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아직 안죽었구나를 느끼는 순간

별 것 아닌 아주 사소한 것들이다.

by 태생적 오지라퍼

어제 저녁 어디서 들어왔는지 날파리 한 마리가 날라다녔다.

우리 집 고양이 설이는 난리가 났다.

걱정말라는 눈빛으로 설이를 안심시키고는 파리가 개수대에 앉는 순간

반사적으로 손을 날렸는데 원샷 원킬이었다.

옆에서 보던 남편이 한 마디 한다.

<파리채는 어디다 두고 손으로 잡는거야?>

파리채가 있었는데 어디 두었는지는 생각나지 않고

오로지 원샷 원킬한 나의 반응속도 생각에 흐뭇하기만 하다.

나 아직 안죽었다.

죽은 파리에는 설이는 무반응이었다. 파리채는 찾았다. 여름 준비 완료이다.


어제 시어머님 뵈러 다녀오던 길은 본의 아니게 드라이브 길이 되었다.

남양주가 그리 큰 지 새삼스러웠다.

돌아오는 길 4차선 대로 내가 직진하던 도로 위에 침대 매트가 떡하니 놓여있다.

아뿔싸. 내 앞 앞 트럭에서 떨어졌나보다.

떨어지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는데(그러니 운전중 대화를 하는 것은 위험하다. 남편이 수다쟁이인지 어제 알았다. 운전하는데 계속 말을 시킨다.)

트럭은 그 앞에 서있고 매트를 가져가려고 두 명이 뛰어 오고 있다.

영화에서처럼 매트를 올라타고 넘어갈 수는 없다.

옆 차선을 재빨리 본다.

뒷차가 속도를 줄여주는 것이 보인다.

재빨리 차선 변경에 성공하여 사고를 막았다.

다행이다. 죽을뻔 했다.

내 유연하고도 안전한 운전 실력 아직 안 죽었다.

네비게이션 파악 능력이 떨어지고(공간능력 역량 부족은 지능검사때 이미 알아봤다만)

최근 운전을 자주 안해서 그런 것일 뿐.(이번 주말 장거리 운전이 예정되어 있다만 조금 떨린다.)

다시 운전 자신감 최대치로 올렸다.


그 수다스러웠던 남편과의 대화 도중(운전 중 조용한 시간이 오면 졸음이 몰려오기는 하다만)

오래전 일들을 하나같이 명료하게 기억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대학 때 친구들 가족들과 함께 태능에 놀러가서 고기를 구워먹었던 일이며(보고싶다. 친구야..)

아들 녀석이 다쳤던 일들이며(다음에 그 에피소드를 쭈욱 나열해보겠다. 지금도 아찔한 일들이다.)

시아버님의 지나치게 깔끔하신 성격이며(돌아가신지 10년이 넘었는데)

어느 것 하나 잊어버린 것이 없다는 사실에 나 자신에 살짝 감동했다.

물론 남편에 대한 서운하고 기분 나빴던 그 많은 일들도 모두 다 기억한다만

굳이 그 이야기들은 꺼내지 않았다.

지금 이야기를 해서 이제야 사과를 받는다고 뭐가 달라지겠냐.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도 이렇게 기억력 킹왕짱인 내가

예전의 잘나가던 나였던 느낌이 나서 기분 좋았고

나 아직 안 죽었네를 확인했다.

(그런데 치매 환자도 과거는 잘 기억하기는 한다만...)


어제 저녁은 남편이 희망한

간이 세지 않은 김밥에 콩나물국이었다.

미니김밥에 유뷰초밥에 케일쌈밥까지 3종으로 준비하여

어느 것이 더 입맛에 맞을까 준비해놓은

나의 문제해결력 최상위 수준을 칭찬한다.

항상 플랜B, C 까지를 준비하는 그런 마음 자세로 평생 업무를 처리했지만

그래서 일의 양이 많아 조금 힘들기는 했지만

잘한다는 소리를 고맙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

이제는 그런 역량을 발휘할 기회가 많지 않아서

조금은 슬픈 나를 위로도 해본다.

아무리 작은 사소한 일이라도 그 일에 최선을 다해서 고민하고 몰입하는 그런 마음 자세를 아들 녀석에게도 물려준 것은 칭찬해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만.

(휴일인 오늘도 일하러 나간 아들 녀석도 대단해. 그것이 너의 자산으로 돌아올 날이 꼭 있을거야.)


오늘은 심사 아르바이트 한 건이 있는 기분 좋은 날.

브런치 글 한 편 쓰고

남편 아침 차려두고

산책 겸 일찍 집을 나서면

산책도 하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주변 임장도 하는

1석 3조 오전이 될 것이라 칼같은 계획을 세워본다.

별것 아닌 일에도 열심히 하는 바로 점이

지금까지의 나를 세우고 지탱했으며

나 아직 안죽었구나를 느끼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임을 잘 알고 있다.

셀프 칭찬으로 시작하는 오늘 아침이 조금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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