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가서 쉴 시간 그 이상의 의미
오랜 기간을 오전 여덟시 반에 일과를 시작하고
(물론 출근은 한참전에 했다.)
오후 네 시반 칼퇴근의 삶을 살았다.
가끔은 초과근무를 하긴 했지만 말이다.
요새 MZ 세대들이 좋아라하는 퇴근 후의 삶이 보장되는 퇴근 시간이었다.
그러나 나는 근무 시간 중에 너무도 열심히 살았는지
퇴근 시간 이후에는 딱히 무언가를 도모할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아주 특별한 경우의 모임 참석, 개인 운동 그리고 가벼운 산책 빼고는...
그래서 날이 깜깜해진 이후의 시간은 나에게 그리 많은 추억이 없다.
고양이 설이와 놀이와 눈맞춤 그리고 나의 일방적인 애정표현,
대체 휴무를 사용한 아들 녀석과 함께 한 떡볶기 점심을 제외하고는
또 무언가를 했는지 뚜렷이 기억도 나지 않는 하루를 보내고
(어제와 또 그제와 다름없었다.)
오늘은 네시 반이 넘어서 산책을 나서는 흔치 않는 시도를 해본다.
그 사이 몇몇 지인들에게 <어떻게 지내냐고> 톡이 온다.
물어봐주는 사람들은 정말로 나를 귀하게 생각해주는 사람들이다.
이 바쁜 3월에 나를 떠올려주었다는 것 만으로도 고맙다.
나의 답변은 복붙이다.
<나의 직업은 산책꾼이고 주된 업무는 주변의 봄꽃 관찰과 개화 정도 파악이고
업무 범위는 무한대라고...>
그리고는 어제, 오늘 꽃 사진을 보내주면 다들 놀란다.
벌써 꽃이 이만큼이나 폈냐면서...
꽃이 피는 것을 놓칠만큼 학교의 3월은 바쁘기만 하다.
나도 늘상 그랬었다.
그리고 3월의 마지막 주에는 목은 잠기고 감기약으로 몸은 처지곤 했었다.
이상한 것은 수업을 하지 않는 올 3월 마지막 주에 왜
내 목은 잠기고 감기약을 먹고 있는거냐?
미세먼지 때문이라고 해두자.
오늘은 조금 멀리 나가 서울숲을 돌아본다.
지난 2월 가장 추웠던 날 지인들을 만나러 갔던
그 날 이후에 처음이다.
늘상 사람이 많은 성수와 서울숲 주위이지만
네시 반 이후에는 개와 함께 나온 산책러들이 유독 많고(강아지는 행복하게 흙길을 뛰어다녔다.)
퇴근 후 데이트를 하러 나온 연인들이 대부분이며
(아들 녀석도 데이트하러 멀리 갔다.)
주변 맛집들의 음식 냄새가 지나는 사람들을 유혹하고(나는 유혹당하지 않았다.)
오늘은 꽃도 보았지만 해가 지는 과정도 지켜보았고
(해질녘은 항상 마음이 가라앉는다. 기다리던 소식이 오지 않아서는 결코 아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지하철역 근처 건물과 건물 빈 공간 사이로 남산뷰도 보았다.
(남산타워는 나에게 안온감을 가져다준다. 이유는 모르겠다만. 롯데타워는 아니다.)
제법 캄캄해진 후 집에 돌아오니 고양이 설이가 오랜만에 뛰어나와 맞이해준다.
요새 계속 같이 붙어있으니 별로 좋아라하지도 않았었는데 말이다.
혹시 하고 보조등 하나를 켜놓고 갔지만 나보다도
더 어둠을 무서워하는 설이이다.
고양이 맞냐? 가끔 나는 설이의 정체성이 의심이 든다.
막내 동생도 그런 말을 했다.
<서늘한 눈빛이 꼭 아버지야. 아버지가 우리를 째려볼때랑 꼭 닮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