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품
불현듯 인간은 강해지기 위해 산다는 니체의 말이 떠오른다.
강해지면 행복해지고 강해져야 성취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나는 강자인가?
그러고 보니 나는 약자도 강자도 아닌 늘 어중간한 인간이었다.
약자면 동정을 받고 강자는 따르게 된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도움을 받을 수도 없고 내 도움을 바라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 도움이 받고 싶어도 누구에게 말할 수 없었고
도와주고 싶어 말하면 무시된다. 네가 그 정도는 아니잖아.
그렇게 나도 강자도 약자도 아닌 중간 어디쯤이었다.
강자로 인정받으려면 이름 앞에 명함이 필요하다 여겼다.
뛰어난 무언가를 해 낸 사람만이 강자로 인정받는다고.
아니면 좀 뻔뻔해져서 스스로 그런 척하던가.
그래서 세상에 화가 잔뜩 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강자가 될 수 없었기에 나는 강자들을 부러웠고 그들이 약해질 때 기뻤다.
간혹 강자의 말은 틀린 말도 명언이 되기도 하고
성공했으니 부자니까 결과만 보고 사람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갖는 것을
몹시 잘못됐고 미련한 생각으로 치부했다.
반면 약자는 한껏 자신을 낮춰야 그제야 목소리를 들어주니
늘 안타깝고 그들의 편에 서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그렇게 강자와 약자라는 단어가 주는 알 수 없는 불쾌함이 있었다.
하지만 니체가 말하는 강자는 그런 게 아니었다.
인간이 성취하면서 자신이 고양되었다고 느끼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을
바로 자신과 싸우면서 스스로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한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기에 누군가를 의지하게 된다.
그래서 강자를 찾고 나도 강자가 되기 위해 더 성장하려 스스로를 끊임없이 극복하며 이겨내는 것이다.
그것은 양육강식이 아니고 남을 돕기 위해 남을 더 이롭게 하기 위한 인간의 숭고한 본능이다.
공지영작가는 말했다.
사랑의 희생은 전적으로 자발적으로 더 강한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나의 삶의 목표가 그랬다. 강자가 되어 남을 돕는 사람이 되자.
하지만 나는 늘 어중간한 상태였고 그래서 의미가 없다고 여겼지만
강자도 약자도 아닌 그 어중간한 상태가 어찌 보면 늘품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강자와 약자라는 단어가 나에게는 흑백논리나 부조리함을 떠올리게 했지만
나는 강자로 나아가는 중이며 이미 강자의 자리에서 인정받는 그들을 존경하고
그 길을 따라가는 방법도 늘품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좋은 지름길이다.
사람은 언제든 변할 수 있고 나아갈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다.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기 위해 오늘도 강자를 꿈꾸며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다 보면 나 역시 강자가 되어
더 많은 사랑을 나누며 사는 늘품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늘품 : 앞으로 좋게 발전하는 품성