 인산인해이다.

삼겹살과 목살 특별 세일이 있나보다.

줄이 길게 늘어서있다.

전단지 쿠폰을 가지고 오면 할인이 더 되나보다.

다들 전단지를 잘라서 들고 있다.

나만 다른 세상에서 온 것이 틀림없다.


긴 줄을 피해서 봄동, 미나리, 깐마늘, 조림용 고추 등을 샀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평소에 안 보이던 물품이 눈에 보인다.

토마토가 베이스인 스튜와 덮밥용 짜장 소스 등이다.

눈에 뜨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혼밥용으로 딱인 것들이다.

그리고 이때쯤 첫 수업 시간 학생용 간식용도로

열심히 구입하던

대용량 과자나 초콜릿, 사탕 등은 그냥 지나쳤다.

나의 첫 수업 시간은 안내와 함께 교과서를 꼼꼼이 읽고 퀴즈를 맞추던 삐리리 퀴즈로 시작했었다.

웃음과 간식과 집중을 이끌어내는 나만의 비법이었던 셈이다.

이제는 구입할 필요가 없어진 품목이니

보는 것만으로도 씁쓸하다.

비상시 정신차리는 용도로 가끔 마시던

커피믹스도 이제는 살 필요가 없다.

다 그렇게 보고 싶은 것만 보고 필요한 것만 산다.


계산 대기줄도 아침부터 만만치 않다.

계산 대기줄이나 돼지고기 행사 줄 세우는 직원은 엄청 고생하고 있었다.

지금껏 못봤던 모습이다.

나는 항상 저녁 퇴근 시간쯤에 들러 1+1 이나 땡처리 식품 위주의 구입만 했던차라

오늘 평일 오픈런으로 또 대량으로 물품을 구입하는 사람들을 보니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그 마트가

난생 처음 방문하는 낯선 세상이고

처음 입문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학교 교직원 단톡에

마지막 안녕 인사를 올리고

3년간 머물렀던 그 톡에서 나가기를 눌렀다.

인연 종료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10초 정도.

재직자 실비보험에서 퇴직자 실비보험으로 갈아타는데 걸리는 시간은 30초쯤.

이제 나는 다른 세상으로 진입하려 한다.

내가 모르는 많은 세상이 있고

그 곳에 나는 한 발씩 조심스레 들어서게 될 것이다.

두렵기도 하지만 가급적 즐겨보려 한다.

어르신들이 왜 휴대폰 벨을 소리로 크게 해놓는지 알것도 같다.

오전 내내 아무런 연락이 없는 휴대폰을 자꾸 살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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