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선물이다.
월요일 저녁 8시에 해야할 일이 생겼다.
나의 최애팀의 유튜브 방송을 보는 일이다.
다음 주에는 내 얼굴이 살짝 비춰질지도 모른다.
비공식 경기이지만 지인 찬스로 응원을 갔기 때문이다.
안 비춰지기를 희망한다만(너무 늙었다. 선글라스로 가리기에도.)
유튜브로 보니까 실시간 채팅창 보랴 화면 보랴
온통 집중해야 하지만 재미있다.
단체 관람하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23만명이 나랑 같은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에 놀랍기도 하다.
(어제 동시 접속자수가 23만명이었다 한다.
아직 본격적인 야구는 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래서 기본 2번은 돌려봐야 세세한 내용까지
다 파악하게 된다.
화요일 오전에 한번 더 돌려보면 되니 아무 문제가 없다.
어제 영상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한 이 문구가 나의 오늘 글의 주제가 되었다.
<우리의 끝은 우리가 정한다.>
원래 이 문구의 취지는 은퇴한 야구 선수가
더 이상 야구를 못하게 되는 그런 시기가 온다면(안올수는 없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멋지게 마무리를 하겠다는 뜻이었을텐데
지금은 <불꽃야구> 프로그램의 어려운 처지와 맞닿아서 다들 짠했다고 한다.(대형 방송사와 분쟁중이다.)
나는 거기에다가 늙은이 버전이 접목되어져서
마음이 더 짠했다.
나의 마지막을 내가 정할 수 없는 형편이다.
내가 정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만은...
추운 것, 아픈 것을 지독하게 싫어하고 못 견디는 나는
오래전부터 존엄사에 찬성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최선을 다한 후 존엄사를 선택하는 것이지
자살을 찬성한다는 것이 절대 아니다.
아무것도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그런 상태.
걷는 것도 먹는 것도 할 수 없고 앞으로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태로
각종 의학과 기계의 힘을 빌어 하루 하루 생명을 연장하는
그런 힘들고 안타까운 상태를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물론 오래전에 그 의사도 표현하고 증서도 받아두었고 아들 녀석에게도 여러번 연명치료거부 의사를 일러두었다만
세상 일이 그렇게 차근차근 진행되는 것도 아니고
막상 응급 상황이 왔는데 기도 삽관이나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콧줄이나 뱃줄에 주사로 환자식을 먹고
(먹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호흡을 도와주는 기계나 기구를 사용하고
소변줄을 달고 이런 마지막을 절대 보내고 싶지 않다는 의미이다.
내 주위에서 외삼촌, 엄마. 아버지의 힘든 마지막을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렇게 힘들게 버티고 있는 동생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존엄사는 1%의 회복 가능성도 없는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존엄사 이야기가 나왔던 적이 있었고
인공호흡기를 떼어달라는 가족의 이야기가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그 가족의 호소를 백분 이해한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힘들다.
환자는 자고 있는 듯 하여 모를수도 있겠지만 가끔 정신이 들때면 본인도 정말 힘들 것이다.
치매 엄마는 가끔 정신이 들면 이야기하셨었다.
<나 아직도 안 죽었어? 왜 안 죽어? 죽고 싶은데...>
얼마나 힘들면 그렇게 이야기 하셨을까나.
딸인지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 사람에게 말이다.
<니가 여기 왜 있어? 여기는 죽은 사람이 있는 곳인데...>
가끔 그렇게 우리를 보고 화들짝 놀라기도 하셨었다. 그런 날은 내가 딸인것을 알아차리신 날이다.
옆방에 누워계신 그 금술 좋던 아버지를 몰라보고
<너희 아빠는 죽었지? 나는 과부야?> 이렇게 물어보기도 하셨다.
엄마 시대 친구들 사이에서는 과부가 제일 큰 상처라고 하셨었다.
그 이쁘던 우리 엄마가 그렇게 망가져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너무 힘들었지만
내가 그 길을 가는 것을 하루 하루 느끼는 것도 정말 힘들 것 같다.
믿고 싶지 않아도 본인이 모를리가 없다.
아마 야구 선수들도 예전에는 잘 되던 동작이 안되고 실수를 연발하게 되고
몸이 굼떠지고 공과 발이 느려지는 것을 스스로 느끼는 과정이 고통스러울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도 자신들이 하는 야구의 끝을 타인의 의사가 아니라
내 스스로가 선택해서 마지막을 결정하고 싶을 것이다.
내가 잘 살았다라고 느끼면서 생을 마무리할 수 있게 하는 마지막 선택을 내가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의 발로가 존엄사라는 방법인데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다.
마지막에 하는 스위스 여행이라니 조금은 환상적이지만.
주무시다가 조용히 가신 분들이 늙은이들 사이에서는 최고의 복받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갑작스런 이별이 70대 이후에 찾아온다면 그것은 복받은 것 맞다.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면 아마도 이 방법이 최고이고 최선일 것이다.
그러나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기적처럼 선물로 찾아오는 것이다.
냉담자인데 오늘 아침은 기도가 필요하다.
배가 고파온다. 콩나물국을 다시 뎁혀야겠다.
(오늘 불꽃야구 유튜브 댓글중에 눈에 들어온 문구다.
우리들의 끝은 우리가 정한다.
그 문구 뒤에 달린 글이다.
당신들의 뒤에는 우리가 있다. 와우 멋지다.
진정한 팬덤을 보여주는 문구이고
스탭과 제작사에게는 더할나위없이 힘이 되는 문구일것이다.
그런데 내 뒤에는 누가 있을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