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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산에 오르는 아저씨들의 심정을 백번 이해한다.

가끔 가야 산도 멋지다.

by 태생적 오지라퍼

교직생활 중 서울대에서 보낸 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

한번은 우수 과학교사 6개월 파견 연수, 다른 한번은 특별학습연구년이다.

두 번 다 나는 지구과학교육 전공 대학원방에 일원으로 초대해주어서

다시 대학원생이 되는 기분을 만끽하면서

서울대의 사계절을 느끼는 행복한 시절을 보냈었다.

대중교통으로 서울대 연구실에 가려면

낙성대역에서 마을버스를 환승헤서 올라가야 하는데

이 마을버스 줄에는 많은 관악산 등반객들이 함께 한다.(그 줄 옆은 유명한 빵집이다. 거기도 줄을 선다.)

공대쪽까지 올라가서 관악산을 올라가는 길을 선호하시는 분들이다.

일반적인 분들은 서울대 정문쪽에서 관악산 입구로의 등반을 하지만

고수님들은 서울대 공대까지 마을버스를 타고

그 이후 어려운 코스를 등반하고 한다.

그 당시 내가 보기에 꽤 젊은 아저씨들인 듯 보였는데

아침부터 관악산을 자주 오르는 사람들이었고

가끔 친구들과 산을 올라서 흥분되고 상기되고 기분이 좋아보이는 편이 아니라

무념무상 도를 닦는 듯한 무표정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하루 종일 할 것이 없어서 하루가 너무 긴 상황이 되면

산이라도 타야되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내 저질체력을 잘 알고 있으니

산은 무리이고 평지로만 다니지만

체력에 자신있는 분들은 당연히 산에 오를 것이라 생각된다.

오늘은 정말 답답한 것이 극치로 차올라

산책을 오전, 오후 두 번이나 했으니 그 분들을

백번 이해한 날이다.


오전 산책은 목적이 있었다.

나의 전전 핸드폰을 초기화하여 수거함에 넣는 것이다.

두 번이나 해당 기종의 대리점을 찾아갔었으나 꼼꼼이 위치를 살피지 않아 엉뚱한 곳만 돌다가 왔다.

오늘은 내용을 꼼꼼이 살펴서 삼 세 번만에 드디어 성공했다.(요새 자꾸 문서를 건성건성 본다.)

그런데 더 속상했던 것은 초기화하는게 별다른 과정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더라는 점이다.

설정만 누르면 그렇게 쉽게 초기화가 되는 것을

꼭 대리점을 찾아가서 초기화 작업을 하고

수거함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한 나의 바보스러움에

또 울적하다.

요새 1일 1바보짓을 한다.

며칠 전은 카드를 잊어버린 줄 알고 혼비백산했다는 막내동생과 전화를 하다가

편의점에 내 카드를 놓고 온줄 알고

내가 더 혼비백산했었다.

3월에만 이런 일이 두 번째이다.

(제주 첫날도 그랬었다.)

공무원연금관리공단에서 연금지급 관련 안내문이 왔길래

오랜만에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여기저기 살펴보니

나는 신청했다고 생각했던 복지포인트 카드 청구가 안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고

(지금이라도 처리했으니 다행이다.)

재직자 단체 보험은 이제 퇴직자 단체 보험으로 갈아탄 것을 확인했다.

오후 산책에서는 식물을 보고 동물도 보고

(아직 모두가 다 노란색은 아니다. 해가 잘드는 곳 일부만 노랗다. 사진은 바로 그 부분이다.)

지하철 두 정거장 거리에 있는 대형 반찬집에서

표고버섯 탕수와 곰피와 초장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그래도 오늘은 줌회의 하느라고 입도 떼었고

후배 1명, 선배 1명과 전화 통화도 2통이나 했으니 그나마 한마디도 못한 날은 아니다.


퇴직 후 3주차가 적응에 있어서 고비이라

몹시 우울한 감정이 든 것일수도

유키 구라마토 연주를 종일 틀어 놓아서 일수도 있고

아들 녀석과 사이가 틀어져서 일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은 산책하다가 넋놓고 앉아있지는 않았으니 그것은 다행이다.

매일을 산에 오르는 아저씨의 심정으로 살기는 힘들다.

가끔 올라야 산에 있는 꽃들도 나무들도 이뻐보이는 법이다.

내일은 오랫만에 영재원 강의날이니

힘이 날 것이라 믿어본다.


(표고버섯 탕수와 곰피는 왜 산것일까? 저녁은 유부초밥 만들어 먹었는데. 오늘 산것은 그동안 모은 쿠폰으로 계산했으니 오늘 지출은 아닌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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